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2, The Hermitage St. Petersburg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
헨리 나우웬이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고 책을 한권을 써냈다고 하는데.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다.
이 그림은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온다.
저 지긋이 감은 눈과 두 손은 굉장한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아들은 그야말로 최고로 누추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 모습 속에서 죄악으로 가득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뒤에 서 있는 저들의 표정은 무표정인 듯 하면서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표정이 잔인,잔혹하다. 소름끼치는 표정들이다. 그들의 표정과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며.. 그래서 아버지의 넓은 아량과 사랑이 더 그윽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오만함을 꼬집으셨다. 난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영화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하실 때에 그들의 표정을 본 기억이 난다. 아주 떫은 표정.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림에서의 바로 저런 표정.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오랜기간 기다리셨는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에 얽매인 것들을 소멸하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이방인을 부르시고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기 까지. 얼마나 기다리셨겠는가? 고통받을 아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그마음이 초조하셨겠는가? 애타게 이방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그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슴 저미게 느껴진다.
누구나 한번쯤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해보아야 할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 앞에서 곧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 아들의 모습과 어느새 동일시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부터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퍼온 글
작품의 주제는 누가복음15장의 이야기이다. 한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먼 객지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다 없앤다. 할 수 없이 남의 집 더부살이로 연명을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동정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아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아버지한테로 돌아가기로 한다.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을 포옹한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러나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이것이 못마땅하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좋은 말로 달랜다.
렘브란트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 가운데 인간의 사랑과 용서와 포용이 잘 드러나는 장면을 택했다. 아버지는 자식으로 인한 지난 날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다정한 손길로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다른 형제들은 값진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쓴 채 옆 계단에 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냉담하게 이들을 내려다본다.
밝은 빛으로 강조된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 모습과 흰 수염, 그리고 핏기 없는 손길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쥐어뜯긴 것같이 보이는 엉성한 머리에 누더기옷을 걸친 아들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이다. 어둡게 묘사된 형제들은 시기와 무정과 죄악을 상징한다. 인간 내면의 사악한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 렘브란트는 역사상 위대한 종교화가이다.
주일 지상강론/ 고향가는 길
허윤석 신부
2000년 대희년의 그림으로 선정된 렘브란트의 작품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보면 돌아온 탕자인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손이 매우 인상적이다.
오른손은 부드럽고 길고 매끈하여 성모님의 손을 연상시키는 어머니의 손처럼 생겼고, 왼손은
오른손의 거의 1.5배 정도로 넓고 두껍고 힘있는 남성의 손으로 위엄과 권위가 느껴진다. 이것은
렘브란트가 하느님의 사랑을 예술적 의도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즉 어머니의 자애롭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깊은 사랑과 아버지의 위엄있고, 권위있고, 넓은 사랑을 함께 보담은 하느님의
사랑을 손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원천이요,
고향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고향 내음 나는 따뜻한 사랑이 그 주제이다.
복음에서 탕자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제 몫의 재산을 미리 모두 달라고
한다. 제몫을 청한 아들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
자신만의 쾌락을 누리는 데 쓴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힘은 그 상속 재산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된 것 역시 돈이 떨어져서 였다.
아버지 잘 만나 쉽게 얻은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면서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한 흔적은 성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어떻게
그렇게도 뻔뻔하게 아버지에 대한 죄스런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라는 말이 먼저 나올까?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되돌아 보자!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매일 커다란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 나의 생명과 신앙, 그리고 재능, 가족과 이웃, 건강과 물질들!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 형태로 받으면서 그 은총을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주일 미사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나? 하느님이 주신 건강을 자만하여 함부로 과음과
과식 그리고 즐거움에만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하느님이 주셨는데 오히려
그것을 남을 업신여기는 잣대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느님이 주신 시간을 자신의 발전과 봉사보다는
태만과 게으름으로 낭비하지 않았는가?
큰아들 역시 그리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한다.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큰아들은 이 말에 불평을 하며 “나의
것이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는 아버지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왔다.
은총(Grace)은 그 어원의 의미에 거저 가진 것이라는 1차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 중심이 아닌 은총 중심으로 살 때, 두 아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탕자처럼 그 은총을 남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교만과 죄의 생활을 하는 것과,
장남처럼 늘 하느님의 일과 기도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자신 스스로 규정하여 아버지의 땅, 은총의 땅에서 살면서도 늘 자신의
몫은 없다고 투덜대는 두 가지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총은 참으로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따라서 우리가 은총을
구하거나 바랄 때 참으로 먼저 준비되어야 할 보험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겸손이다.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 죄를 고백하기 전에 우리의 고향이신 하느님의 모습, 우리의 태이신
그분의 손길! 어머니와도, 아버지와도 같은 손길을 먼저 기억하고 그분이 주신 은총에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은총만을 하느님의 사랑보다 앞세워 생각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쉽게 떠났고 우리는
죄만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게 생각하여 두려워하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쉽게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향이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신다.
나는 고향가는 길이 너무나 좋다.
가끔 고향보다 고향가는 것이 더 좋다.
늘 고향갈 때 변변한 것 하나 손에 들지 못한 못난 불효자가
빈손으로 가도
반기시는 내 어머니!
그 살내음이 고향가는 길에 뿌려져 있다.
내 어미가 나를 찾아오면
이 죄인은 또 다른 데로 도망치겠지만……..
내 발로 고향가게 하는 저 내음은
내 어미의 살내음이리라.
나는 고향이 내게 오는 것보다
고향가는 이 내음이 좋아라.
흐르는 내 눈물이 고향가는 이 길을
보지 못하고 눈감게 하지만
내 언제 눈뜨고 제정신으로 고향떠나 왔노?
내 고향 다시 돌아가는 것은
내 어미 살내음 맡고 눈감고 찾아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