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pherdess with Her Flock 1864 Oil on canvas


글쎄, 이 그림이 주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로지른 지평선, 구름 사이로 비추는 태양의 빛,


소녀의 시선과 그 소녀를 따르는 양무리…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자연 속에 소박한 일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소녀의 모습이 웬지모를 깊은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590-1610, oil on canvas,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이삭의 희생은 중세시대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노인, 어린아이, 동물(양), 천사가 함께 들장하고, 그들의 심리가 각각 제각각이어서 화가의 재능을 시험하는 도구라고 들은 것 같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인물의 내면 심층이 드러난다. 이삭은 고통스런 표정을 하는데, 이는 카라바조라는 사람 자체가 워낙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지, 안그랬으면 이삭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삭의 표정은 카라바조 만의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표정은 굉장히 이상적이다. 저 단호한 눈빛은 천사가 나타난 후에라도 ‘방해하지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머리를 내민 어린양의 모습은 겸손하기 짝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은, 굉장히 밝은 빛으로 휩싸여 있으며,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영원한 도성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의 믿음은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 천사는 양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중간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이는 양과 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영원한 성을 모두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삭의 순종은 조금 부각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아브라함과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구한 도성을 감동깊게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렘브란트,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찰나를 잡은 숨막히는 듯한 그림. 이 그림은 양이 없는 것이 또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삭이 대단히 크게 부각되고 있다. 크기도 크고 모든 빛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이삭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찾아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는 단호했다. 100세가 되어서 낳은 자식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까와 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으로 믿었다. 나는 여기 아브라함의 표정에서 그 마음을 또 읽어낸다.
얼굴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렘브란트의 손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단호함과, 그래도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부정(夫情)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것만 같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Art History Museum, Vienna

역시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지만 내가 본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둘의 표정은 생생하다.

골리앗의 머리는 죽은 머리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같고, 먼 곳을 응시하는 다윗의 표정은 단호하지 짝이 없다.

지금 보니 칼의 크기가 골리앗의 것으로 보기에는 조금 작지 않나 싶다. 마치 다윗을 위한 칼 같다.
책에서 보기로 이 골리앗의 얼굴은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화가는 그림 속에서 자기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벤 다윗은 바로 화가의 어릴 적 자화상

카라바조는 뭘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별 이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기 과거의 현재의 두 자화상을 한 그림에, 그리고 과거가 현재의 자아를 죽이는 내용으로 그래낸 것은 무척 특이한 발상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