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이니라
(3절) 라고 나와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정욕으로 쓰기위해 구하는
것은 하나님게서 주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이 정욕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여기서 정욕은 1절의 싸우는 정욕과 연관지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앞부분부터 인용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쫓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
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
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
니라(4:1-3)
저는 여기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지혜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야고보서 1장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때문이고
3장 13절 이하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 이요
마귀적이니…(3:13-15)
라는 말씀이 뒷받침 해 줍니다.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수신인의 상황은
(아마 3장 초반에서 언급된 선생들.. 이라 여겨집니다.)
서로 자기 지혜와 총명을 뽐내고 싸우고 시기하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으로 난 지혜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기자가 말하려는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17)
그들은 서로 선한 열매도 없으면서 자신의 지혜를 뽐내기에만 급급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4장으로 연결되어
너희중에 싸움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바로 싸우는 정욕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서로 싸워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하나 능히 그런 방식으로 지혜를
얻지 못하니 너희가 얻지 못함은 하늘로부터의 지혜를 구하지 않기때문이다
구하여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받아봐야 서로 싸우고 잘난체 하는데
쓸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
이니라.. 라는 말씀은 자기에 필요만 생각하여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시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되려고 구한다고해도
너희가 싸우고 잘난체 하려는 목적이라면 받지 못한다.. 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원래 자기의 쓸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욕.. 으로 쓰려고 구하면 잘못이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디까지가 정욕인지 .. 애매모호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했지만
하실수 있다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셧고..
바울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몸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다윗도 자기 아들이 죽을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
그를 살려달라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구할 수 있는 것
우리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 필요대로 구하는 잘못이 아니라
그걸 받아서 잘난체 하려고 다른 사람들 시기하고 다투기 위해서.. 구하는 것을 뜻?
求?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슷할지 모르지만 상당히 다르지요..
예를 들면 어떤 좋아하는 자매와의 관계를 위해서.. 구하는 것..
죄악시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정욕으로 치부해버리고 기도하면 안될것 같지만 자신이 원하는대로 구하는 것?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것 아닐까요?
다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잘난척하기 위해 방언 통역의 은사를 구한다.. 같은것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응답 많이 받았다고 째기 위해서라든가.. ^^
그것이 야고보서 말씀의 뜻은 아닐까 합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읽을 때에 이런 배경을 생각하고 읽으면 말씀 한구절한구절이 새롭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수신인의 상황이 서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고 싸우고 있지만 진정한 선행으로써
보여지는 지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행위로 믿음을 보이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행함이 강조되는 이유가 그래서일겁니다.
행함없이 진정한 지혜, 믿음을 내세우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보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이 구절의 주해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전에 바로를 정복하셔서 그 군대를 깊은 바다에 소장시킨 것처럼 모든
죄악을 자비로 정복하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바다와 같다.”(Starke)’
이스라엘 앞에 버티고 있던 큰 바다…
그 바다 가운데로 그들은 지났으나..
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몰살당했다.
나를 쫓아오던 그 군대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던 것처럼
죄에 종노릇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는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고
그 바다는 쫓아오던 죄까지 삼켜벼린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
참으로 기막히고 감사한 일!
주께서 애굽 군대를 바다에 수장하셨듯이
나를 쫓아오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던지셨으니!
보라 하나님 구원을
보라 하나님 능력을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는
주의 손을 보라!
마태복음=출애굽기?
예수님 가족 애굽으로 피신하다
-> 야곱의 가족 애굽으로 가다.
예수님 가족 애굽에서 떠나다.
-> 이스라엘 민족 출애굽하다.
헤롯 아이를 죽이라고 하다
-> 바로 아이를 죽이라고 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다.
-> 이스라엘 민족 홍해를 건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다
-> 이스라엘 민족 광야에서 40년 보내다.
예수님 첫번째 시험 떡덩이를 만들라고 하다.
-> 이스라엘 민족 만나를 달라고 하나님 시험하다.
예수님 두번째 시험 성전에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하다.
-> 애굽 백성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
예수님 세번째 시험 사단에게 절하라고 하다.
->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버리고 우상숭배하다.
예수님 시험을 이기시다.
-> 이스라엘 백성 시험에 넘어가다.
예수님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다.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가르치시다.
오늘 마태복음을 본 내용입니다.
재밌습니다.
애굽은 실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공하셨습니다.
모세는 옛계명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공부하던 흔적
1.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에 이르렀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2. 구약시대에도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약시대에도 이방인에게 구원이 있었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지 율법을 폐하시고 완성하신 것, 성령이 주어진 것 이외의 의미가 있는가?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로 말미암아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3. 의의 종이 된 후에 다시 육신대로 사는 것은 바울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지 고의성의 존재
여부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 머리속은 정말 복잡하다.
세상 끝 날에 나타나심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날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끝날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과거로 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몰라서 히브리서 1장부터 차근차근 읽다가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시고, 이 모든 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1절의 선지자
들에게 여러 방법과 모양으로 말씀하신 것의 마지막 – 왜냐하면 그 뒤로는 아들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 을 말하는 것인 것 같다.
같은 의미에서의 세상 끝과 모든 날 마지막은 아닐까한다.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세상 끝날이라는 표현이 항상 예수의 재림
의 때, 심판의 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분명히 초림의
때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