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부 주보원고)
상처가 생기는 것은
마치 유리그릇을 싱크대 위에서 떨어뜨려 깨먹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그릇을 일부러 떨어뜨려 깨뜨리고 싶은 경우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경험하게 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었는데 실수로 그릇을 깨뜨립니다.
깨뜨리지 말자, 깨뜨리지 말자 아무리 다짐해도 가끔은 그릇을 깨뜨리고
침착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가 생기는 데에는 떨어뜨린 사람 뿐만 아니라
그릇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릇은 가끔 잊곤 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떨어뜨린 사람을 상처를 주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그릇이 쇠그릇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강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실수를 용납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좀 더 자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떨어져도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를 주지 말도록 더 조심해야 겠지만,
상처를 받지 않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겸손함으로 자신의 부족함, 상대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면
상처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불신과 맹신
불신 –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
맹신 –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막무가내로 믿는 것
불신도 참 신앙이 아니고
더 중요한 사실,
맹신도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배로 오셨다.
그 배 위에 있던 제자 베드로,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게 하소서.”
“오라!”
그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마 14:28-29)
베드로는 처응부터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꼐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더 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 일은 성공해도 스스로 내가 이루었다고 교만해지므로 결국은 실패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이므로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긴다면
그 일이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해야하는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모두 떠넘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열심히 행하고 난 결과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꼐 맡길 때
그 일의 노력의 책임은 나이지만
그 일의 결과의 책임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2000년쯤? 학교에서 소그룹모임 발표용
십자가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나는 나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게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는 죽어있었다. 내 영은 이미 사망의 상태였고 구원의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속량하셨다. 나는 죄의 법 아래서 죄와 율법의 종이었지만 예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자유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나의 죄가 더 이상 나를 하나님에게서 가로막지 못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많은 장애물들이 그의 십자가 아래서 다 제거되었다. 나는 죄를 지어도 담대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사단의 참소에도 이겨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다는 그 기가 막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그와 그의 독생자를 찬양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나의 마음속에 가질 수 있으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만민으로 그의 백성을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십자가위에서 증명하셨고 그리하여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할례가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일이 그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고 그의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평화를 전하였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를 머리로 통일된 것이다. 그 놀라운 경륜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예수의 십자가는 나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한다. 나의 죄로 인해 그 분께서 못박히셨다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깨달을 때 참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죄로 인해 못박히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로 그의 십자가는 나에게 겸손과 섬김을 요구한다. 내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그의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위함이었으며 그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 그 자체였다. 자기의 형체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한 그의 삶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며 다른 누구의 삶보다도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만하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나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할 만한 이가 있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신 것이다. 그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하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온몸과 발끝까지 씻기신 그 분을 볼 때에 나도 다른 이를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빚진 자의 비유는 내가 진 빚을 천부께서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게 조금 빌려준 것을 갚으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위에 죽이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심과 같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한다는 말이 아닌가.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기도를 가르쳐 주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참으로 그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끝임 없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과 사랑
2000년 (대학부 주보에)
학교에서 IVF 를 그만둔지 한 학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교회일과의 겹치는 사정으로 남들 다 하는 그런 ivf의 과정을 거치지는 못했다. 리더가 되기위한 LTC를 수료하지 못하고 3학년이 되었고, 화요일날 매주 모이는 예배도 학교수업, 교회모임으로 거의 못나가게 되니 나로서는 IVF 안에 소속해 있다는 것은 여간 어정쩡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감히 정리했을 뿐더러, 아예 얼굴도 비치지 말자,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그만둔 것이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며 여간 찝찝한 생각들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생각들의 이유가 무언지 몰랐는데, 이제는 생각들이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실망하였던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바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환아 이번학기는 소그룹모임 할 수 있겠어? ivf 그만하는 거니? 학번 모임 하는데 한번 나와라.’ 이런 말 한번 듣고 싶었던 문제였을까? 물론 그렇다. 단지 내가 IVF를 나가지 않은 이유로 나는 IVF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재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에 실망하였고, 그나마 IVF에서 나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기대를 묵살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IVF에게만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IVF 안에 있었을 당시의 사람들의 나에 대한 관심들은 ‘IVF안에 있는 나’에 대한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건부 관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IVF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IVF 안에 있는 너’에 대한 것이다.’ 그들과 나와의 가졌던 교제들은 ‘IVF’와 ‘IVF에 소속한 자로서의 나’와의 교제였지, ‘그들 자신’과 인간’김진환’과의 교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불행한 사실은 내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누군가의 존재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나?
당장 내가 떠나버린 IVF 사람들에 가졌던 관심들도 사라져버린 것은 나 자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이런 점에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고 느낀 것이다.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이런 조건부 관심과 사랑으로만 엮어져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때로 인간 사이의 관심과 사랑의 조건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소속’과 관련지어진다. 우리 대학부 안에서라면 ‘네가 대학부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 ‘네가 나의 순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가족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의 가족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그러나 ‘소속’하고만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면 문제의 깊이를 너무 얕게 본 것이다.
‘성격, 학벌, 재산, 외모’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 사랑, 관심에 우리는 진저리를 친다.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한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같은 종류의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대제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어느정도 ‘조건없는 사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속’과 관련된 사랑도 -안타까운 결론이지만- 본질상 같은 ‘조건부 사랑’이다.
어디까지의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이 이런 ‘조건’에 얽매이고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모든 조건에서 벗어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인간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일까?
성경의 해답은 간단하지만 또한 정답이다.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한번 여쭈어보라.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느리라.’
이런 노래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잊어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가 있다면 사랑 그 자체가 이유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슴 사무치게 깨달을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가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사랑의 문제가 어디까지 ‘조건’으로 얽매여 있는지 통찰력있게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얼마나 관심있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변함없고 끝없는 애정과 관심은 사람들 누구나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하는 것이다. 사랑없는 이 세대에 우리도 공동체 내부지향적인 소속조건의 사랑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세상가운데 빛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조건없고 변함없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자기 순원, 양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누가 나의 순원이고 양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기나 계기가 되어야 할 뿐 그 사랑과 관심이 ‘순원으로서의 누구’, ‘양으로서의 누구’에게 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에서부터 사람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절실하게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