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수익률을 얼마로 할 것인가

워렌버핏은 41년간 평균 21.4%의 수익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정도 목표수익률을 잡으면 될까요?

저는 얼마전 see’s candies 사례를 분석하면서 버핏은 지금보다 고금리시대에 투자했음을 알 수 있었고, 같은 20%의 수익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금리 5%일 때와 10%일 때 실질 수익률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보기 “목표수익률을 얼마로 할 것인가”

Werner Syndrome

근래 나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대인관계도 극히 줄었으며, 교회생활도 무척 소원해졌다.
일상은 매우 지루하고, 무의미해졌다.
가끔은, 아니 매우 자주, 나는 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나마 책읽는 즐거움에 대해서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는데
요새는 책읽기도 너무나 무의미해보였다. 나는 왜 책을 읽는다는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가.

우연히 읽은 김현의 글귀가 그래서 유독 마음에 들어왔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하는것을 무엇하려고 하느냐?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한다! 중세기처럼 문학을 이해하는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도아니며, 몇몇의 날렵하고 재치있는 수필가,작가들이 비록 그들의 저술로 치부를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더라도,문학을 해가지고 아무나 돈을 크게 벌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식민지 치하의 몇몇 작가들 처럼 모두들 지사로서 대접을 받는것도아니다. 그런데도 문학을한다 무엇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할만한 가치를 그 자체 내에 갖고있는가?

남은 인생내내 나에게, 써 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지성이 탄식했던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물론 촐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때,가령 돈이 없을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문학’ 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독서’로 바꾸어 읽어도 충분히 비슷한 의미가 된다.
나의 책읽기는 유용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그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내어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닌한
내가 어느정도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취미생활 정도의 책읽기를 한다는 것은
별로 쓸모짝에 없다.

나는 스페셜리스트가 될 소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저 평범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서 삶을 매우 불분명하고 평범하게 살다갈 것 같다.
가끔 큰 꿈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보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고 또 생각하곤 한다.
나는 이상한 사고에 갖혀있다. 삶은 너무나 짧고,
나의 사소한 행위는 말 그대로 사소할 뿐이다.

아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이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남은 삶을 살다갈 것인가!
아 이러한 고민은 언제쯤 분명하게 끝이날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을 바라십니까?

나는 많은 눈을 가지면 세상을 더 바르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으니 모든 사물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저를 바보가 되게 만들어주십시오. 저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인생의 덧없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습니다.
늙어서 깨달아도 좋은 것을!

아 내 정신은 환갑이다.
탈출구 없는 정신착란. 무섭다.

이것이 사단의 장난이라면 그는 실로 두려운 존재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맴도는 것 같다.

기독교인과 정치

얼마전 CBS에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모여서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판과 토론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번 아프간 사태와 기독교 내부적인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취지가 반갑더군요.
그 중에서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정치운동에 대해서 한 패널이 비판을 가했는데,
교계 목사들이 미국의 전쟁에 찬성하는 운동을 펼치거나, 혹은
강경보수단체들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등의 정치집회에 대해서 비난하자
패널로 나오신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의 정치행태는 비판받을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종교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더욱 위험한 생각이다. 종교가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는 없다.’

들으면서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기독교인도 한 나라의 정치적
책임을 담당하는 주권자인 만큼 정치에 대한 입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매우 편협되어 있습니다.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이 몇%인지, 혹은 대통령으로 나온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교회에서 그런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더라 아니더라…

하지만 이것만큼 위험한 발상이 있을까요?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이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찍으면 안됩니까?
저는 하루빨리 교계가 이러한 편협적인 정치에 대한 시각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교회를 다니거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결코 판단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치계는 종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오신날에는 절에 가고, 성탄절에는 교회에 가는 정치인들.
그들은 왜 그러한 행위를 할까요?
연설이나 간증 등의 행위를 통해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다 신앙이 훌륭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닐 수 있습니다.
단순한 겉모습으로 사람을 결코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임을 내세웠던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를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었던가요?

미국의 정치행태는 기독교적인가요? 세계적으로 보수기독교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내세우는 부시의 대내외 정치행위는 기독교적인가요?
저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교회가 심각한 우려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공평과 정의로움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들에게 신앙이 없어서
문제라고 하셨나요? 물론 신앙의 부재도 그들의 문제였지만,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지도자들의 신앙을 언급하신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공평, 백성에 대한 착취, 부도덕, 사리사욕 등에 대해
더 많은 언급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칭찬을 받았나요? 그는
백성의 송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맡은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며, 정치인에게 구할 것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사리사욕을 좇지 않는 마음, 그리고 지혜로운 결정력을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 정치인을 뽑는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으며, 불교인 정치인을 뽑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교회가 속히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입법부의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어 헌법까지 기독교로 바꾸어버리면 그게 정말 최상의 정치행위가 될까요? 가끔 보면 이러한 이상을 꿈꾸는 기독교인이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강제하지도 않으셨고, 강요하신 적도 없습니다.
국가는 종교에 대한 자유를 부여해야하고, 종교에 대한 선택은 본인의 자유의지대로 해야하는 것이지, 강제해야한다고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슬람의 무슬림정권들이 열리기를 기도하는 것은 옳지만, 한 나라가 기독교국가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국가라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의 대상을 택할 때 이루어집니다. 정치인들이 기독교를 믿는지 안믿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공평과 정의로 국가를 다스리고 외교력을 발휘할 것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비기독교인 정치인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정치하는 사람은 저는 두렵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치를 할지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정치를 할지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바른 사상과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기를 구해야할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

얼마전 전목사님께서 설교말씀 가운데 이런 문구를 들려주셨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본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행복을 위해 사십니까?
하지만 행복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바로 거룩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과연!
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적인가!
나는 이러한 훌륭한 말씀을 내교회에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했다.
 
이 시대의 삶의 정신은 어디로 가있는가? 시대의 삶의 정신은
개인의 행복내지는 더 나아가 가족의 행복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중심에는 돈이 지배하고 있다.
돈은 존경과 행복을 부여하는 이 시대 최고의 가치이고, 우상이다.
그러한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분명히 드러내고 밝은 빛을 비추는
듯한 이 말씀은 과연 기독교정신의 진수이다.
 
행복을 위해 살지 말아라, 거룩을 위해 살아라.
나는 몇 주가 지나갔지만 아직도 매일 이 말씀을
하루에도 몇번이고 되뇌이고 있다.
그 어떤 싯구나 명언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