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얼마전에 한 아는 후배가 새벽 5시쯤
전화를 걸었다..
병원인데.. 병원비가 없어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새벽부터 피곤하고 귀찮았지만.. 상황이 절박해보여
일단 나가기로 했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는데.. 정말 쓰기 싫지만
필요하면 카드로라도 해줘야지 어떡하겠냐..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것저것 거짓말 투성이인거 같았다.
우선 카드로 별수없이 16000원정도 내고 등록은 했는데
새벽에 싸워서 각목에 맞아 머리가 아픈 모양인데
x-ray 찍고 진찰 받으려면 보험도 안되고 해서 돈이 몇만원
더 든다.
그 애 말로는 일단 진찰비 도와주면 자기 때린 사람하고
합의를 봐서 돈을 갚겠다고 하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합의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였다.
게다가 바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교회 선배들 몇명 같이 모였는데 얘 도와주는게 좋을라나
하고 의논하다가 상황이 이러고 돈도 없으니
먼저 합의를 보고 돈을 받아서 치료를 받으라 했다.
그랬더니 이꼴로 어떻게 집에 가느냐며 차비하게 2만원만
달라는 것이다. 나는 돈도 없고 버스타고 가야지 무슨 택시
타려느냐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도리어 실망했다고 휙 돌아서 가버리는 것이다.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서,
너는 내가 새벽부터 도와주고 싶어서 와서 이렇게 하는데도
돈 못보태준다고 실망했다느니 그런소리 할 자격이 있느냐,
너는 내가 돈으로 보이고 돈 보태줄때만 좋은 형이고 돈 안
보태준다고 실망하고 내가 그런 존재냐고 큰소리를 쳤다.
그 말을 하고 휙 돌아서 와버렸지만 웬지 속은 찝찝했다.
그래도 도와줄걸 그랬나 하는 마음에..
사실 어떻게해야 옳은 일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일까.
상황만 놓고 볼때는 어떻게 해주던지 얘한테 도움이 될만한
일은 안되 보였고, 돈도 없는 상황이라 먼저 합의를 보라고 한
것이 최선이었는지 모른다.
글쎄 , 그게 한 두주일 지난 이야기이니,
오늘 우연히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을 읽었는데
그 사건이 또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라는 이 말씀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라면..
나는 어떻게 하여야 했을까..
다시한번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런 순간이 된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난 아직도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계획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어하나
하나님의 계획은 대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길을 정하고 계획을 세워도
생각 못한 길들이 나타나고
있는 길들이 사라져 있는 경우가
인생에 얼마나 많았던가 더 보기 “하나님의 계획”
삶의 묘미
삶의 묘미라고는 적었지만..
묘미라는 단어가 이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일까
잠시 생각한번 더 해보고
한번의 시험과 그 결과로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큼 묘한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다.
10년전에
10년후의 나의 모습은 이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년전에
10년 동안 나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다짐한 그대로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삶은 언제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그 묘미가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 때의 나.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나는 중학교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유도 없었고, 다른 목표 이런 건 없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그래서 나는 공부하는 것이 그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요즘 인간복제로 핫 이슈를 만들고 있는
라에리안 무브먼트에 빠진 기억이 난다.
그래 그 때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도 별로 없었고,
10년 후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것은,
내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관련 책을 본 뒤로
1999년에는 정말 세계가 종말할까.
그렇다면 10년후 나는 존재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 때 내가 아무리 10년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고 했었더라도
지금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군악대에 가려다 실패하고
생명공학을 전공해 대학을 졸업.
선교에 대한 꿈도 꾸고,
한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일이 없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국제 협력단에 지원하고,
어쩌다가 중등부 교사도 하고 있고,
동생을 먼저 군대에 보내고,
산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제자가 된다는 건 순종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순종한다는 것은 마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
지금까지 아무리 고기를 못잡았다고 한들
그분이 던지라고 하면 던지는 것이다.
갈바를 모르고 가는 아브라함처럼,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한번 더 던지는 베드로처럼,
지금도 순종의 그물을 던지며
하루하루 살고자 한다.
전도서에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시기와 우연이 임해서
언제나 예상한 대로 사는 것은 아니니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한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지,
저것이 잘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10년 후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바로 일주일 후의 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니.
말씀이 등불이 되어 다만 나의 앞 길을 비추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
온전한 제자 되어
스스로의 자만에 빠지지 않고
순종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주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 자는 복되니,
이는 풍랑에도 그 마음이 침몰지 아니함이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요동하지 말고,
주의 품에 평온히 쉬어라, 나의 영혼아.
살만한 세상인가
예전에 보았던 연극중에 이런 제목을 가진 게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세상은
살만한가?
즐거운가.
삶이란…
어떨 때는 너무나 인생이란게
무의미해 보이고
때론 고통의 연속으로 느껴지고,
삶이란 것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찾고자 하지만
시야가 아주 자욱해져버리는 걸 느끼기도 하게 된다
마치 시지프가 끝없이 돌을 굴리는 것 처럼.
죄라는 것이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삶은 어렵다.
끝없는 죄와의 싸움.
그 속에서 겪는 좌절.
누구나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삶이 한번 뿐이라는 것은
언제나 긴장을 느끼게 한다.
선택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것.
흘러간 세월은 붙잡을 수 없는 것.
초조함, 당황스러움, 조급함, 후회,
가끔씩 느끼는 절박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던 사람들도
때론 이러한 현실과 감정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사람들 간에 간혹 느끼는 조그만 관심
사랑.
사랑의 감정이 느껴질 때면
인간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발견마저도 배반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진정
세상은
살만한 것일까.
그저
묵묵히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때론 자신에게 실망해가며
때론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며
때론 사랑의 배신감도 느끼고
외로움, 고독감을 씹으며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에 대한 감정과 위로를 체험해가며
사는 것일까.
무언가
다른 삶을
영위할 가능성도 있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당연한 것이라면
체념하고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자꾸 집착하게 되는 것 무슨 까닭인지.
바울은 그랬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자기는 더 좋다고.
내가 전도한 한 할머니도 그랬다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성 어거스틴도 그랬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그랬다.
죽음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죽음을 황홀하게 맞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지나간 후에 깨닫게 되는 것……
내일을 바라볼 때는 짙은 안개속을 보는 것 같이 알 수 없지만
그 내일이 어제가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도하신다…..
우리는 인생길을 홀로 걷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