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알려진 타자방법.
오른손 왼손 검지손가락만을 이용하여 타자를 치는 방법이다.
여러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놓으면 자판이 안보이니 초보자들은 당연 독수리타법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방법도 숙달하기 나름이어서 어떤 사람은 독수리 타법으로 300타 가까운 굉장한 타수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단순한 방법이기에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사람들하고 대화하면 보통 이렇다.
‘두 손가락으로 그만 치고 이젠 열손가락으로 차근차근 연습해라, 그래야 늘지’
‘나 해봤는데 아무래도 이게 편해. 타수도 이정도면 되고, 열손가락으로 쳐봐야 너무 느려서 답답해서 못하겠더라고.’
‘그래도 두 손가락은 한계가 있으니깐, 지금이라도 열손가락으로 제대로 치는 거 연습해 그게 평생 도움이 될거다.’
‘어쨌든 난 이게 편하다니깐. 너한텐 그런지 몰라도 난 이걸로도 하나도 안불편하고 다 할 수 있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답답함을 느껴보신 일이 있는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고수하고자 하는 독수리 타법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변화를 꾀한다는 건 이런 어려움이 따른다. 익숙한 것에 우리는 안주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두려움과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때 주어지는 어려움으로부터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움츠러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움추림을 견디지 못한다면 더이상 앞으로 뛰어나갈 수 없다. 멀리뛰기 위해서 움츠려야 하고 변화를 위해서는 인내와 적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내와 적응은 미래의 변화된 나, 변화된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 비전은 혼자만의 예상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 연구와 계획,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비로소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탈북형제 진주일의 시
혼자 살지 말아라 행복하지 말아라
네가 사는 이 순간도 너희 형제 죽어간다.
왕의 사랑 받으니 외면하지 말아라
이 민족의 아들임을 부디 잊지 말아라
아빠 엄마 다 죽고 너만 살아 뭣하랴
잠잠하지 말아라 외면하지 말아라
네가 외쳐 살아나면 너도 사려니와
침묵하면 살아나도 너는 죽으리라
죽음의 압록강을 넘어 온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그리스도 왕후 너 에스더여
이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으라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걸고 외쳐라
시체된 이 민족 살릴 때까지
나의 왕 그리스도 손댈 때까지
혼자 웃지 말아라 기뻐하지 말아라
네가 웃는 이 순간도 너의 겨레 울고 있다.
왕의 품에 안겼으니 잠들지 말아라
이 민족의 딸임을 부디 잊지 말아라
갈라진 아빠 엄마 백발되너 기다린다
잠잠하지 말아라 잠들지 말아라
네가 외쳐 하나되면 너도 살려니와
침묵하면 통일되도 너는 죽으리라
허리 잘린 겨레 중에 네가 뽑힌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그리스도 왕후 너 에스더여
이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으라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걸고 외쳐라
꺾여진 이 민족 이을 때까지
나의 왕 그리스도 붙들 때까지
혼자 서지 말아라 일어나지 말아라
네가 섰는 이 순간도 너의 동포 엎드렸다
왕궁에 잇으니 안심하지 말아라
이민족의 남아임을 부디 잊지 말아라
동방빛난 예루살렘 언제면 되랴
잠잠하지 말아라 안심하지 말아라
네가 외쳐 우뚝 서면 너도 살려니와
침묵하면 일어서도 너는 죽으리라
하늘나라 왕궁에 들어간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그리스도 왕후 너 에스더여
이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으라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걸고 외쳐라
시체된 이 민족 살릴 때까지
나의 왕 그리스도 손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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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준 홍해도 잊어버렸나이다
구름기둥 불기둥도 안보고 있나이다
만나도 제것이라 우기고 있나이다
생명의 빛발도 손으로 막나이다
오 주여 참으로 슬프도소이다
이 민족이 인생으로 우상을 섬기니
눈이 없는 이 백성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못할진대 주님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영영 지워버려 주옵소서
리별이 피엉긴 두만강이 우나이다
실향엄마 백골깊은 한강이 우나이다
평양의 예루살렘 어디로 갔나이까
성전에서 내리몰려 50년이 넘나이다
오 주여 참으로 슬프도소이다
이민족이 아직도 둘이 되어 다투니
패괴한 이 백성 하나로 뭉치소서
그렇지 못할진대 주님 품안에서
나를 영영 내쫓아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헤어져 죽지 않았나이까
엄마 손에 이끌려 걸음마를 떼우니
금송아지 발아래 엎드리게 하나이다
영웅을 사모하는 꿈을 꾸더니
금송아지 노래를 부르게 하나이다
인생의 바른도리 찾으려 하나
금송아지 만세를 지르게 하나이다
이 민족의 딸임을 외치려 하니
금송아지 딸이라고 나팔불게 하나이다
토막난 저 땅을 바라보려니
금송아지 철조망이 꽁꽁 묶나이다
금송아지 염통을 발가내더니
출애굽의 구세주요 참신이라 하나이다
금송아지 제단을 찍으려하니
무지한 단두대로 끌고 가나이다
생명중에 하필이면 인생이니이까
인생중에 하필이면 태어났나이까
태어나서 하필이면 약자이니이까
약자중에 하필이면 한나라이니이까
한나라중 하필이면 여로보암 발아래며
그 발아래 하필이면 평양이니이까
시소
나는
내 죄 때문에
혼자 바닥 외로운 곳에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올리워 졌다.
하늘 위로 위로..
새 같이 날으는 기쁨이었다.
한 쪽에서는
주님께서
대신 낮아지고 계셨다.
일흔 번 씩 일곱 번
또 똑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힘들때
나는 일흔번씩 일곱번…
이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셨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하라고
그렇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도
나를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이 것을 붙잡곤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히 솟아난다.
그리고 완벽하다.
내가 아무리 힘을 써서 죄를 짓는다 한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그 죄를 다 씻는다.
죄가 더하면 더할수록
주님의 은혜가 그것과 비할바 없이 넘쳐난다.
적게 사함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절실히 절실히 내가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느낀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다.
원수가 날 정죄할 때에도
나는 의롭게 설 수 있다.
나에게는 더이상의 정죄함이 없다.
왜냐면 나는 주 보혈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가슴을 때리고
가슴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흘러납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은 완벽하십니다.
그분의 은혜가 저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주님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무엇에 비유할까요?
저는 마땅한 비유를 찾고자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뒤져봅니다.
주님 저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만큼이나 문장력을 주신다한들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포기해야 겠습니다.
주님께 또한번 다짐합니다.
위엣것을 찾으며 살겠다고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잘못의 시인에 대하여
“저는 옛날에 제가 이정도면 부모님 생각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저는 아주 유치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옛날에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해서 잘못했다는 걸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걸 그 당시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지금 자신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그저 옛날에 자신이 잘못생각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금의 내 모습은 완전한 모습으로 여기는 착각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은 지금의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너무나 잘못된 생각들에 파묻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한다.
그 또한 일종의 겸손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