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가난해 공부못한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려고 항상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일등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암투병중에 돌아가신 저의 스승이신 “이동우 교수님” 께서..
앞당겨 정년퇴직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일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 아닌 이등, 삼등, 꼴등… 모두 기억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 (후략)
어느 인터넷 홈페이지에 있는 PROFILE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일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지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해지거나 어떤 직위에 오르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만일 그 말에 동의하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됨의 기초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 성공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은 가치없는 인생이 되고, 1%, 아니 0.1%의 성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 99.9%의 실패한 인생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대다수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 가치없는 인생이라고 낙인찍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을 분별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섬기는 사회, 모든 인생이 성공하고 자기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사회, 우리 사회에 그런 가치관이 심겨질 때 이 사회가 진정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치있으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하잘 것 없는 인생의 모습에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로서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그러한 진정한 가치들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치있습니다.
결혼의 의미와 배우자의 결정
결혼은,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떠나 성경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따라서 결혼은 신성한 가치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드러내야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자기가 해야할 의무이지 상대방에게 권리를 주장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기 때문일 수 없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이유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배우자를 선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준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을, 현대에도 말 그대로 적용해야할 성질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 신앙의 조건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사랑도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성경에 분명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범했을 때(말하자면 간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이 돌아오기를 바랬던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는 말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보통은 이성적인 끌림을 말하는 것이다.(필로스적 의미라고 해야할까) 이 말이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아무하고나 결혼해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아가페)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은 배우자 선택에 관해서 신자와 결혼하라는 것 이외에 어떤 조건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일 성경에서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면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잘못이 될 것이다. 그것은, 외모, 학력, 성격, 어떤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떤 모범적인 예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독신이셨고, 바울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배우자를 고르는 고민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여야 할까? 어떻게 선을 행하고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과 ‘누구와 결혼하여야 할까?’ 라는 고민의 질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앞의 고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고민이라면 뒤의 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의 고민일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하면 되며, 그것은 인생의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의 결정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단한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에 관심은 더 중요한 것들에 쏠려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배우자를 결정할 때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 문제는 인생에서의 부수적인 문제이지, 핵심은 믿음, 예배, 사랑, 선행, 겸손, 섬김 등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선배들의 조언에 의지하는게 최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배우자 선정에 관해 많은 조건들을 제시한다. 외모로 결정하면 안된다. 사랑이 최우선이다. 조건이 비슷해야한다. 배우자의 가정환경이 중요하다. 남자에게 재력이 중요하다. 여성은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한다. 장남이면 어떻다. 독자면 어떻다.. 중매는 어떻고 연애는 어떻다. 나이는 언제가 좋다.. 등등 굉장히 많다.
그러나 심각한 고민 끝에 나는 일단은 이렇게 결정지었다.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고르던 간에 인간적인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자 하는 것은 예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떠어떠한 기준에 따라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짓는다면 그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결혼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정짓는 것과 다를바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그 기준으로 사랑은 내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는 의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아무 조건이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된다.. 는 말이 되고… 어떤 조건을 붙힌다면… 처름 누구누구와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보시길..)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내린다.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과 결혼하려는 마음은, –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다들 기분나쁘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솔직한 내 결론을 말하면, –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앙. 만은 예외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옷을 입으면 더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나쁘거나 죄가 아닌 것처럼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는 이기심이 나쁘거나 죄, 헛된 정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정욕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고 다른 사람과 싸우려는 그런 성격의 정욕을 말한다.)
은현이가 질문한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 남자와의 결혼은 성경적으로만 말한다면 아무런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다. 결혼 후에 변함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느냐가 성경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그것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자 않는다.
그러나 경험상의 문제는 제시할 수 있다. 지금까리 그런식으로 결혼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혼에 있어서 사랑과 순종을 실천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들이 따르는지, 미리 검토해 볼 수 있다. 어떤 일의 결과를 예상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하신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한 잘못이다. 부부간의 사랑과 순종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를 때 버려야 할 것들을 미리 생각치 않고 따른다고 했다가 나중에 포기하는 것이 잘못이라 말씀하신 그 말씀을 간접적으로마나 적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에 부딪히게 된다면 최소한으로 결혼후에 겪게 될 어려움들에게 대해서 많은 사례들을 검토함으로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은 신성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사랑과 섬김 신뢰가 지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러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할 때 우리가 검토해야할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다. 나와 그 배우자 서로가 영원히 사랑하고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으로서 한 가정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조건들은 각자 나름대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 이런 환경이라면 자신 없다는 등으로…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을 내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조건 정도의 사람이어야지만,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있는 사람으로서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예를 든다면 이 말의 의미는 보다 정확하게 전달되어 진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정확히 번역하면.. 간음의 소지가 다분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불합리한 결혼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아내를 향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조건의 아내와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그의 자질을 염두에 두신 것임에 분명하다. 호세아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떤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느냐가 문제의 촛점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순종, 섬김을 실현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느냐가 문제의 촛점인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결혼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며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조건을 달아야한다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사랑과 순종)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배우자 결정에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 이렇게 질문하여야 한다. 나는 과연 이 사람과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인 사랑, 섬김으로 이 사람과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지혜있게 조언을 듣고 결혼 후의 어려움들을 검토하고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냉철함으로 그 배우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본 후에 결정내린 것이라면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남자라고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행복한 가정
뉴스를 보던 중.. 행복한 가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 어머니 하신 말씀
“엄마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 뭔 줄 아냐
그건 회사갔다가 들어오면 저녁에 식구들 얼굴이나 보고 있는 거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드라마에서. 자신을 속여서 한 남자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던 여자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자신의 학교를 속이고, 직업을 속이고, 부모를 속여서… 자신을 꾸며댔고 남자의 사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
남자는 그 여자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여자가 남자에게 항변하던 그 질문.
“당신이 사랑한 것은 나의 학벌이었어? 아니면 배경? 외모? 당신이 그동안 사랑했던 것은 뭐야?”
남자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녀가 던진 그 질문을 나에게 되던져본다.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철저히 믿어왔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사람을 절대적으로 이유없이 사랑하며 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나는 내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아무런 기준 없이 정해야 할 것인가?
만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나와 결혼하자고 한다면. 나는 그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야할 것인가?
내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한 사람을 택해서 그와 결혼을 한다면 그 관계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결여된 결혼으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아무하고나 결혼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성취하는 방법인가?
이 문제는 어찌나 어려운지,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가장 신비스런 말씀 중에 하나이다.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기
나는 오늘 대학부실 옆 피아노 방에서 참새 한 마리를 보았다
시골에서 외할머니와 살때 할머니가 참새를 잡아준 일이 있다.
날지 못하고 걸어다니던 것을 잡아오신 할머니 난생처음 참새란 동물을 손에 잡아본 어린 나는 그저 재밌어서 발에다가 실을 묶고 참새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윽)
오늘 본 참새는 어디서 왔는지 방에 들어와있었는데
투명한 유리창에 온몸을 부딪히며 푸드득푸드득 하는 모양이 사뭇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처음에 이거 잡을까 하다가 그 불쌍한 생각에 창문을 열어 내보내 주려고 근처로 갔더니 더 푸드득푸드득 거리며 나가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창문을 열어보려고 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참새는 겁에 질렸는지 연신 힘을 뺐고 깃털이 성하지 않았다.
참새는 유리란 걸 모른다.
그저 바깥 풍경이 보이니 그리로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언가 얼굴에 부딪혀도 뭔지 모른다. 그저 겁에 질려서 그 창문 밖으로 나가보려고 온힘을 뺀다.
참새야 들어왔던 방문 아직 열려있지 않니 그리로 나가면 되지 않겠냐?
참새수준에서는 어쨌든 바깥이 보이는 창문만이 유일한 길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딪혀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참새수준에서의 생각이었다. 참새는 자기 수준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참을 그러더니만 결국 그 참새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우연히 조금 열린 문틈으로 휙 날아가더니 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참새건 사람이건 자기가 아는 한도내에서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건 똑같이 우스운 일이라고 뒤돌아 나오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