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의미를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일까
‘의미’라는 말의 ‘의미’가 명료해지기 이전에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의미’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축구장에서 골을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축구선수들을 떠올린다
누군가 한 시즌에서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는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앞질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생의 의미를 일부 빼앗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 즉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는 정량의 자원이며
인생을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인가..
왜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결국 어떤 만족감 같은 것을 누리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을 얻는 순간 삶은 또다시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것인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게임인 축구 골대에 공을 여러 번 차 넣은 행위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왜 그것을 위해서 수많은 땀을 흘리는 것이지?
그래 그 행위는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다른 사람들은 선수들에게 대가를 지불한다.
하지만 저런 비생산적 게임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 즐거움이라는 것을 추구하나.. 생산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 생산적이라고 할만한 행위가 있는 것일까?
평균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특별한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까
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을까 이러한 것들을 탐구하려는 심리는 무엇일까
영원성에 대한 갈구일까? 영원하다는 것은 더 가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서만 존재한다면 어떤 행위도 의미없는 것이 될까?
세계에 나 혼자라면 어떠한 주제로 책을 쓰는 것이 의미있을까?

평생 지금 이 방 안에 갖혀 살아야 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이 방 안에 갖히지 않았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둘의 답이 같을 수 있을까?
둘의 답이 다르다면 둘의 차이는 뭘까?

의미라는 것은 인위적인 창작물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부조리한 행위가 아닐까
한계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의미부여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나는 굳이 그것을 할 이유는 없다…
왜 나는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
내 몸에는 새로운 것과 옛 것이 계속적으로 교환되는데 어떻게 연속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러한 고민이 사라질까… 사랑은 무의미한 일상을 잊게 해주는 꿈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잊고 살고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잊어버린다는 것은 도피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며 답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까뮈가 떠올려보라고 한 행복한 시지프는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두가지 진리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미각은 자체로 즐겁다는 것, 먹는 것은 고민할 이유를 잊게 해준다. 원초적인 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또 하나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 생명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에서 나는 진리에 가까운 것을 발견한다.
생명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세계의 질서를 느낄 때마다 나는 한계가 없는 어떤 것을 떠올린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심장은 내가 살아있노라고 더 빠르게 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참으로 부인하기 힘든 신비이다. 바하의 음악은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나는 그것에서 인간 이상을 본다.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에서 생명 이상을 본다.
그것은 신에 대한 감각이다.

나는 숨막히는 허무감 속에서 신의 흐릿한 그림자를 더듬는다.
성경을 쓴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우리가 (청동)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이후에는 밝히 보게될 날이 올 것입니다’

희미함 속에 나는 갑갑함을 느낀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한계지워져있다.
공간과 사회적 한계, 그리고 사고의 한계, 모든 것은 한계 속에 놓여있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지배를 받고 있고, 해석되지 않는 신비로움 속에 살고 있다.
한계는 부자유를 의미하며, 부자유는 권태를 낳는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논하고 있다.
미적인 것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호흡하고 있다.
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산소를 호흡하고 내 영혼은 아름다움에 내재되어 있는 신의 느낌을 호흡하고 있다.

나는 20년 뒤에 겪을 인생의 바닥의 기분을 의도적으로 미리 당겨와서 경험하고 있다.
지독한 부자유가 내가 나의 신앙적 면모를 다 할퀴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는 곳에 뿌리처럼 남아서 호흡을 지탱하고 있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을 사랑한다.
이것을 ‘비약’ 이거나 ‘도피’라고 불러도 좋다. 나도 그들을 ‘편견’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아직 모든 것은 지독한 권태 속에 있다.
생에 대한 혹은 영원에 대한 집착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권태만큼은 진정 ‘의미’있는 경험이라고 여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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