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보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뻐하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실천하지 않는 다짐은 다짐이 아니다
고치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헌신하지 않는 제자는 제자가 아니다
전도서 6장
사람이 비록 장수하여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여도 인생의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슬기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같이 밥을 얻어 먹으려고 평생토록 애쓰지만 만족을 얻은 적은 한번도 없는 것같이 보인다.
인생의 우여곡절은 어느쪽에나 다 있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슬기롭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좋은 인생을 누린다.
그림자처럼 덧없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살아가는 길인 줄을 누가 과연 알 수 있겠는가 ?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일을 누가 과연 일러줄 수 있겠는가 ?
전도서 6장 6절과 12절 말씀…
아멘..
살만한 세상인가
예전에 보았던 연극중에 이런 제목을 가진 게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세상은
살만한가?
즐거운가.
삶이란…
어떨 때는 너무나 인생이란게
무의미해 보이고
때론 고통의 연속으로 느껴지고,
삶이란 것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찾고자 하지만
시야가 아주 자욱해져버리는 걸 느끼기도 하게 된다
마치 시지프가 끝없이 돌을 굴리는 것 처럼.
죄라는 것이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삶은 어렵다.
끝없는 죄와의 싸움.
그 속에서 겪는 좌절.
누구나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삶이 한번 뿐이라는 것은
언제나 긴장을 느끼게 한다.
선택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것.
흘러간 세월은 붙잡을 수 없는 것.
초조함, 당황스러움, 조급함, 후회,
가끔씩 느끼는 절박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던 사람들도
때론 이러한 현실과 감정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사람들 간에 간혹 느끼는 조그만 관심
사랑.
사랑의 감정이 느껴질 때면
인간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발견마저도 배반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진정
세상은
살만한 것일까.
그저
묵묵히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때론 자신에게 실망해가며
때론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며
때론 사랑의 배신감도 느끼고
외로움, 고독감을 씹으며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고
그분이 주시는 영원에 대한 감정과 위로를 체험해가며
사는 것일까.
무언가
다른 삶을
영위할 가능성도 있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당연한 것이라면
체념하고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자꾸 집착하게 되는 것 무슨 까닭인지.
바울은 그랬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자기는 더 좋다고.
내가 전도한 한 할머니도 그랬다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성 어거스틴도 그랬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그랬다.
죽음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죽음을 황홀하게 맞을 수 있을까.
빌립보서 1장
빌립보서 1장에서
과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2-18)
여기서 질문은 이것이다.
1.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은 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옥생활에 괴로움을 더해줄 것으로 생각했을까?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해석한다.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속좁은 인간이어서 감옥안에서 그들을 질투하게 만들려고 그들은 그런 동기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상황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적절한 해설을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현대어 성경이 해석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 최선인듯 하다.
2. 이것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행동에 대해서 어느정도로 정당화 해주는가?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한다고 했다.
이 구절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바른 행위에 대해서 얼마나 뒷받침해주는가?
두 부류의 사람의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하나는 바울을 사랑해서이고, 하나는 바울이 시기하게 만들기 위해서 였다.
성경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언급하는 구절이 별로 없다. 한 가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너희 의를 행치 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한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는 주어질 상이 없다.
이것은 어떤 선한 일을 했는데 의도치 않게 다른사람에게 드러나버린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인 의도로 드러나는 것,즉 드러날 것이 예상되는 행위(금식하고 인상을 쓴다던지)는 해당된다.
바울의 입장은 관대하다. 그들에 대해서 복음이 전해진 결과를 기뻐한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전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옥에 매여 있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 전파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기쁘다.
따라서 이들의 행위는 예수님꼐서 말씀하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동기와는 또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옳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묘사를 보면 긍정적인 묘사는 아니다.
투기와 분쟁(경쟁심)으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부정적인 시각이다.
바울이 옥에 매여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겉으로 보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바울과 경쟁하려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박차를 가했을 수 있다.
그들의 동기는 불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듯하다.
3. 이것이 선교단체들이나 교파간 혹은 교회간의 경쟁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
‘어느 정도의 경쟁심’은 비록 불순하기는 하지만,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쟁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이 ‘상대에 대한 비방’이나, ‘남 잘되는 것을 못본다던지’, ‘자기가 드러나기만을 바라는 경쟁’이라면 그것은 분명 크게 잘못된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증거하는 힘을 지녀야 한다. (요 17장) 이 연합 안에서의 어느정도의 경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선한 경쟁이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4. 바울에 반응에 대해 배울 점
바울은 이로서 자신은 기뻐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의 넓은 도량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오히려 그들의 복음 전파에 대해 비방하고 불순하다고 그런짓 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도 마찬가지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의 복음 전파의 일을 존중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불순한 동기로 복음 전한 자들의 의도 (바울로 시기나서 괴롭게해주려는 것)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바울은 내가 전하든 다른 사람이 전하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할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녔다. 그런 점은 바울을 괴롭게하려했던 자들의 자세과 분명히 대조적이다.
결론
1.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느 정도의 경쟁심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2. 경쟁심이 발전하여, 상대에 대한 비방, 질투, 자신을 드러냄, 연합의 깨어짐으로 발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3. 선교단체간의 경쟁은 선한 결과가 드러날 때 허용 된다. 그러나 자신의 단체에 대한 우월심, 상대단체에 대한 비방과 소모적인 싸움으로 교회의 연합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그러려면 바울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the Forer effect (a.k.a. the P.T. Barnum effect and subjective validation)
the Forer effect (a.k.a. the P.T. Barnum effect and subjective validation)
포러 효과(P.T. 바넘 효과, 주관적인 평가)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뭔가를 갖고 있다.” — P.T.바넘
포러효과 혹은 바넘효과라는 것은 또한 주관적인 평가 혹은 개인적인 평가라고 한다. (“바넘 효과”라는 것은, 서커스에서 교묘한 심리 조작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으로 된 P.T.바넘에 대해서, 심리학자 폴 밀이 붙였던 이름인 것 같다.)
심리학자 B.R.포러는, 사람들이 막연하고 일반적인 성격 묘사를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맞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 자신에게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고 자신의 성격과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평가해보라. 더 보기 “the Forer effect (a.k.a. the P.T. Barnum effect and subjective vali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