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적 사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칼의 지적사기라는 책이다.
이 책은 여러 곳에서 논란이 일고 있어 제목을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책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절판이 되어 있어, 더욱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책이다. 헌책방에서도 찾을 수 없어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몇일전 우연히 헌책방 사이트에 책이 한권 올라와 낡은 책을 만원이라는 거금에 사들였다.
이 책은 주로 프랑스 사상가들의 현학적이고 비논리적인, 과학, 수학적 지식의 남용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실제로 프랑스 사상가들의 글을 읽으면 너무나 난해하여서 금새 주눅이 들곤 하는데, 물론 그것에 사상적 깊이 탓일 수도 있으나 이 책의 저자는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칼이 비판하는 사상가에는 라캉이나 들뢰즈 같은 한가닥한다는 유명인사들인데, 그러니 이 책은 충분히 논란이 될만한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에 대한 저자의 반감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책이어서 나의 성향과 잘 맞기는 했지만 그부분에서 약간 비약이 심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단지 과학적 지식의 남용에 대해서 지적했지만, 그것은 철학자들의 사상적 깊이와는 조금은 무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적 난해주의, 쉽게 쓸 수 있는 말들도 어려운 수학적 용어나 최신 물리학에 비유하면서 말도안되는 억지 상징을 들먹여 자신의 지적임을 과시하는 행위 그러한 행위에 속지 말 것.
이 책은 그것 하나 통쾌하게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아주 의미있었다고 해야겠다.

정서적인 강인함에 대하여

그래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정서적인 강인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련의 사회적인 압력을 횡포로 느끼고
나는 그것에 굴복한 나약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그렇게 신경쓰고 있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이다.
나는 대인관계 자체가 나쁘다고 본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나약한 인간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내 존재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행위가 내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닌가? 혹은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는 행위가 나의 미적 호기심과 감각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다른이들에게 연락하는 습관을 좋지 않게
본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자부심
그런 정서적인 강인함에 대한 환상을 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신을 세뇌시키는 행위를 어서 속히
근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삶이란 역시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맞물려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니까
나는 너무 많이 세뇌되어왔다.
어서 속히 내 스스로 만든 껍질을 깨고 나가고 싶다.

언어표현의 한계성

어떤 내면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할 때
언어가 사고를 왜곡하는 이유는 사고가 비언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 사고는 오히려 언어적이다 –
다수의 사고를 몇개의 언어표현으로 종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푸엥카레의 글에서

책을 읽다가 인용된 앙리 푸엥카레의 글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기상학자들이 자신있는 일기 예보를 하는데 그토록 애를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기라든가 심지어는 폭풍조차도 우연히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식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도,
비가 오게 해달라고 날씨가 맑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4[1909], 68~69

본래 내용은 카오스 이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어떤 물리계가 초기조건에 대해 민감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무심결에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순간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기도의 행위와 내용 속에는 늘 인간적인 확률계산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어 보이는지는 다를지 몰라도 과학적인 측면에서라면
즉 내일 비가오는 것이나 몇월몇일에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나 같은 인과율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이러한 인과율 너머에서 일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도 물리계 내부의 인간의 이해의 정도에 비례하게 가능성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우리가 내일 비올 확률에 대해서 개기일식만큼이나 확실한 정보로 추측가능하다면 내일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바른 답변을 하려면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해야한다는
것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언급하실 때에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다.
기도를 할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삶과 관련된 필요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신다고 하셨다. 물론 필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 속에 인간적인 한계선이 개입될 여지가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구절을 보면서
한번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똑같이 존재하나 나 이외의 다른 인간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의 의미는 변해야 하는 것일까
외부적인 상태에 의하여..?
그러면서 한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만일 그 상황에서 어떤 아름다움 음악을 발견하거나 하늘의 구름의 신비한 모습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아름다움을 공유할 사람, 저런 것을 함께 보여
주고 싶은 그런 사람의 존재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은 항상 다른사람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즐기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그 감동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적인 예술작품을 보며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처음에는 그러한 아름다움이란 다른 인간의 노력이나 그들의 감정과 소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의미는 역시 인간들 간의 소통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아니, 나는 인위적인 것 이외에 자연적인 것에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세계의 조화로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는 내게 아름다움
이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나는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그 느낌의 의미
를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고자 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다.
마치 고흐가 그린 하늘에서 그의 내면을 만나듯이
나는 자연이 만드는 하늘을 보면서 같은 아름다움의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너무나 가슴 깊이 와닿게 해주는 체험이다.
나는 세계에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발견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아름다움의 감정까지도 자연발생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나는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혹은, 정말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
그 사랑을 어떠한 유전자의 느낌 혹은 다른 생물학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싶은지 묻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