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와 므나 비유

오늘은 학교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달란트와 므나 비유를 연구했다.
이 비유 연구는 내가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비유가 정말 그런 것을 의미하는지 고민하던 그 고민을 해결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나의 진로 결정에 관련이 되는 말씀이다.

먼저 본문을 살펴본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비유이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또 므나 비유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9: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9: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9: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9: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19: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19: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19: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19: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19: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19: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내가 고민했던 질문들과 내가 얻었던 답변들이다.

1. 이 비유는 구원받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인가? 아니면 구원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두번째라고 가정해보면 여기서 엄청난 문제에 부딪힌다.
이것이 맞다면 달란트와 므나를 늘리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중요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와 전적으로 대치된다.
첫번째라고 생각한다면 비유 마지막 표현이 눈에 거슬린다.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다. 이것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구원 받은 자가 이럴 수 있을까…
두가지가 다 어려움이 있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첫번째 가정을 옳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말씀과 같이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마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처럼 과장되게 들릴 수 있는데, 그것은 구원은 얻었으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하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을 심각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주인이 왕됨을 원하지 않던 사람들.. 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고, 그들을 잡아 죽이라고 한 것과 있는 것마저 빼앗긴 것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또 이 비유에서 종들이라는 표현을 이미 믿어서 구원에 이른 그리스도의 제자들.. 에 비유할 수 있다.

2. 달란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달란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해설은 성경에 결여되어 있으나 정황적으로 어느정도 이해해볼수는 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재능’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몇가지 난제가 따른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력은 또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므나비유에서는 같은 양의 므나를 준다. 이것또한 달란트 비유와 대치되므로 이해되기 어렵다. 그리고 주는 것이 달란트로 모두 똑같다. 양만 다를 뿐이다. 만일 재능을 가지고 비유할 것이라면 사람들마다 가진 재능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종에게는 돈을 맡기고, 어떤 종에게는 밭을 맡기고, 어떤 종에게는 양떼를 맡기고 이런 식의 비유가 되었어야 한다.

두번째로 제자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렇게 보기도 어렵다. 만일 달란트가 성령의 은사라면 5달란트와 2달란트 1달란트를 준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은사들의 양이 다른지? 고린도전서 12장에는 각기 은사의 종류는 다르지만 그것이 양의 차이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들이 달란트를 가지고 달란트를 남겼으므로, 은사들을 개발시켜 더 많은 은사들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가 어렵게 된다. 만일 은사들이라고 했다면 달란트를 가지고 여러가지 선한 사업에 사용하여야 했을 것이지 달란트를 불리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들려진 이 말씀을 제자들이 달란트는 성령의 은사이다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번째로 그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의미할 수 있다. 난 이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샤이먼 키스트메이커의 해설에 의하면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려고만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의 부유성을 나누는 일은 등한시 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율법을 보존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주는 데만 급급하였다. 세번째 종의 태도는 율법에 대한 미쉬나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율법의 소유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시키는 특전으로서 율법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세번째 종의 행동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해석은 달란트의 양이 다르거나 같은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 그들에게 달란트를 준 셈이다. 그들은 이것을 묻어둘 것이 아니라 전파하여서 그 말씀이 더 풍성히 나누어지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었다.

3. 이 비유는 우리가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위의 설명에 의해 전혀 그렇지 않다.

4. 왜 5달란트(현재 돈으로 수억-수십억원에 이른다)나 되는 큰 돈을 배로 불린 것이 작은 일인가?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흔히 해석하는 것처럼 인생의 보잘것 없는 일에 충실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들어쓰시겠다는 말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인데 그 때 무슨 큰 일을 맡기신다는 것인가? 그 때는 이미 우리의 인생도 끝난 뒤이다.

그러므로 큰 것으로 맡긴다(카타스테소 – 맡기다, 임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에 주실 하나님의 상이 크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므나 비유에서 열고을 다스릴 권세를 준다는 것은 더 큰 일을 맡기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으로 해석하려면 1므나로 10므나를 남긴자에게 100므나를 맡긴다던지 해야 한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열 고을 다르실 권세를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지위, 받을 유업, 상급 등으로 이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했을까.

첫번째로 이것은 그가 받을 상급에 비해 지극히 작은 일일 수 있다. 그가 한 일에 비해서 그가 받는 상급은 대단히 크다. 5달란트로 5달란트를 남겼지만 그것은 주인의 재산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10달란트 모두를 준다. 그리고 더 많은 것으로 그에게 더해준다.

두번째로 부유한 주인의 재산에 비해볼 때 5달란트는 지극히 작은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의미할 수 있다.

5. 세번째 종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주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이유가 아닐 것이다. 종은 자신이 이익을 남겨봐야 주인이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만일 손해를 보면 자기가 변상할 것이라고 보았다. 주인은 그런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의 직접적인 책망의 이유는 아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내가 만약 그렇다고 쳐도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까지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며 호통을 쳤다. 주인의 호통의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둘째, 많은 돈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일 수 있으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했다. 이 말은 종이 주인의 재산의 증식에 대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종이 돈을 손해를 봤다고 해도 그 돈을 늘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성실함을 보였다면 주인은 그를 칭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은 종에게 네가 정말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았느냐? 라고 반문하는 데 이것은 주인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주인은 오히려 남긴 자에게 그것을 도로 빼앗아 간것이 아니라 그를 칭찬하며 그에게 그 이익을 모두 주었다. 주인은 종이 거둔 수익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라 종이 일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빼앗아 가는 분이시다. 따라서 종이 이런 주인의 마음을 읽었다면 이 돈을 잃어버리더라도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의 책망은 그의 결과보다는 그가 취했던 방식, 돈을 땅에 묻어두었던 안일함과 불성실함에 있다.

6. 만일 종이 여기저기 투자했다가 실수로 본전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위의 이유에 의해, 그래도 종이 성실하게 주인의 재산을 위해 일하고자 노력했다면 그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1. 달란트와 므나비유는 우리가 타고난 재능대로 살아가야 할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달란트는 타고난 재능을 의미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우리는 재능대로 살지 못하면 책망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비유 또한 전혀 아니다.

3. 달란트와 므나비유의 관점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묵묵히 가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데 자신을 드려야 함을 가르친다.

4.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노력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 주어짐을 가르친다.

5.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불시에 이루어짐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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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의 해석 연구는 나에게 커다란 확신을 주었다.
나는 이전과 같이 선교와 내 재능과 관련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만 아직도 지혜롭게 내가 어떤 식으로 사역할 것인지는 고민할 이유는 남아있으나, 만일 실패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실히 일하셨는지에 관심을 두고 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역인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존 페이튼 전기 중에서

“딕슨 씨, 당신은 이제 나이를 먹었으며 당신의 전망도 곧 무덤에 묻혀 벌레 먹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고백하건대, 내가 주 예수를 섬기고 그 분이 존귀히 되게 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할 수만 있다면, 식인종에게 먹히든 벌레에게 먹히든 상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날에 나의 부활한 몸은 당신의 부활한 몸처럼 우리의 부활하신 구속주의 모습으로 멋지게 일어날 것입니다.” 더 보기 “존 페이튼 전기 중에서”

윌리엄 캐리 전기 중에서

캐리는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인도로 간다고요? 안돼요, 여보, 절대로 안돼요”
아내는 그를 쳐다보며 당혹스런 표정으로 숨가쁘게 말했다. 안락한 보금자리와 일가 친지들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보 우리는 가면 안돼요. 우리 애들 생각도 좀 해줘요. 여기에는 당신의 교회도 있고, 집도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거에요.”
“여보 그건 당신이 모르고 하는 얘기요. 더 보기 “윌리엄 캐리 전기 중에서”

요나와 롯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한 까닭은?

요나는 니느웨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 없기 때문이었다.
니느웨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도 아니었다.
죄를 짓던 말던 그는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던 말던 그는 상관이 없었다.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이 배가 아플 정도로…
더 보기 “요나와 롯”

고흐,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Gogh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그림
처음으로 그림이란 것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몇시간이고 이것만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파도치는 고흐의 하늘은 굉장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2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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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그의 영적 순례의 절정, 곧 영원한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을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분들이 이 그림의 상징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지만, 이 작품이 고호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중요성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유화는 기성 교회의 어둠과 위선을 넘어 자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그의 영적 순례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삶을 경축함과 동시에 임박한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죽음 가운데 내재한 소망, 곧 그가 해방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룰 것임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야말로 반 고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그림이다.



마을의 교회: 마을 풍경에서 뽀족탑을 가진 교회가 초점을 이루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이 교회는 불란서 남쪽 프로방스 지방의 교회라고 하기보다 전형적인 네덜란드의 교회이다. 다른 몇 집에는 불이 켜 있지만 이 교회만은 어둡다. 이것은 마치 텅 비고 불 없는 교회처럼 무의미한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의 교회의 문은 닫혀 있으나 고흐가 신앙의 문들 닫은 것은 아니다. 고흐는 교회 안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과 승리적 교제를 나누고 있다.

“모든 소리가 끊어질 때에도, 별 밑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린다.” 이 말은 고흐의 복음주의적 시기인 1877년 고흐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요, 동시에 그의 평생에 걸친 영적 확신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싸이프러스 나무: 커다란 불꽃기둥처럼 위로 솟아있는 싸이프러스 나무 역시 고호 자신의 열망은 물론, 보편적인 이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나 영원하 영과의 궁극적 합일을 말해준다.

“해바라기 그림을 그릴 때 즈음, 나는 해바라기에 대조되는, 그러나 해바라기와 같은 영감을 주는 것을 찾앗는데, 그것이 바로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여기 싸이프러스 나무는 ‘죽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껴안으려는 영혼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하늘:
한 때 고흐는 “달이 아직도 빛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태양과 저녁 별들도–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준다.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게 있으리라(마 28:20)는 말씀을 상기시켜준다.”고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그가 암스텔담에 있을 때 밤하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처럼, 생 레미 요양원에서 본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힘을 그린 것은 고흐의 새로운 미적 발견이었다.
해와 달을 함께 그린 것은 아마 낮이 저물고 밤으로 접어드는 황혼의 때를 암시하는 것 같다. 고흐는 일찍이 이 때를 디킨스의 말을 따라 ‘복된 황혼’이라고 불렀다. 이 복된 황혼의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신비한 때다.

어쨌든 ‘Starry night’은 임마누엘 칸트가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 이 두가지에 나의 생각을 끊임없이 집중시킨다’는 말을 상기시켜 주는데,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중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원의 문턱에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대낮에서 별이 빛나는 밤으로 이행하여 가는 것, 땅에서 하늘로 치솟아 있는 싸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비나는 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영원한 존재와 궁극적 합일을 바라는 고흐의 열망릉 보여주면서, 또한 그의 죽음과 불멸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릉 풍경과 더불어 하늘의 달과 별들의 우주적 드라마를 혼합 연출하는 가운데 창조를 찬양하고 있다. 고흐의 종교적 열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별이 빛나는 밤’이고, 종교의 필요성 때문에 밤에 나가서 별을 그렸다고 하는 고흐 자신의 말과 전적으로 부합된다.

– 고흐의 영성과 예술, 최종수역편


아 진정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하늘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아브라함이 별을 보듯,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그려내었던 것인가.

사이프러스 나무의 오른쪽 가지는 달을 향하고, 두번째 것은 큰 별을 향하였다. 하늘을 향한 거대한 사랑과 바램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우주적인 영원불멸함의 가치를 찾아보려 애쓰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일까.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