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묘미

삶의 묘미라고는 적었지만..
묘미라는 단어가 이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일까
잠시 생각한번 더 해보고

한번의 시험과 그 결과로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큼 묘한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다.

10년전에
10년후의 나의 모습은 이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년전에
10년 동안 나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다짐한 그대로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삶은 언제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그 묘미가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 때의 나.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나는 중학교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유도 없었고, 다른 목표 이런 건 없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그래서 나는 공부하는 것이 그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요즘 인간복제로 핫 이슈를 만들고 있는
라에리안 무브먼트에 빠진 기억이 난다.

그래 그 때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도 별로 없었고,
10년 후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것은,
내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관련 책을 본 뒤로
1999년에는 정말 세계가 종말할까.
그렇다면 10년후 나는 존재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 때 내가 아무리 10년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고 했었더라도
지금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군악대에 가려다 실패하고
생명공학을 전공해 대학을 졸업.
선교에 대한 꿈도 꾸고,
한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일이 없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국제 협력단에 지원하고,
어쩌다가 중등부 교사도 하고 있고,
동생을 먼저 군대에 보내고,

산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제자가 된다는 건 순종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순종한다는 것은 마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
지금까지 아무리 고기를 못잡았다고 한들
그분이 던지라고 하면 던지는 것이다.

갈바를 모르고 가는 아브라함처럼,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한번 더 던지는 베드로처럼,
지금도 순종의 그물을 던지며
하루하루 살고자 한다.

전도서에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시기와 우연이 임해서
언제나 예상한 대로 사는 것은 아니니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한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지,
저것이 잘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10년 후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바로 일주일 후의 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니.
말씀이 등불이 되어 다만 나의 앞 길을 비추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

온전한 제자 되어
스스로의 자만에 빠지지 않고
순종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주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 자는 복되니,
이는 풍랑에도 그 마음이 침몰지 아니함이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요동하지 말고,
주의 품에 평온히 쉬어라, 나의 영혼아.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마태복음 5장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갈릴리에 이르셨을 때 수많은 무리를 산에 앉혀놓고 하신 말씀이다.

오늘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1.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뒤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답은 이것이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신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식의 비유를 했다.
내 기억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기억한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개의 아들은 개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사람이 낳은 아들은 사람으로서의 character 를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only one)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character 를 지니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가 세상에
나타나심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God with us) 이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듯 추상적인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입고 행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었다.
그분을 본 사람은 없었다. 모세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나
얼굴이 아닌 등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그분의 영광을 두려워서 접근하지도
못했다. 정결하지 못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자기 죄로 인한 죽음을 의미했다.
디모데전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특이하게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 눈에 보이게 함께 생활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를 본 자는 다 하나님을 본 자들 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까?



2.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자들인가?

그럼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본 것인가?
육적으로는 그들이 다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먼지가 자욱히 끼어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사람을 보거나
또는 먼지가 낀 안경, 거울로 다른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보면
절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처럼, 마음의 청결함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나,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
일종의 편견이다.

그렇다면 그들앞에 끼어있던 먼지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의 메시아와 관련된 편견이다.
유대민족은 다른 외부의 침략과 고통으로 당시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민족적 괴로움을 겪고 있었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기름부은자, 왕으로 오실 다윗의 자손을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기름부은자(메시아)가 유대민족을 로마나 다른 외세로부터 구원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으로서 유다를 통치할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마치 성경(구약)은 그런 메시야를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처럼 보였다.

세례자 요한이 인정한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가 행하는 이적은 그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다. 요한과 달리 포도주도 마셨으며, 죄인들, 세리들을 가까이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반된 사실은 혼란을 가져왔다.
예수는 누구인가?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인가?
예수님에게 특별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왜 빨리 로마로 부터 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강력한 나라를 세우지 않는지 의아해했으나 언젠가는 그렇게 할 것으로 믿었다. (서로 큰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운 것도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그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나, 그도 잘못된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왜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과 무리는 기대감에 부풀어올랐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군중은 극도로 흥분했다.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들은 기대하던 메시아가 도래한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는 것은 로마에 대해 반군을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징조가 아닌가?

그러나 그분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탔다. 말은 전쟁의 상징이나, 나귀는 반대로 평화의 상징이다. 그분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또다시 실망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기미가 안보인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든다. 저 사람이 과연 그럴 의도가 있는 걸까.. 도저히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안든다.
군중은 화를낸다. 뭐하러 왔냐.. 십자가에 못박아라
순식간에 태도는 돌변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메시아인지 반신반의하던 어떤 이들은 그래 십자가에 달아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설마 진짜 메시아라면 거기서 죽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으나, 그가 하나님이며, 그가 하는 일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민족을 구원하고 유대인, 이방인의 벽을 허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오시기 위한 분임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예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분노하며
‘왜? 니가 메시아면 한번 자신부터 십자가에서 구원하고 뛰쳐내려와봐라..’
라고 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를 보내어 사태를 뒤집으실 수 있었지만
이사야서 말씀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욱한 안개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 마음이 청결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행악자였다.
두 행악자중 한명이 ‘니가 메시아라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좀 구원해봐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행악자가 말한다.
‘임마 너나 나나 우리가 잘못해서 십자가에 달렸지만,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좀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실로 엄청나고 놀라운 고백임에 틀림없다.
그 행악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눈치를 챘다.
그는 죄가 없었으나 십자가에 달려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온갖 병과 귀신에서 구원했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않고있다.
그의 능력과 말씀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는 날 좀 십자가에서 내려주십시오 라고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알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 나라는 존재할 것을 알았으며,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실로 찾기 힘든 믿음이며
어떤 유대인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비교해봐야한다.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그분의 측근들을 포함한 12제자와 모든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다 뿔뿔히 도망갔다.
그렇게 위대했던 사도들도 저 흉악범의 믿음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의심했으며,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설명, 성령의 증거를 통해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 결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모두 메시아가 그들을 자신들의 고통에서 구해주기를 바랐고
그런 고통을 구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화를 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했던 사람,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역들을 하고 계심을
인정할 줄 알았다.
영화 오만과 편견을 봤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때
얼마나 쉽게 편견에 빠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때 얼마나 더
많은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대하기 쉽겠는가?
그 때 자신은 하나님의 방식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야한다.

살다보면 때로 저 성경 속의 유대인들과 십자가의 흉악범들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다.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달라고,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
께 구하곤 한다.
그러나 때론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지속되며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기도도 응답되지 않으며, 모든 원하는 일들은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도를 듣는 분이 아닌가?
성경에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길이 평탄해야한다고 하지 않는가?
왜 십일조를 해도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시는가?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은 진정 무관심한가?
이런 의문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앙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생긴다.
욥도 그랬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욥이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놓지도 않았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먼지, 안개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을 제거한 자는 투명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진다.

그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비록 고통과 고난 중에 거할지라도
다윗처럼, 욥처럼,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본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전쟁과 고난과 굶주림, 고통, 미움, 악의, 손해가 찾아오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분의 일을 인정하는 자세야 말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자세이다.

루오, ‘서로 사랑하여라’


이 그림은 루오의 ‘서로 사랑하어라’ 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27년도 작품인데, 제목과 그림의 나오는 여인들이 인상깊다..
십자가의 사건을 그리면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 저녁식사 때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세족식을 하신 후에 나오는 구절이다.

(요 13장)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죽음으로 가시나이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보물

병 속에 맛있는 것들을 놓지 못해서
잡히고 마는 어리석고 또 가련한 원숭이들.

내 손에 놓을 수 없어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저히 놓지 못해서 꽉 쥐고 있는 것.

이 것을 놓으면
나, 진정 자유를 맛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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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우신 주님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포기할 수 없나이다

주님을 생각할 때 느끼는 기쁨
그것이 당신 안의 보물이옵니다

칼릴 지브란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지혜,
웃을 줄 모르는 철학,
어린이 앞에서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위대함
으로부터 나를 멀리하소서.
– 칼릴 지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