십자가의 의미

2000년쯤? 학교에서 소그룹모임 발표용

십자가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나는 나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게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는 죽어있었다. 내 영은 이미 사망의 상태였고 구원의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속량하셨다. 나는 죄의 법 아래서 죄와 율법의 종이었지만 예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자유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나의 죄가 더 이상 나를 하나님에게서 가로막지 못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많은 장애물들이 그의 십자가 아래서 다 제거되었다. 나는 죄를 지어도 담대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사단의 참소에도 이겨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다는 그 기가 막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그와 그의 독생자를 찬양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나의 마음속에 가질 수 있으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만민으로 그의 백성을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십자가위에서 증명하셨고 그리하여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할례가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일이 그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고 그의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평화를 전하였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를 머리로 통일된 것이다. 그 놀라운 경륜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예수의 십자가는 나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한다. 나의 죄로 인해 그 분께서 못박히셨다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깨달을 때 참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죄로 인해 못박히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로 그의 십자가는 나에게 겸손과 섬김을 요구한다. 내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그의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위함이었으며 그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 그 자체였다. 자기의 형체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한 그의 삶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며 다른 누구의 삶보다도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만하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나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할 만한 이가 있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신 것이다. 그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하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온몸과 발끝까지 씻기신 그 분을 볼 때에 나도 다른 이를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빚진 자의 비유는 내가 진 빚을 천부께서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게 조금 빌려준 것을 갚으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위에 죽이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심과 같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한다는 말이 아닌가.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기도를 가르쳐 주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참으로 그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끝임 없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과 사랑

2000년 (대학부 주보에)

학교에서 IVF 를 그만둔지 한 학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교회일과의 겹치는 사정으로 남들 다 하는 그런 ivf의 과정을 거치지는 못했다. 리더가 되기위한 LTC를 수료하지 못하고 3학년이 되었고, 화요일날 매주 모이는 예배도 학교수업, 교회모임으로 거의 못나가게 되니 나로서는 IVF 안에 소속해 있다는 것은 여간 어정쩡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감히 정리했을 뿐더러, 아예 얼굴도 비치지 말자,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그만둔 것이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며 여간 찝찝한 생각들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생각들의 이유가 무언지 몰랐는데, 이제는 생각들이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실망하였던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바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환아 이번학기는 소그룹모임 할 수 있겠어? ivf 그만하는 거니? 학번 모임 하는데 한번 나와라.’ 이런 말 한번 듣고 싶었던 문제였을까? 물론 그렇다. 단지 내가 IVF를 나가지 않은 이유로 나는 IVF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재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에 실망하였고, 그나마 IVF에서 나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기대를 묵살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IVF에게만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IVF 안에 있었을 당시의 사람들의 나에 대한 관심들은 ‘IVF안에 있는 나’에 대한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건부 관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IVF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IVF 안에 있는 너’에 대한 것이다.’ 그들과 나와의 가졌던 교제들은 ‘IVF’와 ‘IVF에 소속한 자로서의 나’와의 교제였지, ‘그들 자신’과 인간’김진환’과의 교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불행한 사실은 내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누군가의 존재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나?
당장 내가 떠나버린 IVF 사람들에 가졌던 관심들도 사라져버린 것은 나 자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이런 점에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고 느낀 것이다.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이런 조건부 관심과 사랑으로만 엮어져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때로 인간 사이의 관심과 사랑의 조건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소속’과 관련지어진다. 우리 대학부 안에서라면 ‘네가 대학부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 ‘네가 나의 순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가족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의 가족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그러나 ‘소속’하고만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면 문제의 깊이를 너무 얕게 본 것이다.

‘성격, 학벌, 재산, 외모’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 사랑, 관심에 우리는 진저리를 친다.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한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같은 종류의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대제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어느정도 ‘조건없는 사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속’과 관련된 사랑도 -안타까운 결론이지만- 본질상 같은 ‘조건부 사랑’이다.

어디까지의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이 이런 ‘조건’에 얽매이고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모든 조건에서 벗어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인간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일까?

성경의 해답은 간단하지만 또한 정답이다.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한번 여쭈어보라.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느리라.’

이런 노래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잊어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가 있다면 사랑 그 자체가 이유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슴 사무치게 깨달을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가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사랑의 문제가 어디까지 ‘조건’으로 얽매여 있는지 통찰력있게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얼마나 관심있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변함없고 끝없는 애정과 관심은 사람들 누구나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하는 것이다. 사랑없는 이 세대에 우리도 공동체 내부지향적인 소속조건의 사랑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세상가운데 빛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조건없고 변함없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자기 순원, 양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누가 나의 순원이고 양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기나 계기가 되어야 할 뿐 그 사랑과 관심이 ‘순원으로서의 누구’, ‘양으로서의 누구’에게 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에서부터 사람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절실하게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참된 기쁨의 회복

가끔 사람들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 라고 물어보면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살아’ 이런 대답보다는, 오히려 근심하는 표정으로 ‘별로야, 잘 못지내.’ 다른 말로 ‘영적으로 침체되는 거 같아’,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지내’. ‘죄만 짓고 살아.’ 이런 어두운 말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교회에서나 어디에서 말씀들을 접하면 주로 죄에 대해서 다루고, 회개하고, 결단해야하고, 새로워져야하는 이런 말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기쁨과 은혜의 말씀이 회복되어져야함을 느낍니다.

 우리 안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당연한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기쁨들과 평안들은 충분히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한번 안타까움을 느낄 때, 오히려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 열 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언제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참으심, 그리고 자백하고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세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새 언약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세지가 강조되어 선포되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민감해 졌을 때,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살아갈 때는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기뻐하게 되는 것은 분명 우리가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진정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행위로 인해 자신이 극한 죄인이라고 느끼든, 자신을 의롭게 느끼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로 인해 심한 고통 가운데 있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어려울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때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의 문제지 죄를 짓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무죄함을 느껴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 진다면 우리는 오히려 교만한 죄,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요일 1:10)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언제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주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네 죄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아직도 그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느냐?’ 이런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은 죄를 꾸짖어 죄책감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죄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그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습니까? 우리가 지어야할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죄인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죄에 민감하라, 범사에 반성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살전 5:16,18)

 우리는 죄를 조금 짓는 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 사람입니다.(엡 3:1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우리들은 죄가 많을수록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함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홈 5:1) 참으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내세울 수 있는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기에,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할 때에 죄책감에 앞서 한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기쁨이 먼저 밑바탕에 깔린 후에 죄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언제나 큰 기쁨 안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회개가 아니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갈 5:22) 비록 자신 안에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그 은혜와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본향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며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기뻐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참된 기쁨의 회복(2)


 지난번 참된 기쁨의 회복이라는 글을 통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관계없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서는 과연 참된 기쁨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참된 기쁨이라는 말을 쓴 것은 사실 특별한 의미 없이 쓴 표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 쓴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인한 기쁨 중에는 거짓된 기쁨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된 기쁨이란 바로 죄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기쁨이지요. 예레미야 3장 말씀은 이러한 거짓된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두 눈을 뜨고, 저 벌거숭이 언덕들을 바라보아라. 네가 음행을 하여서 더럽히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느냐? 사막에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물건을 터는 유목민처럼 너는 길거리마다 앉아서 남자들을 기다렸다. 너는 이렇게 네 음행과 악행으로 이 땅을 더럽혀 놓았다. 그러므로 이른 비가 오지 않고, 늦은 비도 내리지 않는데, 너는 창녀처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지금 너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또 일찍부터 네 친구가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렘 3:2-5, 표준새번역)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사람이 얼마나 쉽게 범죄할 수 있는지 그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노를 한없이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은혜의 깨달음은 있지만 그것이 죄를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행하고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인식은 그것으로 인해 기쁨은 생기지만 그 기쁨이 죄를 당연시 여기게 되는데서 나온 기쁨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거짓된 기쁨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의 차이는 위와 같이 죄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은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기쁨과 참된 기쁨의 삶을 구분짓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은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의 무게는 무거운 그대로 놓아두고 그 무게에 상응하는 만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는 우리가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무겁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들을 아무 죄의 대가 없이 없애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는 죄는 그대로 두고 그 죄에 대가가 치러지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자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마치 지렛대 한쪽에 다른 쪽의 무게만큼 올려놓아 평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지렛대 다른 쪽에 있는 물건을 치워버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치 지렛대의 반대쪽에 있는 물체의 무게를 더는 것과 같아서 그와 비례하여 은혜의 무게도, 그 깊이도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가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깨닫고 있는가 하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해서 은혜가 깊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비유를 살펴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39-43)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은 비유를 들어 많이 죄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죄를 많이 지은 자가 더 죄를 많이 사함 받기 때문에 더 은혜를 많이 누리게 된다는 말씀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의 시몬과 여인을 비교해봅시다. 누가 더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요 8:3-9)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그녀를 붙잡아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 중에 누가 더 큰 죄인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 하셨습니다. 다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누가 더 죄인이고 누가 덜 죄인이라고 할 것 없이 다 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에수님께서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시면서 자기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을 때 (막 2:17)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만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의 죄를 바로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세리와 창기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단지 자신의 병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과 자신의 병을 바로 알았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우리는 위와 같이 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죄를 지은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은 정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를 많이 지은 것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 로마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얼핏보면 율법이 마치 죄를 더 짓게 하였기 때문에 은혜가 더 넘쳤다는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은 죄를 더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유럽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따라서 위의 말씀은 죄를 더 많이 깨닫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은 바로 죄를 깊이 깨닫는데서 나오는 기쁨이 되어야하고, 오히려 죄가 은혜 앞에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 그 은혜는 거짓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두 기쁨은 모두 은혜를 깨닫는 것에서 나오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된 기쁨은 자신의 죄가 대수롭지 않아진 것이라 생각할 때 생겨나지만, 참된 기쁨은 자신의 죄가 극악한 것이라 생각할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은 은혜로 인해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점에서도 같고, 은혜로 인해 기뻐한다는 점에서도 같지만, 거짓된 기쁨은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참된 기쁨은 죄를 더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다다르기 힘든 균형점입니다.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은혜를 누려야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죄에 대한 민감함을 또한 가지고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런 놀라운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이것은 저에게 퍽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어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 같으면 ‘내가 은혜를 바로 누리지 못하는 자는 아닌가?’ 하는 이런 의구심이 들고, 반대로 어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 주저없이 나아가 죄를 대수롭지 않게 고백하고 은혜로 인해 감사하고만 있으면 ‘내가 은혜만 가지고 저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대의 의구심이 항상 들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얼마나 죄로 애통해야하고, 얼마나 죄에 대해 자유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를 저는 그 죄의식의 크기를 설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얼마전에 길을 가며 ‘아! 이것을 죄의식의 크기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 맞추어 나눠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과 같이 저는 죄에 대한 민감함과 은혜로 인한 자유함의 경계를 상황에 맞추어 나눠보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 그리고 은혜 없는 죄의식, 이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하고 비교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은혜로 인한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며, 은혜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도 않을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제가 깨닫게 된 바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죄의식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첫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의 죄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글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우리는 민감할 때나 민감하지 못할 때나 항상 죄인이며, 심한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리는 것은 반대로 심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는 스스로 의롭게 여긴다는 것과 다름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느냐를 가지고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은혜 안에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거짓된 기쁨 안에 살고 있는지 구분지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죄에 대한 민감함이 아니라 은혜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회개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심한 고통 가운데 죄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회개하는 것은 과연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동일까요? 죄에 대해 민감하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연히 그런 식으로 반응하며, 은혜 안에 살면서 거짓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그렇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회개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고 죄의식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죄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은혜를 깨닫는 깊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깨닫는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는 우리가 아무리 죄책감 가운데서 회개한들 그것이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어떤 태도로 죄를 짓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은혜없이 죄에 대한 민감함으로만 사는 사람은 심한 죄책감 속에서 죄를 지을 것이며, 반대로 거짓된 기쁨 가운데 사는 사람은 죄를 아무 생각없이 은혜만 기대하고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죄를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은혜를 강조하여 ‘너무 죄책감에 시달리면 안된다. 죄를 지어도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된다면 은혜를 왜곡하고 경멸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우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은혜 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또 한번 강조하지만 은혜는 자신의 짓는 죄를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엄청난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보다 더한 양의 기쁨이 함께 쏟아져 내리는 듯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중에 이러한 은혜만 믿고 죄책감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은혜를 생각하여 아무렇지 않게 짓게 되고 하나님께서 또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생각처럼 사악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으며 아무 가책을 느끼지 못할 때 이런 생각이 그의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연중에 내면에 감추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서 과연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극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옳다면 그 참된 기쁨을 사는 사람이 은혜 없이 사는 사람과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처음 글에서 이야기한 바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쁨 안에 산다는 것은 자신이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할 때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다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요.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 이후에 즉시로 주어지는 기쁨은 가히 물이 가득히 찬 댐의 한곳이 갑자기 터져 거대한 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나오는 그런 느낌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자신 없이 살 수 밖에 없지만 참된 기쁨 안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기에 언제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롬 8:15)

 이제 여기서 위에서 내린 결론들을 토대로 한 다음 표를 보면서 진정한 기쁨 안에 살아가는 삶이 어떤 살인지 결론을 내려봅시다.


 



































 


은혜 없는 삶


은혜 안의 삶


참된 기쁨을 가진 삶


거짓된 기쁨의 삶


정의


죄에 대한 민감함은 있으나 은혜로 인한 기쁨은 누리지 못하는 삶


죄에 대한 민감함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은혜에 대한 기쁨 또한 누리는 균형잡힌 삶


은혜에 대한 기쁨은 있으나 죄로 인한 민감함은 누리지 못하는 삶.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도 은혜로 인한 기쁨을 느끼는가?


X


O


O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X


O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O


X


생활을 하며 죄를 짓게 될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O


X


 


 참된 기쁨의 삶은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한 때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의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로 말미암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는 생활을 누린다는 점,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죄된 모습 그대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같다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은혜 없는 삶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글을 통해 살펴본 바로 참된 기쁨의 삶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때 죄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점,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죄를 지을 때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게 된다는 점에서 거짓된 기쁨의 삶과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정한 죄의식과 진정한 은혜를 동시에 소지하는 칼날같은 균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은혜를 무시하고 죄의식을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 값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반대로 우리가 죄의식을 무시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없이 방종한 삶을 살게 되고 우리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죄를 지을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져야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 자신이 의롭게 살았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인한 진정한 기쁨, 그 놀라운 생활은 우리의 죄를 그대로 짓는 방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겸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스스로 더 겸손하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참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저의 교만함 때문이라면 저는 글을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 내가 드러난다면 어떡하나? 어쩔 수 없이 내가 드러나고 만다면, 위대한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도, 유명한 저술가가 되어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지 않다’였습니다. 성경은 너의 이름이 알려지고 네 행위가 드러난다면 하늘에서 상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지 못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어떠냐를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기 원해서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것은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한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이 드러난다 해도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하는 행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언제나 고민과 근심거리였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원래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야 가능한 것이므로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부족한 듯 보여주는 것은 가식적인 것 아닌가? 겸손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들을 인정하고 개발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답변을 줍니다. 그러면 성경은 겸손이 과연 어떤 것이라 하고 있는지,  ‘겸손’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빌립보서 2장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이 말씀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쉽지 않습니다. 만약 문자그대로 우리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과 달란트들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도 불가능해 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야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라고 했을 때는 그럴만한 상황이 전제된 것입니다. 권면, 위로, 교제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토론이나 회의 같은 것이 그런 상황에 포함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 생각도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만 돌아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라기 보다는 남의 의견을 자기 의견만큼이나 존중해야한다는 의미를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합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비슷하게 겸손을 서로 용납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2-3)

 성령께서 무엇을 하나되게 하셨습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자기들만 언약의 백성들로 생각하고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을 가지고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나는 선택받은 민족이어서 구원을 받지만 너는 이방인이니까 안돼’ 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처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존중해 주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지 결코 자기를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은 자기 비하와 같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겸손이라 여길 때가 많지만 성경은 그런 겸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겸손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좀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5)

 마태복음 기자는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나귀의 새끼를 탄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이 위치에 걸맞은 대접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비하와 다릅니다.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나는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못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겸손이겠습니까? 정말 겸손한 왕은 어떤 왕입니까? ‘나는 왕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백성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좌에만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너희는 청함을 받을 때에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눅 14:7-11) 왕이 자기를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지혜롭게 비교해서 우월한 것은 우월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남들보다 좋은 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더 높은 자리를 취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결코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음 말씀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 – 겸손한 자 -를 세리에 비유하셨고, 자기를 높이는 자 – 교만한 자 -를 바리새인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로는 자기를 냉철하게 판단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이 교만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티끌과 같은 자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도저히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로울 수도 있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더 의롭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무겁습니까? 지구에 모래를 하나 더한 것이 무겁습니까? 우습지요.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덜 지었다고 스스로 여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하여 집니다.
 저는 음란한 죄가 참 떨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레미야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마음을 새롭게 먹고 음란한 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사단아 물러가라’를 외치고 음란한 것들은 생각지도 않으며 한 두어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참 평안했고 기쁨이 넘쳤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만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음란한 죄 안 짓는 새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이런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무렵 다시 또 같은 죄를 범해버리고 만 나를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나의 교만했음을 질책하며 통회하였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의 그 교만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게 되고 남들보다 죄를 덜 짓는다고 여기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을 의롭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한 교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혹시 자기를 하나님보다 낮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요 5:18)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는 세상 율법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는 의미입니다. (갈 4:1-7)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분명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겸손과 자기비하의 딜레마의 해답을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셨지만 그와 같은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려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까의 왕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나는 왕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왕으로 되기에 더 훌륭해’ 이것이 아니라, ‘나는 분명 왕이야, 하지만 백성들보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 입고 지낼 수는 없다.’ 참으로 예수님의 겸손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 다른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막 10:45)
 어떤 선교사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에서 선교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건강한 사람이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문둥병을 달라고 기도했고, 그 결과로 지독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문둥병으로 인해서 그 곳의 많은 문둥병자들이 감동되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그 예수님의

겸손을 품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2-13)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제가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서 인류에 큰 공헌을 할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만약 저하고 세상에 별로 쓸모 없어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날고 있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사고로 고장나고 탈출할 낙하산이 하나 뿐이라면 나는 과연 그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인류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세계의 발전이나 모든 것을 위해서 내가 살아남는 것이 더 올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리주의적인 발상일 뿐이지 성경적인 생각에는 어긋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훌륭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이고 어차피 부활하실 것이고, 또 인류의 생명은 수십 억도 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수 억 마리의 개미 생명보다 귀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모두의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귀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같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기꺼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비전을 품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나도 한국 교회를 변화시킬만한 큰 영적 지도자가 되고 싶다.’, ‘수많은 훌륭한 책들을 남겨서 다른 사람에게 도전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고 싶다.’ 등등 큰 뜻을 가져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너는 평생 너희 동생 병간호나 하고 살아

라’ 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 제가 평생 동생 간호하며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큰 뜻을 가지는 것이 결코 잘못된 생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일에 소홀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일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큰 교회에서 훌륭한 목사가 되어 교계에 큰 업적을 남기겠다는 뜻을 품기도 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조그마한 교회가 없는 촌락에 들어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일생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더 작은 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더 크고 훌륭한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겸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요나단의 겸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나단은 참으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나단을 생각할 때에 그는 다윗의 친구, 다윗을 도와준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만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마음만 먹으면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쩌면 왕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6-17)

 요나단은 자신의 적으로 여길 수도 있었던 다윗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다음 왕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요나단의 입장이었다면 ‘내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저 다윗의 다음이 되어야 한다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스스로 다윗을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면 혹시나, 하면서 못 본체 놔두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면 잘못은 사울에게 돌아가지만 나는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가 자신을 다윗 다음으로 여긴 것은 대단한 겸손에서 나온 행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큰 비전을 가지기를 원하며 왕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가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겸손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또 다른 겸손을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은 남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처음에 겸손을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옳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들을 자신이 꼭 해야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의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해서, 내가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충분한 왕이 될 자격이 있었지만 다윗을 대신 세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주여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4-15)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따라서 자신이 하던 일들을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워 맡게 하였습니다.(출 18:13-26)
 마찬가지로 겸손은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는 것이지만 내가 자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한

다는 것도 아닙니다. 가끔 나에게 벅차게 느껴지는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자질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을 교만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스스로 자기가 백성들을 이끌어 낼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능력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냉철하게 판단해낸 결과와 자신이 어떤 일을 감당하여야 하는가와는 절대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대체로는 맞지만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제 겸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더 살펴봅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베드로 전서에서는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훌륭한 따르는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항상 리더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따르는 자의 위치에 서기를 싫어합니다.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하시면 제일 은혜를 못받는 사람이 그 말씀을 듣는 다른 목사님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시고 그 제자를 가르치신 뒤에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leadership보다도 먼저 followship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제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의미의 겸손을 살펴봅시다.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잠 6:3)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라는 말씀에서 겸손은 어떤 단어로 바꿔 쓸 수 있을까요? 공손일 것입니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모습. 이것이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의 있게 대하는 것도 겸손의 의미에 포함됩니다. 또 겸손은 어떤 모습입니까? 겸손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스바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성경이 겸손은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쓰면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로 쓸 수 있습니다.
 
 1. 겸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2. 겸손은 자기를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낮추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할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일을 해야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3. 겸손은 자신의 위치에서 받을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4.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의롭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5. 겸손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서 자기 보다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6. 겸손은 작은 일에 충성하며 큰 일만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7. 겸손은 leader의 위치에만 서려는 것이 아니라 follower의 위치에서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것입니다.
 8. 겸손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9. 겸손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한 자들에게 여러 복을 주십니다.

 1.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벧전 5:6)
 2.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시 10:17)
 3.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십니다.(시 147:6)
 4.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잠 3:34)
 5.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잠 29:23)

 사람이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 죄가 바로 교만과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교만과의 싸움은 일평생 계속되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겸손하여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교만한 순간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냐고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첫째로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그 때 어거스틴은 ‘겸손은 교만의 반대다. 가장 큰 교만은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여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도 끝까지 겸손하기 위해서 자신을 항상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소.
정말 고맙소.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당신은 조용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 석방을 위해 기도해 주었소.
정말 잘한 일이오.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소.
그래서 내 옷차림이 달라진 게 뭐요?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꿇고 앉아 신에게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소.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소.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난 당신이 날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주길 원했소.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소?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하지만 난 아직도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소.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 작자미상 맨허튼의 흑인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