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떠나 성경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따라서 결혼은 신성한 가치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드러내야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자기가 해야할 의무이지 상대방에게 권리를 주장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기 때문일 수 없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이유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배우자를 선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준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을, 현대에도 말 그대로 적용해야할 성질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 신앙의 조건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사랑도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성경에 분명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범했을 때(말하자면 간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이 돌아오기를 바랬던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는 말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보통은 이성적인 끌림을 말하는 것이다.(필로스적 의미라고 해야할까) 이 말이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아무하고나 결혼해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아가페)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은 배우자 선택에 관해서 신자와 결혼하라는 것 이외에 어떤 조건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일 성경에서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면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잘못이 될 것이다. 그것은, 외모, 학력, 성격, 어떤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떤 모범적인 예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독신이셨고, 바울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배우자를 고르는 고민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여야 할까? 어떻게 선을 행하고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과 ‘누구와 결혼하여야 할까?’ 라는 고민의 질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앞의 고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고민이라면 뒤의 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의 고민일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하면 되며, 그것은 인생의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의 결정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단한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에 관심은 더 중요한 것들에 쏠려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배우자를 결정할 때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 문제는 인생에서의 부수적인 문제이지, 핵심은 믿음, 예배, 사랑, 선행, 겸손, 섬김 등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선배들의 조언에 의지하는게 최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배우자 선정에 관해 많은 조건들을 제시한다. 외모로 결정하면 안된다. 사랑이 최우선이다. 조건이 비슷해야한다. 배우자의 가정환경이 중요하다. 남자에게 재력이 중요하다. 여성은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한다. 장남이면 어떻다. 독자면 어떻다.. 중매는 어떻고 연애는 어떻다. 나이는 언제가 좋다.. 등등 굉장히 많다.
그러나 심각한 고민 끝에 나는 일단은 이렇게 결정지었다.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고르던 간에 인간적인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자 하는 것은 예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떠어떠한 기준에 따라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짓는다면 그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결혼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정짓는 것과 다를바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그 기준으로 사랑은 내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는 의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아무 조건이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된다.. 는 말이 되고… 어떤 조건을 붙힌다면… 처름 누구누구와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보시길..)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내린다.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과 결혼하려는 마음은, –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다들 기분나쁘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솔직한 내 결론을 말하면, –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앙. 만은 예외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옷을 입으면 더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나쁘거나 죄가 아닌 것처럼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는 이기심이 나쁘거나 죄, 헛된 정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정욕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고 다른 사람과 싸우려는 그런 성격의 정욕을 말한다.)
은현이가 질문한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 남자와의 결혼은 성경적으로만 말한다면 아무런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다. 결혼 후에 변함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느냐가 성경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그것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자 않는다.
그러나 경험상의 문제는 제시할 수 있다. 지금까리 그런식으로 결혼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혼에 있어서 사랑과 순종을 실천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들이 따르는지, 미리 검토해 볼 수 있다. 어떤 일의 결과를 예상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하신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한 잘못이다. 부부간의 사랑과 순종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를 때 버려야 할 것들을 미리 생각치 않고 따른다고 했다가 나중에 포기하는 것이 잘못이라 말씀하신 그 말씀을 간접적으로마나 적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에 부딪히게 된다면 최소한으로 결혼후에 겪게 될 어려움들에게 대해서 많은 사례들을 검토함으로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은 신성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사랑과 섬김 신뢰가 지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러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할 때 우리가 검토해야할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다. 나와 그 배우자 서로가 영원히 사랑하고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으로서 한 가정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조건들은 각자 나름대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 이런 환경이라면 자신 없다는 등으로…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을 내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조건 정도의 사람이어야지만,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있는 사람으로서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예를 든다면 이 말의 의미는 보다 정확하게 전달되어 진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정확히 번역하면.. 간음의 소지가 다분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불합리한 결혼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아내를 향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조건의 아내와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그의 자질을 염두에 두신 것임에 분명하다. 호세아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떤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느냐가 문제의 촛점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순종, 섬김을 실현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느냐가 문제의 촛점인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결혼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며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조건을 달아야한다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사랑과 순종)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배우자 결정에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 이렇게 질문하여야 한다. 나는 과연 이 사람과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인 사랑, 섬김으로 이 사람과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지혜있게 조언을 듣고 결혼 후의 어려움들을 검토하고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냉철함으로 그 배우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본 후에 결정내린 것이라면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남자라고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정말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22살 여자 대학생입니다.
저는 남자가 저를 예뻐해주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물론 신앙도 좋아야하겠지만
저만 바라보고 사랑해줄수 있는 착한 남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저의 욕심이고 정욕일까요..?
물론 저는 외적으로 최고로 반하더라도 꼭 나의 내면을 보고 더욱더 사랑해 빠지게 해달라고
제가 외모에 뒤지지 않는 성품과 신앙을 갖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렇게 얘기 하십니다. 외적으로 첫눈에 반하거나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다고..
진짜 그럴까요. 저는 너무 아직 어린가요..?
이 글은 그런 내용과 큰 상관은 없구요. 제 생각에는 전혀 욕심이나 정욕이 아닌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외적으로 첫눈에 반하는 게 이상하거나 전혀 나쁜 건 아니구… 다만, 그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좀 다른 문제인 거 같아요. 책임감이나 노력, 배려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걸 필요로 하게 되잖아요. 암튼 글을 보니 마음이 이쁘신 거 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