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의미에 대하여

산적해있는 생각들을 정리하여 메모함
아래 내용은 생각의 흐름일 뿐 순서상의 논리적 연관성이 없음
 
1. 반복되는 일상은 권태를 낳는다.
권태란 행위의 무의미성이 갑작스럽게 거대하게 느껴지는
심리적 현상이다.
 
2. 그러나 의미란 객관적인 것이 아닌 주관적인 것으로
의미는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를 객관에서 찾으려고 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3. 넓은 의에서 쾌감이라는 것은 의미가 부여되지 않을 때도 지속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쾌감은,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닌
행위와 존재 자체가 주는 원초적 쾌감이다.
 
4. 사회적 관계속에서 느끼는 쾌감도 의미부여와 관여되지 않고
단순히 다른 사람과 소통함으로 인하여 지속된다.
 
5. 그러나 어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에 접하였을 때, 불쾌감을 느끼고, 그것이 반복되면 권태
로 이어진다.
 
6.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책을 읽는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앎에 대한 욕구충족에서 오는데 그것은 먹은 행위에서
느끼는 쾌감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쾌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차원
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7. 그러나 어떤 쾌감을 느끼면 인간은 그러한 쾌감을
공유하려는 목적에서 소통을 하게 된다. 다음의 사실이 중요한데
쾌감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쾌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통이 결여된 쾌감이
존재가능하다.
 
8. 삶은 무의미성으로 가득차 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현실이 없어도 삶은 무의미한지 모른다.
그러나 의미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의미라는 것이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미라는 말의 의미는 결코 정의불가능한 것이다.
현상 A의 의미는 현상 A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자가 스스로 있다고 여기는 즉,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 아무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 A가 주는 의미성은 내가 그 행위에
어떤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삶에 어떤 의미부여를 할 것인가
혹은 무의미하다고 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기독교적 답변을 택할 것이다
나는 최대 행복의 가치를 찾겠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므로,
나는 행복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다고 하겠다.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부여된다.
그러므로 삶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숭고한 의미를
가진다고 해야만 옳다.
 
나의 고민은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나는 나의 장래와 연관되어 있다.
또 하나는 나의 교회생활과 연관되어 있다.
또 하나는 단순한 철학적인 고민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것, 권태에 대한 일반론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관조적, 사변적인 내용이다.


즉, 내가 권태를 느낀다기보다는 타인이 느끼는 권태를
느껴보고 싶어 스스로에게 강제성을 가지고 내면화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나는 나의 내면의 이 여러 고민들이 어떤 한가지 주제로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혹은 어떤 원인에서 기인한 것일까하는 문제로 오래 씨름해왔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는 권태나 우울감을 결코 느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여러 문제가 동시적으로 다가왔을 뿐
그것이 상호 연관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결론 지으면서
어느정도 엉킨 실타래를 정리하기 쉽게 되었다.
 
나는 그 중 의미에 관한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나중을 위해
지금까지의 고민이 얻어낸 중요한 결론을 다시 정리하겠다.

1. 의미는 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

2. 사고를 언어로 표현할 때 언어가 사고를 왜곡하는 이유는
사고가 비언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의 사고를 몇개의 언어로 압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

3. 인간의 쾌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으며
소통이 주는 쾌감은 또한 별개라는 점.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너무나 많은 질문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magnify 하기 위해 의미있는 일이야’ 하고 말하자.

200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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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이 문제를 아주 오랜기간 약 3달이상을 탐구해왔다.
마치 데카르트가 회의를 거듭하듯이 나는 의미를 묻는 질문을 계속해왔다.
예를 들면, 내가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이라면 사랑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랑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즐거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즐거움도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것이라면 시간의 흐름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업적을 남긴다는 것,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의미있는 행위라면 그것이 왜
의미있는 행위가 되는가?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내가 평생 식물인간이 되어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의 탐구가 계속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하나의 착각 아닐까
사람들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 아닐까?
거지가 구걸하는 삶을 살면서 오늘 하루 좀더 많이 돈을 받아 의미있는 하루였다라고 생각하듯이
사람들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일상에 세뇌하듯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의미라는 말은 도대체 뭘까
나는 어떤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죽음 없는 삶이 계속된다면 그 삶은 의미있는 것일까?
그러한 질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행위의 의미는 행위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스스로가 그 행위에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관점을 180도 선회한 것이다. 나는 의미와 무의미가 행위 자체의 본질에서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로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의미’라는 것은 다른 것으로 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내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끊없는 회의는 무의미를 가져온다. 무의미는 의미부여를 포기하기 때문에 얻게되는 결론일 뿐이다.
세계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의미부여를 포기했을 뿐이다.
세상은, 어떤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도 않고, 의미가 없지도 않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자아를 떠난 객관의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언제나 주관적이며 본인 스스로 부여하는대로 갖게되는 속성인 것이다.
내가 의미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행위는 의미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위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해야 옳다

나는 고등학생 때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가?’ 하는 것으로 오랜 기간 고민한 적이 있다.
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지금처럼 사고를 전환하여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 때 내가 얻은 답은 이런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기적이다’라는 표현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절대 윤리적으로
나쁜 단어가 아니다. 모든 것이 이기적이라면 ‘이타적인 이기심’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 ‘이기적인 이기심’도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행위의 무의미성에서 같은 사고의 전환을 발견했다.
나는 그러한 사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삶은(혹은 행위는) 무의미하지 않다, 삶은 의미중립적이다.
그것은 의미있지도,  의미없지도 않다.
단순히 존재자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200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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