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를 알 수 없는 이 아름다운 그림은
한 어린아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입맞추려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디서 누가 그린 그림인지 통 알 수 없는 그림이지만
십자가의 고통이 끝나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천진하나 그를 사랑하는 한 아이의 모습이 사뭇 감동적이고
그림을 그린 작가의 마음과 신앙을 들여다보게 하는
매우 깊이있는 그림이라고 생각이 든다..
J.W.Waterhouse, ‘The Favorites of Emperor Horonius’
교보문고에서 Waterhouse 라는 사람의 작품집을 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가다 한페이지를 펴 보았는데 이 그림이 양면에 걸쳐 인쇄되어 있었다
제목과 그림만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 이것저것 유추해야했다
호로니우스라는 황제는 작가가 직접 본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럼 작가는 호로니우스의 이야기를 책이나 어디선가 보고, 그 장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왜 호로니우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가 그린 장면은 어찌보면 무언가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나는 혼자 이 그림을 한참 입가에 미소를 띄고 즐겁게 들여다보았다..
괜히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의 놀이를 즐거워하던 왕이 생각난다.
영화에 나오는 그는 처음에는 위엄차게 등장하지만 광대들의 우스꽝스런 놀이에 푹 빠져 체통은 아랑곳없는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 호로니우스라는 황제는 그정도로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황제의 표정과 자세가 진지하고 위엄차다.
작가는 황제는 바보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자세에서 그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 위엄있어보이는 자세이지만
막상 황제인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비둘기의 모이를 주는 일이다.
그가 이 일을 사뭇 즐겼다는 것은 주변의 신하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신하들은 허리를 숙였으나 몰래 황제가 하는 일을 보고 있다.
신하들의 표정을 보면 뭔가 어이없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호기심인것 같기도 하지만,
웃지는 않는걸 보면 황제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황제에 대해 작가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마 워터하우스는 황제가 새들에게 모이를 준다는 사실에 대단히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일은 황제다운 일은 아니다. 사소한 일이면서 하찮은 일, 또는 한가해보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한가한 일을 즐겼다.
저 오른손으로 새들에게 정성스레 모이를 주고 고개숙여 관찰하는 모습은 황제가 정신적으로 이상해서라기보다
무언가 인생과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새들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리 교회 사찰집사님이 교회 마당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낭만적?으로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비둘기가 더럽다고 싫어하지만, 나는 비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그 때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어본 일이 있다. 집사님이 가르쳐주시기를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손만 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비둘기가 내 손에도 내려와 앉았다.
또다른 생명과의 교감, 나는 그 순간 그런 걸 느꼈다.. 비둘기가 나를 받아준다는 기분.
황제는 그런걸 즐겼을지 모른다..
머리아픈 국정들보다.. (저 신하들이 들고 있는 책이 무엇이겠는가? 결재서류같은 건 아닐라나?)
그는 이런 한가한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런 아이러니하면서도 신기한 장면은 작가에게 이 그림에 대한 생각을 부추겼을 것이고 이 그림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J.W.Waterhouse의 미술을 본 개인적인 느낌은 1800년대 말 작가 답지 않게 상당히 고전적인 미술에 가까운데
미인들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과 비슷하여 내가 봐도 정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여인의 모습은 현대적이다.
사실 옛날에 그린 그림들에 보면 비너스를 주제로한 그림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 않나?
아 이 당시에는 이런 여인을 아름답다고 했구나.. 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고 마는데 Waterhouse 가 그린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그런게 다르다. 그래서 와 님프들이 이렇게 예쁘믄, 그 속에 묻힌 남자는? 뭐 이런
경험을 예전 그림을 볼 때와 다르게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_-
또 섬세하고 따뜻한 색감이면서, 여인의 시선과 포즈가 절묘해서, 그런 부분을 현대적 감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방식에 따른 현대적 감각의 미가 조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작가인 것 같다.
어떨 때는 길게 그린 여인의 모습이 클림트의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또 아무튼 고전적 그림이 갖지 못한
특이한 감각을 지닌 작가인 것 같다.
또 여러가지 재미있는 신화적인 소재를 찾아 그린 그림이 많아.. 뒷얘기를 캐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그림을 보고 추론해보는 재미도 있고 말이다.
루오, ‘서로 사랑하여라’
이 그림은 루오의 ‘서로 사랑하어라’ 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27년도 작품인데, 제목과 그림의 나오는 여인들이 인상깊다..
십자가의 사건을 그리면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 저녁식사 때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세족식을 하신 후에 나오는 구절이다.
(요 13장)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죽음으로 가시나이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온몸으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고 있다.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어느 시대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 못한 동시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화란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렘브란트 이래로 가장 위대하고, 혁명적인 화란의 화가”라고 불리어졌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6년 동안에 그린 1,500개나 되는 작품 가운데서 단 한 개의 작품을 팔았을 뿐이다. 만약에 그가 좀더 많은 작품을 팔 수 있었다면 그는 좀 더 확고한 사상과 더 좋은 인식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아마도 그가 질병과 절망으로 인하여 37세의 젊은 나이에 자멸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 고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 매우 동정적이었다. 이는 자기를 고통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두어 생각하는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벨기에의 Borinage의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같이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
그가 체험한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88년부터였다. 그의 형 데오는 인상적인 화법으로 자기 메시지를 전하도록 그를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사마리아 사람이 과연 선한 이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말에 태워서 주막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사람이 상자 속에 있던 귀한 물건들은 다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자기 생명만은 구할 수 있었다.
이 그림에 여리고로 가는 구부러진 길에 저마다 따로 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인다. 고흐는 그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얼마나 경건을 가장하고 있는지 이 그림에서 잘 보여주었다.
반 고흐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또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해 보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의 선한 이웃들도 개인적으로 혹은 여러 기관을 통하여, 사악한 사람들에게 매맞고 도적 맞은 사람들과 이기적이고 무관심한사람들에 멸시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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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맣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친구를, 아내를, 무엇이든 네가 좋아하는 것을 살아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길 위에 있으리라, 그러나 사랑하되 고상하고 진지하게 친밀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힘을 다하고 모든 지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에 도달할 것이다. 확고한 믿음에 이를 것이다.
이 그림은 그의 종교화 삼부작 “삐에따” “나사로의 부활” “선한 사마리아인” 중 하나이다. 고흐는 생 레미에 있으면서 전통적으로 종교적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룩함이나 신적 임재를 그려낼 수 있는 미술 언어를 연구하였다. 고흐는 올리브나무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들라크로아 작품을 다시 그린 것인데 토마스 아켐피스의 윤리를 그려낸 것이다. 아켐피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외적 행동은 칭찬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자비심에서 행한 행동은 그것이 비록 가장 작고, 세상 눈이 보기에 무가치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판단하되 행하는 자의 속마음을 보고 판단하지, 행한 일의 크기나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목사들의 위선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고흐 자신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윤리를 그린 것이다. 나아가서 자신이 당하던 아픔과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느 ㄴ자기 개인의 시련이 뜻없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뜻과 목적이 어느 날 무덤 저너머의 삶 속에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남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고흐의 이상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 고흐의 예술과 영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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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사마리아인의 모습.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사람의 몸이 꼭 붙어서 하나가 되면서 누가 누구의 몸인지 마치 한사람의 몸처럼 그려내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있다. 실로 구원이 임하는 순간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Gogh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그림
처음으로 그림이란 것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몇시간이고 이것만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파도치는 고흐의 하늘은 굉장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2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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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그의 영적 순례의 절정, 곧 영원한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을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분들이 이 그림의 상징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지만, 이 작품이 고호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중요성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유화는 기성 교회의 어둠과 위선을 넘어 자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그의 영적 순례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삶을 경축함과 동시에 임박한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죽음 가운데 내재한 소망, 곧 그가 해방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룰 것임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야말로 반 고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그림이다.
…
마을의 교회: 마을 풍경에서 뽀족탑을 가진 교회가 초점을 이루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이 교회는 불란서 남쪽 프로방스 지방의 교회라고 하기보다 전형적인 네덜란드의 교회이다. 다른 몇 집에는 불이 켜 있지만 이 교회만은 어둡다. 이것은 마치 텅 비고 불 없는 교회처럼 무의미한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의 교회의 문은 닫혀 있으나 고흐가 신앙의 문들 닫은 것은 아니다. 고흐는 교회 안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과 승리적 교제를 나누고 있다.
“모든 소리가 끊어질 때에도, 별 밑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린다.” 이 말은 고흐의 복음주의적 시기인 1877년 고흐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요, 동시에 그의 평생에 걸친 영적 확신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싸이프러스 나무: 커다란 불꽃기둥처럼 위로 솟아있는 싸이프러스 나무 역시 고호 자신의 열망은 물론, 보편적인 이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나 영원하 영과의 궁극적 합일을 말해준다.
“해바라기 그림을 그릴 때 즈음, 나는 해바라기에 대조되는, 그러나 해바라기와 같은 영감을 주는 것을 찾앗는데, 그것이 바로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여기 싸이프러스 나무는 ‘죽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껴안으려는 영혼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하늘:
한 때 고흐는 “달이 아직도 빛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태양과 저녁 별들도–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준다.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게 있으리라(마 28:20)는 말씀을 상기시켜준다.”고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그가 암스텔담에 있을 때 밤하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처럼, 생 레미 요양원에서 본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힘을 그린 것은 고흐의 새로운 미적 발견이었다.
해와 달을 함께 그린 것은 아마 낮이 저물고 밤으로 접어드는 황혼의 때를 암시하는 것 같다. 고흐는 일찍이 이 때를 디킨스의 말을 따라 ‘복된 황혼’이라고 불렀다. 이 복된 황혼의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신비한 때다.
어쨌든 ‘Starry night’은 임마누엘 칸트가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 이 두가지에 나의 생각을 끊임없이 집중시킨다’는 말을 상기시켜 주는데,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중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원의 문턱에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대낮에서 별이 빛나는 밤으로 이행하여 가는 것, 땅에서 하늘로 치솟아 있는 싸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비나는 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영원한 존재와 궁극적 합일을 바라는 고흐의 열망릉 보여주면서, 또한 그의 죽음과 불멸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릉 풍경과 더불어 하늘의 달과 별들의 우주적 드라마를 혼합 연출하는 가운데 창조를 찬양하고 있다. 고흐의 종교적 열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별이 빛나는 밤’이고, 종교의 필요성 때문에 밤에 나가서 별을 그렸다고 하는 고흐 자신의 말과 전적으로 부합된다.
– 고흐의 영성과 예술, 최종수역편
아 진정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하늘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아브라함이 별을 보듯,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그려내었던 것인가.
사이프러스 나무의 오른쪽 가지는 달을 향하고, 두번째 것은 큰 별을 향하였다. 하늘을 향한 거대한 사랑과 바램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우주적인 영원불멸함의 가치를 찾아보려 애쓰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일까.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