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목마른 계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십 세! 무서운 나이! 끔찍한 시간의 축적이다. 어리석음과 광년의 금자탑이다.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한의 기쁨의 절정과 괴로움의 극치를 나는 모두 맛보았다. 일순도 김나간 사이다같이 무미한 순간이라곤 없었다. 팽팽하고 터질 듯 꽉 차 있었다. 괴로움에, 기쁨에, 그리고 언제나 나는 꿈꾸고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꿈 없이는 살 수 없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현실만이 전부라면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무엇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상과 꿈이 우리는 만든다. 우리에게는 뜻밖인 형태로, 동화같이, 분홍 솜사탕 맛같이 느껴지는 유년기, 인식에 모든 것을 바쳤던 십대와 이십대, 타자(사회)와 첫 대면한 이래의 여러 가지의 괴로움, 아픔, 상처에 뒤덮인 이십대 후반기…. 지금 회상해보면 한마디로 내가 ‘어렸었다’는 느낌뿐이다. 꿈이 너무 컸었다. 요구가 너무 지나쳤었다.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우주 전체에게….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지금은 그것이 벤(G.Benn)의 서한집이다.)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을 때….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독일 민요에 ‘햇빛에 가득 찬 하루는 행복하기에 충분하다’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거창하거나 보편타당하고 인류의 귀감이 될만한 ‘엄청난 무엇’은 이미 나와는 멀어졌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괴로워하는 일, 죽는 일도 다 인생에 의해서 자비롭게 특대를 받고 있는 우선권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무엇일 것 같다. 괴로워할 시간도 자살할 자유도 없는 사람은 햇빛과 한 송이 꽃이 충족한 환희를 맛보고 살아나간다. 하루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우주에, 신에–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1964년)
전혜린, ‘긴 방황’ 중 일부..


1959년 2월 23일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동물적이고도 적나라한 공포에 불과했었다.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야기시키는 본질적 기분(우울, 권태, 공허, 자포자기 등)과 싸워야만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생(生)을,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일회적(一回的)인 생을 열망해야만 한다. 나는 이 내적 기분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밤이면 라디오에서 현대음악을 들었다. 불협화음의 기이한 금속성의 톤– 그것은 나에게 삶과 죽음데 대한 공포를 말해준다. 전율할 만큼 쫓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를… 그런 음악을 듣는 것은 불안했으나, 잘 이해되었다.


2006.12.02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12월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던날 나는 사당역에 새로생긴 책가게에 들렀다. 32세의 나이에 자살을 택했던 젊은 천재작가 전혜린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어머니보다 먼저 태어났던, 오래전 한 여인이 20대에 남긴 글은 마치 어제 써내려간 일기처럼 마치 지금 살아있어서 어딘가 나와 비슷한 나이로 숨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일으켜 그녀의 연보를 여러번 반복해서 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가 태어나기 14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24-30세의 그녀가 썼던 글은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속에서 그녀는 숨쉬고 있다. 친구처럼.. 나처럼 고독하고, 또 생에 집착하고, 사랑에 집착하는 그녀의 심상은 내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대화하고 싶다. 그녀와 소통하고 싶다.
‘놀이 새빨갛게 나틑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1학년 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이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40년이 흐른
서기 2006년에 이런 감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선가 한반도 남쪽 어디엔가
나처럼 숨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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