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와 그것을 발단으로 하여 눈에 들어오는 성경전체의 흐르고 있는 사도들의 부활의 신앙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제가 깨달은 바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고린도 전서 15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12절을 보면 바울이 편지내용에 부활을 다루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장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던 사두개인들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그 때 사두개인들은 7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했는데 부활 후에는 그렇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오해하였다.(마 22:29) 부활후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을 바탕으로 이들의 공격을 맞받아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만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지 않느냐?”
사람들이 절묘한 비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도 그 논증에는 꼼짝하지 못하였겠지요.
어쨌든 이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부활하는 그런 일반적인 부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인가? 하는 특수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일부가 이와 같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 대해 실제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변증하고자 고린도전서 15장을 써내려 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 바울이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는 논증방식은 어떠한 것인가?
그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5-16절)
만일 부활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아마도 부활의 문제를 제기했던 고린도 사람들 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특수한 사건은 인정하면서 일반적인 부활을 부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아담)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한 사람(예수)를 통해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 이것이 바울의 논증입니다.
둘째로 자신이 받는 고난의 이유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29-31절)
바울이 날마다 죽음을 무릎쓰는 그토록 엄청난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저는 이 문제의 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저 그것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더 깊은 이유가 숨기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에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어서 그걸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내가 뭣하러 이렇게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음의 위협가운데 살아가겠느냐?”
다시말해서
“내가 이토록 위험을 무릎쓰고 고난받으며 사는 이유는 죽은자들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을 무릎쓴 고난을 받는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나는 그저 놀고 먹고 살면 그만이다…. 내가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죽은자들의 부활이 정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두번째 부활을 증명하는 논증입니다.
3. 그렇다면 부활과 바울의 고난과 어떤 정확한 연계성이 있는가?
바울이 말한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자신의 받는 고난의 이유가 부활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보면 죽은자’들’의 부활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수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한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고난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사실이 바울에게 왜 고난의 근거가 되었을까요?
이 문제의 답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그의 신앙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로마서의 구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7-18)
고난과 비례하여 후의 영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고 살아온 이유였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특히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사건은 자신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받으면 후에 부활 할 때에 동일한 영광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의 그 상을 바라보고 동일한 고난을 감수하며 한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활신앙은 사도들의 거의 모든 서신서에서 나타납니다.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로마서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 고린도 전서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고린도 전서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고린도 전서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린도 전서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고린도 전서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고린도 후서
*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 후서
*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고린도 후서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 후서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린도 후서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고린도 후서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 에베소서
*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 빌립보서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빌립보서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골로새서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골로새서
*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데살로니가 전서
*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 데살로니가 후서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디모데 전서
*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 디모데 후서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디모데후서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히브리서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히브리서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 히브리서
*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야고보서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 전서
*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 전서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일서
*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 요한이서
*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요한계시록
위의 구절들이 말하는 것 처럼 전 성경에 걸쳐서 이같은 부활신앙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근본적인 신앙이 되고 있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4.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를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도 없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을뿐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결론이 내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야할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놀고 먹고 즐기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이 그를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셔서 부활 후에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부활 후의 받을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 신자의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해주고,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이고 모든 사도들이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그들의 근본적인 힘의 원천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세지는 끝없이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의 문제(눅19장)
눅18:18-27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
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
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
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욥의 부에 대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되는 말씀같아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
을 조금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 제기 되는 문제는 과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
한 사람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욥이나 아브라함.. 등의 사람들은 모두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역시 성경을 읽을때에 과연 그 말씀이 누구
를 대상으로 한 말씀인가를 살펴봄으로 인해서 어느정도 해결해 볼 수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고 하신 말씀은 분명 지금 예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한 부자 청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이
대화의 전체적인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27절 말씀이 될 것입니다. 사람
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즉 영생은 자신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심히 어렵고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을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직까지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
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지만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
청년이 재물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지적하
고자 하신 것이 바로 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는 말씀인 것입
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재물을 사랑하는 한 청년’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재물
을 달라고 요구하실때 과연 그가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
해서 그의 마음을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을 다 팔기 원
하신다고 하는 것은 무리 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
함에게 아들을 요구하신 말씀을 보았을때 우리도 하나님에게 아들을 드려야 할 것
입니다.
다만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
여줄 따름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요구하셨을때 아들을 드림으로 인해서
내가 그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하신 그 상황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것은 그 청년이 재물을 사랑하여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이후에 그를 보시며(24절)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라는 말씀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물을 사랑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는 모
든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
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부자만 가지고 언급하신 것이라면 제자들이 이렇게 반
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고 하면 제자들은 ‘그렇다면 어느
부자가 구원을 얻겠습니까?(아무 부자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
?
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놀라움이었습니다. 그것
은 율법적으로 거의 완전해 보이던 그 청년이 재물을 사랑함으로 인하여서 구원을 ?
?
기가 어렵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구원 얻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의도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율법으로 완전
하여져서 구원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덧붙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상당히 어렵고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만일 네 모든 소유를 팔아.. 라고 했는데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판 것은
하나님께 덜 순종한 것 아니냐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성
경이 항상 문자 그대로 해석 되지 않는 다는 사실만 염두에 둔다면 문제는 간단합니
다. 네 모든 것을 팔라고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팔라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때 기식있는 것들이 다 죽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노아는 죽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자체가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에서 모든이
라는 말이 쓰였을때는 무조건 전부로 보면 안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경에서 말하
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뺀 모든.. 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 봅니
다. 예를 들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
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때 같이 말입니다.
부에 문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다른 말씀이 있는지 얼른 떠오르
지 않지만 생각이 나는대로 더 살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글 내용 모두 저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주석을 참고하였습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같이 나눠주셔서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상처
(대학부 주보원고)
상처가 생기는 것은
마치 유리그릇을 싱크대 위에서 떨어뜨려 깨먹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그릇을 일부러 떨어뜨려 깨뜨리고 싶은 경우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경험하게 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었는데 실수로 그릇을 깨뜨립니다.
깨뜨리지 말자, 깨뜨리지 말자 아무리 다짐해도 가끔은 그릇을 깨뜨리고
침착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가 생기는 데에는 떨어뜨린 사람 뿐만 아니라
그릇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릇은 가끔 잊곤 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떨어뜨린 사람을 상처를 주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그릇이 쇠그릇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강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실수를 용납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좀 더 자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떨어져도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를 주지 말도록 더 조심해야 겠지만,
상처를 받지 않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겸손함으로 자신의 부족함, 상대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면
상처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불신과 맹신
불신 –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
맹신 –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막무가내로 믿는 것
불신도 참 신앙이 아니고
더 중요한 사실,
맹신도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배로 오셨다.
그 배 위에 있던 제자 베드로,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게 하소서.”
“오라!”
그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마 14:28-29)
베드로는 처응부터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꼐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더 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 일은 성공해도 스스로 내가 이루었다고 교만해지므로 결국은 실패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이므로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긴다면
그 일이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해야하는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모두 떠넘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열심히 행하고 난 결과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꼐 맡길 때
그 일의 노력의 책임은 나이지만
그 일의 결과의 책임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