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수녀 ‘신의 존재’ 놓고 번민”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7-08-24 18:30 | 최종수정 2007-08-24 18:33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 수녀도 내면 세계에서는 ‘신의 부재’로 갈등을 겪었던 것을 보여주는 편지가 공개됐다. 더 보기 “테레사 수녀 ‘신의 존재’ 놓고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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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 ‘신의 존재’ 놓고 번민”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7-08-24 18:30 | 최종수정 2007-08-24 18:33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 수녀도 내면 세계에서는 ‘신의 부재’로 갈등을 겪었던 것을 보여주는 편지가 공개됐다. 더 보기 “테레사 수녀 ‘신의 존재’ 놓고 번민”
오늘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가 아는 언니가 암에 걸렸는데
그 언니를 아는 목사님 한분이
“수술을 받지말고 한번 기도해보거라”
라고 조언해주셨다고 한다. 더 보기 “나는 왜 하나님의 침묵에 관해 말하는가”
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가
왜 침묵이 하나님의 방식인가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침묵은 언제나 과정이다
침묵은 모든 상황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더 보기 “어떻게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가”
멘사동호회 게시물에서
다빈치코드에 대한 반박자료와 관련하여
2006년 6월
————–
S
제가 원하던 자료군요. 감사합니다. 이 글쓴이 역시 원하는 인용문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충분히 만족할만한 자료입니다. 앞으로 역사 공부할 기회가 생기면 이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고 싶네요.
저는 예수가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그게 교리의 역사와는 어울릴 수 없지만 기독교 정신을 조금도 훼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않습니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꼭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발원인 정통 유대교에서 오히려 예수를 신이 아닌 선지자로 보고 있다는 점,
예수에 관련된 역사가 굉장히 인간적이며 석가모니의 행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라는 성경의 고대구절이 사실은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고”
라고 해석된다는 점(한 과학자의 글에서 읽었습니다), 느닷없이 (양)아버지인 요셉이 성경에 등장한다는 점,
신이 하나의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죽고 다시 산다는 사실에 이성이 강력히 저항한다는 점 등에서요.
기독교가 위대한 종교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유럽 배낭여행 다녀와서 쓴 에세이가 있는데, 유럽의 번영을 오로지 기독교의 몫이라고 적었습니다.
천년전에 지어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보았을 때의 숨가쁜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물리적 정치적 예술적 모든 종류의 서양의 “힘”은 하나의 발원, 기독교적 전통으로 소급한다는 사실을
저는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없었더라도 인류는 언젠가 현재와 유사한 형태의 문명으로
진보하였을 것임은 틀림이 없었겠죠. 하지만 우리는 몇백년 혹은 몇천년을 기다려야 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때문에 서양중세 문명의 암흑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의 학술적 전통은 그리스의 것에 닮아 있되, 50억 인구의 시대에도
그리스적 자율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거대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바탕은 기독교입니다.
그리스식 방임사상은 인구 만명의 폴리스에서나 가능한거죠.
그것은 더 강한 군사력에 의해 워커에 짓밟히는 새싹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리스문명의 바탕을 유럽같은 거대 대륙에서 안정적으로 성장시킬수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제공한 구심력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리스문명을 먼저 계승했던
아랍은 유럽이 되지 못했고, 더욱 강한 구심력을 가진 중국은 그리스와 같은 고대문명을
불행히 가져보지 못했죠.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기독교는 인간이 가져본 가장 강력한 사상체계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상정한 신성의 혜택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현대인으로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인정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C
흠… 예수님께서 인간이라면 교리에는 상당히 금이 갑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으로, 그분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거지요.
유대 교에서는,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치 않습니다. 아직까지 메시야를 찾고 있지요.
‘정통’ 이라고 해서 모두가 옳다는 것이 아니란 건 S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신(하나님)께선,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계시고, 그를 섬기는 건 인간의 몫입니다.
김진환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잘 모르고, 겉돌고 있는 것이고
아주아주 자세히 기독교를 들여다보게될 때, 나중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예수의 부활’ 입니다.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고 나머지는 다 그것에서부터 출발하여 파생되는 것입니다.
수학으로 치자면 공리와 같은 것이죠. 또한 타종교(유대교, 이슬람교)과 다른 근본 출발점입니다.
기독교의 다른 교리들은 다 그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순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2.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의 죽음에 대한 유대교적 해석처럼 ‘하나님에게서 저주받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받은 것’임이 확인된다.
3. 그렇다면 그가 죽음 이전에 말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신적 존재’라는 것과,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한 것’ 이라는 말도 사실임이 입증된다.
4.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것과, 그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며, 그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실또한 증명되며, 그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사도들)이 증언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관계도 허물어지며,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순서에 따라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세계관이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에 기초한 종교이며,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
기독교의 진실여부를 판가름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김진환
S님의 글중
“저는 예수가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그게 교리의 역사와는 어울릴 수 없지만 기독교 정신을 조금도 훼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않습니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꼭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발원인 정통 유대교에서 오히려 예수를 신이 아닌 선지자로 보고 있다는 점,
예수에 관련된 역사가 굉장히 인간적이며 석가모니의 행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라는 성경의 고대구절이 사실은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고”
라고 해석된다는 점(한 과학자의 글에서 읽었습니다), 느닷없이 (양)아버지인 요셉이 성경에 등장한다는 점,
신이 하나의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죽고 다시 산다는 사실에 이성이 강력히 저항한다는 점 등에서요. ”
-> 예수는 인간이었습니다. 어떤 과학자의 그 구절 해석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라는 말도, (사실 우리도 그렇게 쓰지만), ‘미혼의’라는 의미를 포함해서
‘성경험이 없는’의 의미입니다. 또한 성경 다른 부분은, 명확하게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가 동침한 사실이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처녀탄생 분만 아니라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죽고 다시 산다는 사실은
경험에 완전히 저항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 이후로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주는 빅뱅으로 탄생되었다’는 세계관 대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택한 사람에게 있어서, 저 사실은 경험에는 저항되겠지만,
이성에 저항되는 사실은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아래 탄생된 것이며, 그분의 섭리아래 움직이는 것이고,
이세상에 합리적인 법칙을 만드신 분이 있다면 그것이 예외를 갖는다고 해서 결코 비합리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성에 저항하기도 하고 부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숭이의 몸에서 진화하여 태어났다는 것도,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처럼 경험에 저항하는 것 아닌가요?
진화가 신이 없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기에
사람들은 저것을 이성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결국 합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S
그렇군요.
그럼 저는 기독교가 상정한 사실중 하나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을 부정하는게 되네요.
어떤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W
흠….
난 부활이 기독교의 상징적 도그마 (dogma)이고 구원이 모토로 알고 있었는데… …
구원을 받기 위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하라고 들은 말은?… …☆
김진환
W님께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마음에 믿어야 한다는 말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율법의 핵심’ 이라고 설명하신 부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단순한 이타주의는 세상에 다른 많은 철학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이타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 앞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원래 구절에서 보여주는 그대로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보여준 ‘신적 사랑’이 인간 사이의 사랑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사랑의 본질적인 측면이 다른 철학이나 종교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사랑 또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며, 역시 부활을 통해 입증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듯이,
너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한다
라고 해야 바른 기독교입니다.
김진환
S님께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고자 하신다면 ‘예수 부활의 역사성’의 주제로 탐구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한 탐구는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거짓인지 진리인지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한 예로, 저널리스트 중에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사람은 부활의 역사성에 회의를 품고, 그것을 파헤치는 책을 쓰기로 다짐하고는 연구끝에 ‘누가 돌을 옮겼는가?’ 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그 책은 부활의 역사성을 오히려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결론을
내린 일화가 있습니다.
비록, 많은 역사적 문헌자료나 정황적 근거가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엄밀한 증거가 되어주고는 있지만
완전한 회의주의자에게까지 설득력있게 다가올지는 의문입니다.
제 생각에 만약에 S님이 하나님의 존재에 순수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합리성을 떠나 하나님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끼기 원한다면
홀로있는 시간에 밤하늘의 별을 보며, 혹은 들판에 핀 꽃 한송이를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들여다보며,
혹은 수천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모습에서, 혹은 진실한 기도를 통해
그것을 가슴 속 깊이 느끼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요.)
(저는 S님 같은 분이 오히려 이 방식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는 기쁨은 물리학적 지식이나 수학적 지식을 발견하는 기쁨과 비할 바가 못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그리고 존재의 의미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지.정.의 모든 측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존재의 방식의 획득이기 때문입니다.
W
성실한 답변 감사 드림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 하신 것 처럼) 너희도 네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하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요?
에전에 어느 목사님이 열변을 토하시더군요.
흔히 기독교를 ‘기적의 종교’로 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오직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고 믿는 자를 경계하라’는 말도 들은 것 같고… …
토론을 하자는 뜻은 아님니다.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고 답변에 고마움을 표 합니다…………………….☆
S
저는 죽기전에 꼭 개종한다고 여러사람에게 약속했습니다.
비겁한 이유이기는 하나 파스칼 논변 ; 신이 존재할 낮은 확률과 지옥이 존재할 때의 무한한 고통값을 곱한
고통기대값 역시 무한하다 에 따라…
사실 그게 꼭 기독교의 신이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존재를 신을 도입하지 않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한걸까.
세계의 탄생이 논리를 만든걸까 논리가 세계를 탄생시킨 걸까.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논리도 없었을까?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그럼 논리는 뭐지? 그것은 어떻게 탄생한거지?
왜 간단한 테니스공의 운동을 예측하기 위해 그렇게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걸까.
저 공의 운동은 그 수학적 계산을 물리적으로 수행하는데 조금의 시간지체도 없는 걸까.
왜 자연은 아무런 계산지연도 없이 그 자신이 수학인 것처럼 운행되고 있을까.
언젠가 신을 만난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잔인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겨왔냐고 묻고 싶군요.
2000년전 한 사람의 부활로 자신을 단 한번 증명할만큼 겸손한 척을 했냐고요.
세상을 만든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너무나 논리적인 분입니다. 아니 논리를 만들고
논리 자체인 분이겠죠.
그래서 나는 더 많은 논리보다는 더 많은 기적을 원합니다.
나는 기적을 설명할 논리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데이빗 흄이 말했습니다.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항상 그것은 오래전이나 혼자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저는 어쩌면 그것이 기적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경험은 기적이지만 두사람의 경험은 우연이고
세사람의 경험은 사실입니다. 해가뜨는것이 기적이 아닌 이유는 그것을 모든 사람이 보았기 때문이겠죠.
저는 아직까지 저만의 경험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경험해보고픈 욕망이 있네요…
김진환
W님께.
저도 토론이라기 보다 궁금해하시는 부분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도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볼 때, 그 목사님이 열변을 토하시며 말하셨다는 ‘오직 구원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 라는 말은..
틀린말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상당히 이기적으로 들리네요.
만약에 어떤 사람의 부모님이 정말 눈물나게, 어렵고 힘들게 일해서 뒷바라지를 해서 아들의 학비를 마련했는데, 부모님께 대한 감사는 고사하고, 오직 ‘학비마련이 목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네요.
표현이 마음에 안듭니다.
그러나 ‘구원이 아무런 댓가 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셔야 하는데 댓가는 없어도 주어지나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두 말이 모순처럼 들리지만 댓가란 ‘합당한 자격’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래 구원을 얻을만한 합당한 자격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없는 완전함’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볼 때 모든 사람이 죄가 있으므로 누구도 합당한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러한 죄용서의 기틀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격이 없음에도, ‘믿음’이라는 조건하에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말을 이해하셨다면 답이 나오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말입니다.
오히려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너희도 너희가 받은 사랑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하지 않는가?’ 라고 하면 올바른 말이 됩니다.
S
저는 아직까지도 한 사람의 부활의 증거가 그렇게 분명한지 믿기 어렵습니다만
진환님같은 접근방식을 가진 분이 내 옆에 있었다면 나도 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득 한번 기독교에 입문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종교적 열망이라기보다는 호기심 같은게 일어납니다.
김진환
S님께
파스칼의 논변이 S님 마음에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뜻밖이네요.
S님의 순수한 마음이 너무나 와닿습니다. 저도 그런 열망과 고민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다행히 이 좋아서 17세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요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침묵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정작 필요할 때, 또는 하나님을 찾으려할 때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시거나 하기보다
‘침묵’하실 때가 더 많으시거든요. 세상에는 그래서 부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실존을 탐구하게 된 것이구요.
그러나 뜻하지 않은 때에 사람은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간절한 추구 끝에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바울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수의 실체’를 경험한 것처럼 불현듯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인간의 내면에 아주 신비스럽고 은밀하게 생겨나는데 그것은 성경적 나오는
‘믿음의 비밀’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 합니다.
그래요… S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잔인하리만큼 자신을 숨기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반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잔인하리만큼 인간은 하나님 없는 세상, 이성으로 지배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성을 깨운 계몽주의가 있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잠자던 이성이 일어나면서 역사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상과 철학을 만들었고
그 철학은 다시 신학까지 파급효과를 미쳐, 이제 다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본주의 신학과 세상에 갖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러한 합리주의 세계관이 낳은 폐해를 보세요.
이 세상의 윤리는 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정치는 다수결로 돌아가고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면서, 현대판 노예를 생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유하면서도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수한 고독과 소외 가운데 살고 있고, 돈이 점점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모든 가치관이 돈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적없이 현실에서 순간의 행복만 추구하며
발버둥치는 것을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비밀스럽게 기적처럼 나타납니다.
바울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활했던 예수를 만났지만 같이 있던 사람 누구도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S님의 글을 읽으니 그런 순수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제 옛날 모습이 생각도 나고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참 좋을텐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침묵의 절정이었다
십자가의 고통당하시던 예수님의 울부짖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하나님의 방식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가장 강렬한 표현이었다.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어떤 것도 침묵보다 위대할 수는 없었다.
침묵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또한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분은 말씀보다는
침묵의 방법을 택하신다.
침묵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택할 수 있는 방법이며
그분이 자신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인간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교수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그분을 믿는다.
십자가에 고통이 끝나고 눈을 감으신
예수님의 얼굴에
입맞추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나는 그분의 침묵의 절정에 순간에
그분에게 입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