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찰나를 잡은 숨막히는 듯한 그림. 이 그림은 양이 없는 것이 또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삭이 대단히 크게 부각되고 있다. 크기도 크고 모든 빛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이삭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찾아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는 단호했다. 100세가 되어서 낳은 자식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까와 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으로 믿었다. 나는 여기 아브라함의 표정에서 그 마음을 또 읽어낸다.
얼굴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렘브란트의 손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단호함과, 그래도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부정(夫情)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것만 같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Art History Museum, Vienna
역시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지만 내가 본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둘의 표정은 생생하다.
골리앗의 머리는 죽은 머리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같고, 먼 곳을 응시하는 다윗의 표정은 단호하지 짝이 없다.
지금 보니 칼의 크기가 골리앗의 것으로 보기에는 조금 작지 않나 싶다. 마치 다윗을 위한 칼 같다.
책에서 보기로 이 골리앗의 얼굴은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화가는 그림 속에서 자기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벤 다윗은 바로 화가의 어릴 적 자화상
카라바조는 뭘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별 이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기 과거의 현재의 두 자화상을 한 그림에, 그리고 과거가 현재의 자아를 죽이는 내용으로 그래낸 것은 무척 특이한 발상이라 생각한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The Ambassadors, 1533, National Gallery at London.
그냥 보면 얼굴 비슷한 (흡사 쌍동이 같기도 한) 두 사람의 초상과 같죠. 제목을 보아하니 무슨 대사인것 같고요.
그리고 뭐 특별한 것이 보이나요?
하지만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가의 깊은 사색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답니다.
여기 그려전 사람들은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란 사람인데요. 굉장히 유명한 실력자들이라고 합니다. 교양있고 젊은, 25, 29세의 대사들.
젊은이들은 장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죠. 왼쪽은 영국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 29세,(그림을 자세히 보면 복장과 글씨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의 성직자의 옷차림은 조르주 드 셀브, 저명한 학자이자 주교, 25세.
가운데는 2층으로 된 탁자가 있는데요 어떤 것들이 보이나요?
무슨 지구의, 악기.. 이런게 눈에 띄는데요.. 이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건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서양화는 의미없이 그려진 것이 없어요. 지나가는 개 한마리도 의미가 있죠.)
먼저 2층에 있는 것은 천상계와 관련된 것을 의미합니다. 천구의, 사분의, 해시계 등… 이건 종교적인 의미하고도 연관이 되죠. 오른쪽에 있는 성직자와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기 위한 그림 상의 도구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층 탁자에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 과학과 관련된 컴퍼스, 악기(서양화에서 악기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발달된 예술과 과학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왼쪽에 있는 망원경을 든 사람과 연관지을 수 잇는 것들입니다. 여기 또 왼쪽에 있는 책은 수학책이구요.
그리고 그림을 보면 어색하게 아래쪽에 희고 길다란 물체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요.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건 아주 정밀하게 그린 ‘해 골’ 입니다.
이건 서양화에서 원근법을 표현하는 과학적 방법이 개발된 이후에 가능해 진 건데요. 변형 투영법이란 걸 사용해서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것이죠. 옆으로 그림을 눕혀서 보면 해골이 보입니다. 이걸 왜 그려놨을까요?
‘화가의 저주?’ 헉.. 화가가 이 사람들을 싫어해서 ?
그런 건 아니고요.
서양화에서 해골은 ‘죽음’ ‘인생무상’을 의미해요.
마치 그림자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그려져 있는 의도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들(두 명의 대사들)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해골과 겹쳐있는 악기의 줄이 자세히보면 끊어져 있어요(여기서는 확인이 안됨) 그건 갑작스런 죽음을 암시하는 거라고 합니다.
두 명의 대사들은 유능하고, 젊고 세상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빼놓을 것 없는 갖출 것 다 갖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문제는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깊이있게 눈여겨 보지 않는한 눈치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홀바인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그림속에 제시하였습니다.
그건 배경에 커튼 뒤로 살짝 보이는 은색 십자가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아주 서운하지만 왼쪽 위 구석진 부분 – 커튼이 살짝 걷어진 부분- 에 있습니다.)
서양화에서 커튼은 감추는 것을 의미하고 커튼을 치우는 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유능한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처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 – 십자가라는 의미입니다. 화가는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기에 빼놓을 것 없는 유능한 젊은이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문제가 있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이 가진 것들은 다 무의미하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들 뒤에 감추어진 것이다.
이 시대는 찬란한 선진 과학을 만들어 냈고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된다.’
아주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화가의 이런 생각을 읽어가며 그림을 보는 것 아주 재밌는 일이죠.
이런 신앙이 투철한 화가들의 그림의 내용을 읽고 감상하면 그냥 사진하고 다를 것 없는 그림들에게서도 진한 감동이 배어져 나온답니다. 그냥 그림만 보면 다 눈으로 보고 본대로 사실 그대로 화가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 그린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림은 화가의 생각, 화가가 그림속에 담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재구성된 또하나의 세계입니다.
렘브란트, ‘다윗과 요나단의 작별’
David’sFarewell to Jonathan, 1642, oil on wood,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윗, 품에 안긴 것은 요나단.
아니, 이 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요나단인 듯 하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더 이상 평범한 그림이 되지 않는다.
다윗은 위대하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요나단은 얼마나 더 위대한가.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3-4)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5-19)
난 요나단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앞에 겸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였음에도 다음 왕이 다윗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다윗이 목숨을 부지하였던 것은 요나단 덕분이었다. 그는 다윗에게 자신이 가져야할 왕의 상징인 칼과 겉옷을 주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다 한 사람이다.
그림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보다 더 품위있고 아량이 넓어 보인다. 다윗은 그의 넓은 아량에 안긴 아이같은 느낌이다. 요나단의 위대함이 조금은 느껴진다.
램브란트도 그런 요나단의 위대한 성품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에서는 그런 면이 느껴진다. 다윗에게 걸려있는 칼은 요나단의 성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왼쪽 배경은 요나단이 가야할 곳, 오른쪽은 다윗이 숨어야 할 곳. 둘의 상반된 처지도 그림은 보여준다. 다윗은 수풀에 숨어서 목숨을 이어가야만 한다. 요나단은 그를 찾지 못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난 이 그림을 보면 요나단의 성품에 감동하게 된다. 난 요나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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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인’님의 글입니다.
올해 1월 28일 토요일에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월 1일부터 있는 서울의 초대전 준비로 바쁜 가운데 신망애 성화감상 원고 독촉전화가 왔다. 내일이 마감일이라고 했다. 연락에 차질이 생겨 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다른 일을 내려놓고 신망애에 실을 성화를 생각하던 중 다윗과 요나단을 그린 그림을 실으라는 마음의 감동이 워낙 강하여서 순종하였는데 선정된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림 속의 다윗이 누구냐?
그림에 대한 작품설명은 세계적인 권위자가 하였는데 나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 속의 두 사람 중 누가 다윗이냐는 문제였다. 성구사전을 찾아 다윗과 요나단의 기사를 다 찾아 읽었다. 요나단은 나의 여지껏 생각과는 달리 굉장한 장군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스케치들을 다 찾아보았을 때, 등을 보이고 있는 소극적인 모습이 다윗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권위자의 해설과 다른 견해가 생겼다. 밤 늦게까지 이 작업을 마치고 주일 예배에 참여하였는데 선포되는 말씀이 ‘곤고해진 다윗’이었다. 이 설교에서 나는 어제 밤 늦게까지 한 나의 수고에 보답하듯이 왜 다윗이 등을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증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해설은 렘브란트의 다윗과 요나단 그림의 감상문이면서도 삼덕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깨우침에 반응한 나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뒷표지 다윗과 요나단 작품해설
미술이 자율성을 노래하기 시작한 1800년대 이전까지 서양미술사는 기독교미술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경은 미술가들의 영감의 보고였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히 다윗은 미술가들이 가장 애호하는 인물이었다. 다윗의 영웅적인 면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의 업적 등은 미술가들과 patron(후원자, 애호가, 주문자)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그림 속의 중심인물로 돋보이게 표현되어져 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다윗에 관한 또 하나의 그림도 위에서 말한 관성으로 인해 당연히 화면의 정면의 인물이 다윗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의 작품해설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성경의 기사들과 이 그림과 관련된 렘브란트의 스케치들을 종합하여 연구한 결과 뜻밖에 이 그림 속의 정면의 크고 근엄한 모습의 인물이 요나단이고 등을 보이고 있어 소극적으로 표현된 인물이 다윗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순간 필자는 렘브란트 회화의 영성에 감동으로 흥분하였다.
정확하게 삼상 20장 41절에서 취하여진 이 그림은 극도로 위축되어진 다윗의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렘브란트가 의도적으로 주인공인 다윗의 뒷모습만을 그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화면 속에 정지된 한 순간 이상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회화에서 정면의 인물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뒷모습은 소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그림 속에서 주인공이 비록 다윗일지라도 심히 곤고해진 다윗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는 회화적 표현성을 희생시키면서 다윗의 곤고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이 그림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곰과 사자, 거인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이지만 사울왕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위협에 다윗의 인내가 바닥이 나고 믿음도 한계가 드러났다. 다윗의 인생의 버팀목이 다 날아가 버렸다……’
이것들을 읽어버리게 되니 다윗은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환란과 시련에 하나님보다 사람이 두려워지게 되었다. 믿음이 바닥이 나면 사람이 두렵게 보인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사람이 크게 보이기만 한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내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다”라고 항변하고 한탄하는데서 다윗도 연약한 인간임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 2001. 1. 28 주일 설교 ‘곤고해진 다윗’중에서 –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다윗과 요나단이 성경의 대표적인 친구였듯이 렘브란트는 그림 속의 두 인물을 한 몸같이 겹쳐 그리고 있으며, 요나단의 두 팔은 다윗을 감싸고 있게 그림으로써 둘이 하나됨을 강조하여 위의 성경구절을 그림 속에 담아 내고 있다.
이들의 우정은 그 생명까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친히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하기도 한다.
‘다윗의 마음과 요나단의 마음이 하나가 되듯이 사단과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인생의 왕의 자리를 그리스도에게 내어 놓아야 한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주님께서 우리 생명을 요구하신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요구하신다…
요나단이 왕자의 상징인 겉옷과 군복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듯이 우리의 모든 것도 예수님께 넘겨 주어야 한다.’
– 2000. 12. 31 주일 설교 ‘다윗과 요나단’ 중에서 –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보고 그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는 글을 보았는데 이 그림 속에서 인생의 모든 버팀목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배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사람 훈련의 클라이막스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