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맹신

불신 –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

맹신 –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막무가내로 믿는 것

불신도 참 신앙이 아니고
더 중요한 사실,

맹신도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배로 오셨다.
그 배 위에 있던 제자 베드로,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게 하소서.”

“오라!”

그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마 14:28-29)

베드로는 처응부터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꼐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더 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 일은 성공해도 스스로 내가 이루었다고 교만해지므로 결국은 실패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이므로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긴다면
그 일이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해야하는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모두 떠넘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열심히 행하고 난 결과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꼐 맡길 때
그 일의 노력의 책임은 나이지만
그 일의 결과의 책임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2000년쯤? 학교에서 소그룹모임 발표용

십자가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나는 나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게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는 죽어있었다. 내 영은 이미 사망의 상태였고 구원의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속량하셨다. 나는 죄의 법 아래서 죄와 율법의 종이었지만 예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자유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나의 죄가 더 이상 나를 하나님에게서 가로막지 못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많은 장애물들이 그의 십자가 아래서 다 제거되었다. 나는 죄를 지어도 담대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사단의 참소에도 이겨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다는 그 기가 막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그와 그의 독생자를 찬양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나의 마음속에 가질 수 있으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만민으로 그의 백성을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십자가위에서 증명하셨고 그리하여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할례가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일이 그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고 그의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평화를 전하였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를 머리로 통일된 것이다. 그 놀라운 경륜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예수의 십자가는 나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한다. 나의 죄로 인해 그 분께서 못박히셨다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깨달을 때 참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죄로 인해 못박히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로 그의 십자가는 나에게 겸손과 섬김을 요구한다. 내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그의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위함이었으며 그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 그 자체였다. 자기의 형체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한 그의 삶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며 다른 누구의 삶보다도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만하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나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할 만한 이가 있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신 것이다. 그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하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온몸과 발끝까지 씻기신 그 분을 볼 때에 나도 다른 이를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빚진 자의 비유는 내가 진 빚을 천부께서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게 조금 빌려준 것을 갚으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위에 죽이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심과 같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한다는 말이 아닌가.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기도를 가르쳐 주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참으로 그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끝임 없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과 사랑

2000년 (대학부 주보에)

학교에서 IVF 를 그만둔지 한 학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교회일과의 겹치는 사정으로 남들 다 하는 그런 ivf의 과정을 거치지는 못했다. 리더가 되기위한 LTC를 수료하지 못하고 3학년이 되었고, 화요일날 매주 모이는 예배도 학교수업, 교회모임으로 거의 못나가게 되니 나로서는 IVF 안에 소속해 있다는 것은 여간 어정쩡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감히 정리했을 뿐더러, 아예 얼굴도 비치지 말자,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그만둔 것이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며 여간 찝찝한 생각들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생각들의 이유가 무언지 몰랐는데, 이제는 생각들이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실망하였던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바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환아 이번학기는 소그룹모임 할 수 있겠어? ivf 그만하는 거니? 학번 모임 하는데 한번 나와라.’ 이런 말 한번 듣고 싶었던 문제였을까? 물론 그렇다. 단지 내가 IVF를 나가지 않은 이유로 나는 IVF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재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에 실망하였고, 그나마 IVF에서 나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기대를 묵살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IVF에게만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IVF 안에 있었을 당시의 사람들의 나에 대한 관심들은 ‘IVF안에 있는 나’에 대한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건부 관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IVF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IVF 안에 있는 너’에 대한 것이다.’ 그들과 나와의 가졌던 교제들은 ‘IVF’와 ‘IVF에 소속한 자로서의 나’와의 교제였지, ‘그들 자신’과 인간’김진환’과의 교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불행한 사실은 내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누군가의 존재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나?
당장 내가 떠나버린 IVF 사람들에 가졌던 관심들도 사라져버린 것은 나 자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이런 점에서 총체적으로 실망하였다고 느낀 것이다.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이런 조건부 관심과 사랑으로만 엮어져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때로 인간 사이의 관심과 사랑의 조건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소속’과 관련지어진다. 우리 대학부 안에서라면 ‘네가 대학부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 ‘네가 나의 순원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가족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의 가족으로서의 누구이기 때문에’라든지. 그러나 ‘소속’하고만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면 문제의 깊이를 너무 얕게 본 것이다.

‘성격, 학벌, 재산, 외모’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 사랑, 관심에 우리는 진저리를 친다.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한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같은 종류의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대제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소속’과 관련된 사랑이 어느정도 ‘조건없는 사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속’과 관련된 사랑도 -안타까운 결론이지만- 본질상 같은 ‘조건부 사랑’이다.

어디까지의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이 이런 ‘조건’에 얽매이고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모든 조건에서 벗어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인간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일까?

성경의 해답은 간단하지만 또한 정답이다.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한번 여쭈어보라.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느리라.’

이런 노래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나는 너를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잊어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가 있다면 사랑 그 자체가 이유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슴 사무치게 깨달을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가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사랑의 문제가 어디까지 ‘조건’으로 얽매여 있는지 통찰력있게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얼마나 관심있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변함없고 끝없는 애정과 관심은 사람들 누구나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하는 것이다. 사랑없는 이 세대에 우리도 공동체 내부지향적인 소속조건의 사랑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세상가운데 빛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조건없고 변함없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자기 순원, 양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누가 나의 순원이고 양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기나 계기가 되어야 할 뿐 그 사랑과 관심이 ‘순원으로서의 누구’, ‘양으로서의 누구’에게 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에서부터 사람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절실하게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참된 기쁨의 회복

가끔 사람들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 라고 물어보면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살아’ 이런 대답보다는, 오히려 근심하는 표정으로 ‘별로야, 잘 못지내.’ 다른 말로 ‘영적으로 침체되는 거 같아’,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지내’. ‘죄만 짓고 살아.’ 이런 어두운 말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교회에서나 어디에서 말씀들을 접하면 주로 죄에 대해서 다루고, 회개하고, 결단해야하고, 새로워져야하는 이런 말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기쁨과 은혜의 말씀이 회복되어져야함을 느낍니다.

 우리 안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당연한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기쁨들과 평안들은 충분히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한번 안타까움을 느낄 때, 오히려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 열 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언제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참으심, 그리고 자백하고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세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새 언약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세지가 강조되어 선포되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민감해 졌을 때,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살아갈 때는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기뻐하게 되는 것은 분명 우리가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진정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행위로 인해 자신이 극한 죄인이라고 느끼든, 자신을 의롭게 느끼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로 인해 심한 고통 가운데 있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어려울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때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의 문제지 죄를 짓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무죄함을 느껴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 진다면 우리는 오히려 교만한 죄,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요일 1:10)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언제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주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네 죄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아직도 그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느냐?’ 이런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은 죄를 꾸짖어 죄책감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죄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그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습니까? 우리가 지어야할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죄인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죄에 민감하라, 범사에 반성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살전 5:16,18)

 우리는 죄를 조금 짓는 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 사람입니다.(엡 3:1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우리들은 죄가 많을수록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함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홈 5:1) 참으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내세울 수 있는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기에,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할 때에 죄책감에 앞서 한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기쁨이 먼저 밑바탕에 깔린 후에 죄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언제나 큰 기쁨 안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회개가 아니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갈 5:22) 비록 자신 안에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그 은혜와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본향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며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기뻐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참된 기쁨의 회복(2)


 지난번 참된 기쁨의 회복이라는 글을 통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관계없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서는 과연 참된 기쁨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참된 기쁨이라는 말을 쓴 것은 사실 특별한 의미 없이 쓴 표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 쓴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인한 기쁨 중에는 거짓된 기쁨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된 기쁨이란 바로 죄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기쁨이지요. 예레미야 3장 말씀은 이러한 거짓된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두 눈을 뜨고, 저 벌거숭이 언덕들을 바라보아라. 네가 음행을 하여서 더럽히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느냐? 사막에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물건을 터는 유목민처럼 너는 길거리마다 앉아서 남자들을 기다렸다. 너는 이렇게 네 음행과 악행으로 이 땅을 더럽혀 놓았다. 그러므로 이른 비가 오지 않고, 늦은 비도 내리지 않는데, 너는 창녀처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지금 너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또 일찍부터 네 친구가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렘 3:2-5, 표준새번역)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사람이 얼마나 쉽게 범죄할 수 있는지 그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노를 한없이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은혜의 깨달음은 있지만 그것이 죄를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행하고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인식은 그것으로 인해 기쁨은 생기지만 그 기쁨이 죄를 당연시 여기게 되는데서 나온 기쁨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거짓된 기쁨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의 차이는 위와 같이 죄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은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기쁨과 참된 기쁨의 삶을 구분짓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은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의 무게는 무거운 그대로 놓아두고 그 무게에 상응하는 만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는 우리가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무겁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들을 아무 죄의 대가 없이 없애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는 죄는 그대로 두고 그 죄에 대가가 치러지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자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마치 지렛대 한쪽에 다른 쪽의 무게만큼 올려놓아 평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지렛대 다른 쪽에 있는 물건을 치워버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치 지렛대의 반대쪽에 있는 물체의 무게를 더는 것과 같아서 그와 비례하여 은혜의 무게도, 그 깊이도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가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깨닫고 있는가 하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해서 은혜가 깊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비유를 살펴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39-43)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은 비유를 들어 많이 죄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죄를 많이 지은 자가 더 죄를 많이 사함 받기 때문에 더 은혜를 많이 누리게 된다는 말씀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의 시몬과 여인을 비교해봅시다. 누가 더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요 8:3-9)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그녀를 붙잡아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 중에 누가 더 큰 죄인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 하셨습니다. 다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누가 더 죄인이고 누가 덜 죄인이라고 할 것 없이 다 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에수님께서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시면서 자기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을 때 (막 2:17)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만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의 죄를 바로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세리와 창기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단지 자신의 병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과 자신의 병을 바로 알았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우리는 위와 같이 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죄를 지은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은 정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를 많이 지은 것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 로마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얼핏보면 율법이 마치 죄를 더 짓게 하였기 때문에 은혜가 더 넘쳤다는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은 죄를 더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유럽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따라서 위의 말씀은 죄를 더 많이 깨닫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은 바로 죄를 깊이 깨닫는데서 나오는 기쁨이 되어야하고, 오히려 죄가 은혜 앞에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 그 은혜는 거짓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두 기쁨은 모두 은혜를 깨닫는 것에서 나오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된 기쁨은 자신의 죄가 대수롭지 않아진 것이라 생각할 때 생겨나지만, 참된 기쁨은 자신의 죄가 극악한 것이라 생각할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은 은혜로 인해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점에서도 같고, 은혜로 인해 기뻐한다는 점에서도 같지만, 거짓된 기쁨은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참된 기쁨은 죄를 더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다다르기 힘든 균형점입니다.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은혜를 누려야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죄에 대한 민감함을 또한 가지고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런 놀라운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이것은 저에게 퍽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어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 같으면 ‘내가 은혜를 바로 누리지 못하는 자는 아닌가?’ 하는 이런 의구심이 들고, 반대로 어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 주저없이 나아가 죄를 대수롭지 않게 고백하고 은혜로 인해 감사하고만 있으면 ‘내가 은혜만 가지고 저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대의 의구심이 항상 들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얼마나 죄로 애통해야하고, 얼마나 죄에 대해 자유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를 저는 그 죄의식의 크기를 설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얼마전에 길을 가며 ‘아! 이것을 죄의식의 크기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 맞추어 나눠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과 같이 저는 죄에 대한 민감함과 은혜로 인한 자유함의 경계를 상황에 맞추어 나눠보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참된 기쁨과 거짓된 기쁨 그리고 은혜 없는 죄의식, 이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하고 비교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은혜로 인한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며, 은혜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도 않을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제가 깨닫게 된 바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죄의식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첫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의 죄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글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우리는 민감할 때나 민감하지 못할 때나 항상 죄인이며, 심한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리는 것은 반대로 심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는 스스로 의롭게 여긴다는 것과 다름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느냐를 가지고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은혜 안에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거짓된 기쁨 안에 살고 있는지 구분지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죄에 대한 민감함이 아니라 은혜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회개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심한 고통 가운데 죄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회개하는 것은 과연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동일까요? 죄에 대해 민감하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연히 그런 식으로 반응하며, 은혜 안에 살면서 거짓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그렇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회개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고 죄의식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죄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은혜를 깨닫는 깊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깨닫는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는 우리가 아무리 죄책감 가운데서 회개한들 그것이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어떤 태도로 죄를 짓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은혜없이 죄에 대한 민감함으로만 사는 사람은 심한 죄책감 속에서 죄를 지을 것이며, 반대로 거짓된 기쁨 가운데 사는 사람은 죄를 아무 생각없이 은혜만 기대하고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죄를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은혜를 강조하여 ‘너무 죄책감에 시달리면 안된다. 죄를 지어도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된다면 은혜를 왜곡하고 경멸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우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은혜 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또 한번 강조하지만 은혜는 자신의 짓는 죄를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엄청난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보다 더한 양의 기쁨이 함께 쏟아져 내리는 듯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중에 이러한 은혜만 믿고 죄책감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기쁨 안에 사는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은혜를 생각하여 아무렇지 않게 짓게 되고 하나님께서 또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생각처럼 사악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으며 아무 가책을 느끼지 못할 때 이런 생각이 그의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연중에 내면에 감추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서 과연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극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옳다면 그 참된 기쁨을 사는 사람이 은혜 없이 사는 사람과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처음 글에서 이야기한 바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쁨 안에 산다는 것은 자신이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할 때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다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요.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 이후에 즉시로 주어지는 기쁨은 가히 물이 가득히 찬 댐의 한곳이 갑자기 터져 거대한 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나오는 그런 느낌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자신 없이 살 수 밖에 없지만 참된 기쁨 안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기에 언제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롬 8:15)

 이제 여기서 위에서 내린 결론들을 토대로 한 다음 표를 보면서 진정한 기쁨 안에 살아가는 삶이 어떤 살인지 결론을 내려봅시다.


 



































 


은혜 없는 삶


은혜 안의 삶


참된 기쁨을 가진 삶


거짓된 기쁨의 삶


정의


죄에 대한 민감함은 있으나 은혜로 인한 기쁨은 누리지 못하는 삶


죄에 대한 민감함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은혜에 대한 기쁨 또한 누리는 균형잡힌 삶


은혜에 대한 기쁨은 있으나 죄로 인한 민감함은 누리지 못하는 삶.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도 은혜로 인한 기쁨을 느끼는가?


X


O


O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X


O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O


X


생활을 하며 죄를 짓게 될 때 죄의식을 느끼는가?


O


O


X


 


 참된 기쁨의 삶은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한 때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의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로 말미암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는 생활을 누린다는 점,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죄된 모습 그대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같다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은혜 없는 삶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글을 통해 살펴본 바로 참된 기쁨의 삶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할 때 죄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점,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죄를 지을 때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게 된다는 점에서 거짓된 기쁨의 삶과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정한 죄의식과 진정한 은혜를 동시에 소지하는 칼날같은 균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은혜를 무시하고 죄의식을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 값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반대로 우리가 죄의식을 무시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없이 방종한 삶을 살게 되고 우리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죄를 지을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져야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 자신이 의롭게 살았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인한 진정한 기쁨, 그 놀라운 생활은 우리의 죄를 그대로 짓는 방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