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울다 웃다 흘러간 하루였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수성을 소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이 땅의 2009년 5월을 살아가는 30세 중에 그녀처럼 생에 대한 집착 또는 진지한 시선, 때로는 날카로운 물음들로 고뇌하는 영혼들이 있을까. 나는 여성이 아니지만, 여성으로써 산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아이를 가졌을 때의 그 불안심리와 자신의 한 분신과 같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신비감, 황홀감, 뜨거운 모성, 이런 것들이 어렴풋하게나마 가슴 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소통의 즐거움을 느꼈다.
나의 밑줄들을 조금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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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해후나 순수한 공감의 순간을 서로 가질 수 있는 사람끼리는 결코 결혼할 수 없고, 결혼의 전제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린저가 말하려고 한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행복은 우리가 언제나 생기를 지니는 데에, 언제나 마치 광인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듯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있는 것 같애. 잘 생각해 보면 몹시 불행할 때도 한편으로는 매우 행복했던 것 같애. 고통의 한복판에 아무리 심한 고통도 와 닿지 않은 무풍 지대가 있어. 그리고 그곳에는 일종의 기쁨이, 아니 승리에 넘친 긍정이 도사리고 있어.’

‘만 2개월이 되었다. 정화는 자고 마시고 먹고 웃고 놀고 또 잔다. 이렇게 아무 죄도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도 모두 어렸을 때는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의 문지방에서 작은 선녀처럼 꿈꾸며 살았었을까?’

‘지금 정화는 흰 셔츠와 분홍 팬티를 입고 분홍 구두를 신고 흰 모자를 쓰고 나비같이 천사같이 놀고 있다.
긴 속눈썹, 솜털이 부드러운 뺨, 연분홍 입술, 볼 우물, 흰 이빨, 조그만 다리, 너무 기어 다녀서 검게 더러워진 동그란 무릅팍, 웃는 목소리, 얕은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나이다.
아직 지상의 아이가 아니고 요정이나 님프 같은 티 없는 모습이다. 아무에게도 반발을 안 일으키는, 매력 있는, 질투심을 안 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누구나의 것이고 지상의 모든 것에 즐거움을 주기 위해 있는 나이다. 그러나 정화는 나의 것이다. 나의 천사인 것이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뭏든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1964.4.1

‘너는 좋은 소질을 가진 인간이니까 그것을 키워서 꽃 피워줘.
지상 목표를 인식(선과 미)에 두고 매일의 생활을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고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 과정에 충실한 넘친 생을 누려줘.
자아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끊지 말고 자기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아끼되, 자기의 추나 악을 바라보는 지성의 눈동자도 눈감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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