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사, 다니엘 풀러
성경의 일관성이라는 책을 공부하다가 덮어둔 적이 있었는데 모처럼 마음을 먹고 다시 공부를 해보았다. 그 안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바로 율법이 근본적으로 복음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더 보기 “다니엘 풀러, ‘성경의 일관성’”
사단에게서 나오는 것
좋은 상황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로 나오거나 그의 허락하에 나온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고난으로 이끌거나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하나님께서 환난과, 어려움, 징계를 주신다고 되어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받은 고난, 욥의 고난, 이스라엘의 애굽과 앗수르 종살이, 이스라엘이 겪었던 전쟁의 패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았던 고난들을 생각해보라. 그 어떤 것도 사단이 하나님의 계획을 앞지르고 역사한 것이 없다. 때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또는 하나님의 다른 주권적인 역사하심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의 계획아래 이 모든 것을 통해 인생을 선하게 이루어진다.
단지 그럴 때마다 악한 생각이 사단이 주는 생각으로인해
죄된 본성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게 만들거나,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생각이다.
servant mind
군대에 와서 알게된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servant mind 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내면화되지 않아서 상당한 괴로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내가 입대하기전에 알고 있었던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긴다는 개념은 이곳에서 완전히 바뀌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발을 씻기는 세족식의 행위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제정하신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느낀 그것은 기존에 생각하던 개념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것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여 왔다.
왜냐면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실때 그 말이 제자도의 어려움을 표현한 비유라면 그것이 종이되는 것의 어려움을 비유하기에 썩이나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것인가 여기서 알게 되었다. 그것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2000년 전 한 인물의 비유를 들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 때는 ‘저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도저히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못하겠어!’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얼마나 그 기준에 아직 모자란 인물인가 하고 생각했다. 예전에 파인애플 이야기라는 소책자를 읽으면서 책의 저자의 이야기보다 나는 더 나을 것이라고 은근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환상이 이곳에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남들을 섬기는 행위를 거의 해본일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사람의 종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단순한 문제로 바뀌는지 조금은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내면화되지 못했다. 남은 군생활기간 얼마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삶의 방식을 익힐 수 있을 것인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목표에 얼마나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이사람의 모습은 그리스도와 같았다라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이 산을 또 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산의 크기보다 더욱 컸다.
톨스토이, ‘부활’
자기를 믿으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지만 남을 믿으면 주위 사람들의 찬동을 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네플류도프가 신, 진리, 재물, 빈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하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일로서 간주했고, 어머니나 고모는 점잖게 놀리는 투로 그를 ‘우리의 친애하는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소설을 읽거나 외설수러운 이야기를 듣거나, 통속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프랑스 희극을 보고와서 재미있게 그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그를 칭찬하고 치켜세우는 것이다. 그가 절약하거나 하면… 그것을 일종의 색다른 허영이라고 비난했고… 특별히 사치스러운 장식을 하느라고 돈을 낭비하면… 모두들 그의 취미를 칭찬하며 값진 물건을 선사하기도 했다.
…(중략)
처음에는 네플류도프도 싸워봤지만 그 싸움은 어렵기 그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자기를 믿었을 때 바르다고 생각하던 것은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는 악으로 간주되었고, 또 그와 반대로 자기가 믿었을 때에 그가 악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주위사람들에게는 착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네플류도프가 자기를 믿는 것을 단념하고 남을 믿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부정이 불쾌했지만… 술과 담배 맛을 배워서… 나중에는 오히려 커다란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 톨스토이 ‘부활’, 13장 중에서 더 보기 “톨스토이, ‘부활’”
엔도 슈사쿠, ‘침묵’

자이툰 교회에서 김진홍 목사님의 책과 또하나의 책 ‘침묵’을 읽게 되었다. 제목에 무엇보다 마음이 끌리었던 것은 내가 예전부터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에 끌리고 있었을 뿐더러, 잠깐 살펴본 이 책의 내용이 17세기 포르투갈 선교사의 초창기 일본 선교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바로 포르투갈의 카톨릭 선교사인 로드리고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배교를 택하고 마는 것이다. 더 보기 “엔도 슈사쿠, ‘침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