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드라마에서. 자신을 속여서 한 남자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던 여자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자신의 학교를 속이고, 직업을 속이고, 부모를 속여서… 자신을 꾸며댔고 남자의 사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
남자는 그 여자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여자가 남자에게 항변하던 그 질문.

“당신이 사랑한 것은 나의 학벌이었어? 아니면 배경? 외모? 당신이 그동안 사랑했던 것은 뭐야?”

남자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녀가 던진 그 질문을 나에게 되던져본다.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철저히 믿어왔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사람을 절대적으로 이유없이 사랑하며 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나는 내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아무런 기준 없이 정해야 할 것인가?

만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나와 결혼하자고 한다면. 나는 그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야할 것인가?


내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한 사람을 택해서 그와 결혼을 한다면 그 관계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결여된 결혼으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아무하고나 결혼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성취하는 방법인가?

이 문제는 어찌나 어려운지,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가장 신비스런 말씀 중에 하나이다.

창문, ‘시편 131편’

이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곡이다

여호와여 나의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게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음같이 하였나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가사도 아름답고 곡도 아름답고
이 131편은 다윗의 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무엇을 염두에두고 큰일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본 일이 있다.
내가 짐작건데 그것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성전건축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꼭 성전을 건축하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모든 물자와 장비, 인력을 총동원했고, 그가 할 모든 여건이 갖춰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네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해보라
그가 법궤를 가져온 것 만으로도 그렇게 기뻐서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는데
하나님의 성전을 얼마나 건축하고 싶어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그것은 아니라 라는 말씀이 얼마나 또한 서운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젖뗀 아이가 어미품에서 고요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는 내가 미치지 못할 일은 힘쓰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삶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대한 분명한 인정.. 겸손한 믿음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기

나는 오늘 대학부실 옆 피아노 방에서 참새 한 마리를 보았다
시골에서 외할머니와 살때 할머니가 참새를 잡아준 일이 있다.
날지 못하고 걸어다니던 것을 잡아오신 할머니 난생처음 참새란 동물을 손에 잡아본 어린 나는 그저 재밌어서 발에다가 실을 묶고 참새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윽)

오늘 본 참새는 어디서 왔는지 방에 들어와있었는데
투명한 유리창에 온몸을 부딪히며 푸드득푸드득 하는 모양이 사뭇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처음에 이거 잡을까 하다가 그 불쌍한 생각에 창문을 열어 내보내 주려고 근처로 갔더니 더 푸드득푸드득 거리며 나가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창문을 열어보려고 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참새는 겁에 질렸는지 연신 힘을 뺐고 깃털이 성하지 않았다.

참새는 유리란 걸 모른다.
그저 바깥 풍경이 보이니 그리로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언가 얼굴에 부딪혀도 뭔지 모른다. 그저 겁에 질려서 그 창문 밖으로 나가보려고 온힘을 뺀다.

참새야 들어왔던 방문 아직 열려있지 않니 그리로 나가면 되지 않겠냐?

참새수준에서는 어쨌든 바깥이 보이는 창문만이 유일한 길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딪혀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참새수준에서의 생각이었다. 참새는 자기 수준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참을 그러더니만 결국 그 참새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우연히 조금 열린 문틈으로 휙 날아가더니 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참새건 사람이건 자기가 아는 한도내에서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건 똑같이 우스운 일이라고 뒤돌아 나오며 생각했다.

틀릴 가능성

사람은 자기 생각에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신념의 온전한 근거와
배경지식들을 수집해야한다.

그래서 자기 주장이 분명해 져야하고,
무슨 일을 해도 확신있게 해야한다.
잘 모르고 무언가 일을 벌인다면 하나마나다.
자기의 결정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요한건.
그렇게 확고한 신념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념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
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1-2)

로마서 4장 23, 24절.
제 마음속 어두운 밤 하늘에 그 분은 별을 심어주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심어주신 그 별을 제 어두운 마음 속에도 심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두운 마음은 저의 추한 죄입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깜깜하고 두려운 하늘입니다.

그분이 심어주신 별의 이름은 의로움입니다.
동방박사를 인도하였던 별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그들이 그 별을 바라며 길을 가듯, 나도 언제나 바라보도록 만드는 고귀한 별입니다.

그 별은 어두운 하늘에 의미를 주었습니다.
별 하나가 있다고 해서 밤하늘이 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별 하나로 인해서 어두운 밤하늘은 더 이상 두려운 하늘이 아닙니다.

아직도 나의 하늘을 바라보면 온통 어두움뿐이지만
하늘의 한 곳에는 그 분이 심어주신 의로움의 별이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밤이 되어도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두려울 때면 하늘 어딘가에 그분이 심어주신 별을 바라봅니다.
소망의 빛을 하늘 가득히 비추는 그 별.

그 별빛을 따라 오늘도
마음 속으로 조용히 노래를 불러봅니다.
내 마음을 비춰주신 그 분을 향한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