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후 어머니께서 썰어주신 시큼한 키위 한조각으로 한낮의 더위만큼 푹푹거렸던 마음을 달랬다.
낮에는 마음에 거친 파도가 일었다가 늦은 밤에는 조용히 별 빛에 반짝이는 잔잔한 물결로 덮였다.
나에게 사랑이 찾아오는 것은 흡사 동전을 던져서 옆면이 서는 것과 같다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동전을 던졌던 한 만화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동전을 던져보았노라고 했다.
하다보니 놀랍게도 한번은 동전이 옆으로 서더라고 했다.
난 믿기지 않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밤 읽었던 전혜린의 글이 생각나 늦은 밤 쇼스타코비치의 5번을 들었다.
4악장의 쿵쾅거리는 팀파니는 흡사 내 마음 같았다.
인생이란 정말 신비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따라 하나님의 손길이 깊이 느껴졌다. 왜 그 분은 나를
지금
여기
에 두셨는가.
말 많은 사람들의 기억력
말을 많이하는 것과 기억력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가 생각만 한 내용과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해본 것과는 굉장히 기억에 남는 정도가 다르다.
내가 어떤 연구결과나 통계자료를 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경험적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내가 말한 어떤 수치나 자료들은 쉽게 기억을 한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뛰어난 기억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워렌버핏이 하루에 전화통화를 수어시간 하는 것으로 들어 알고 있다.
워렌버핏의 뛰어난 기억력은 습관적인 대화에서 나오는 것도 상당 부분 차지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비둘기
길을 가다가 도시 한가운데 도로에서 사람들 발에 치이여 열심히 이리저리 먹을 것을 쪼아대는 비둘기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정겨움을 느낀다. 형식적으로 심어놓은 생기없는 나무들, 뿌연 하늘 외에는 인간의 창조물로만 가득한 탁한 공장같은 도시에서 그나마 인간을 버리지 않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비둘기들이 나는 고맙기만 하다.
온 세상이 홍수로 물 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살아남은 유일한 인류였던 노아는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보냈다. 비둘기는 하나님의 편지를 배달하듯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다가 보여주었다. 저주에서 회복으로 새 땅이 드러나던 그 순간을 비둘기는 가장 먼저 보았고 인간에게 전해주었다. 모두가 저주가운데 있었을 때, 방주외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 비둘기는 새 땅이 열리는 것을 전해주는 신의 사자였던 것이다.
나는 그 역사적인 일이 머리에 떠오르자 다시 또 비둘기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 인간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살 때, 그로 인해 자신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 신이든, 그가 창조한 자연이든 – 보이지 않았을 때, 비둘기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회복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지금 도시 한가운데 지저분한 매연 틈바구니 속에서 유유히 ‘만나’를 먹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인류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잊지 않도록 – 그들이 왜 깨끗한 자연이 좋지 않겠는가 – 이 더럽고 추잡한 도시가운데서 인간을 떠나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 주고 있는 것이다.
Werner Syndrome
근래 나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대인관계도 극히 줄었으며, 교회생활도 무척 소원해졌다.
일상은 매우 지루하고, 무의미해졌다.
가끔은, 아니 매우 자주, 나는 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나마 책읽는 즐거움에 대해서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는데
요새는 책읽기도 너무나 무의미해보였다. 나는 왜 책을 읽는다는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가.
우연히 읽은 김현의 글귀가 그래서 유독 마음에 들어왔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하는것을 무엇하려고 하느냐?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한다! 중세기처럼 문학을 이해하는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도아니며, 몇몇의 날렵하고 재치있는 수필가,작가들이 비록 그들의 저술로 치부를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더라도,문학을 해가지고 아무나 돈을 크게 벌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식민지 치하의 몇몇 작가들 처럼 모두들 지사로서 대접을 받는것도아니다. 그런데도 문학을한다 무엇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할만한 가치를 그 자체 내에 갖고있는가?
남은 인생내내 나에게, 써 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지성이 탄식했던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물론 촐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때,가령 돈이 없을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문학’ 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독서’로 바꾸어 읽어도 충분히 비슷한 의미가 된다.
나의 책읽기는 유용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그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내어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닌한
내가 어느정도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취미생활 정도의 책읽기를 한다는 것은
별로 쓸모짝에 없다.
나는 스페셜리스트가 될 소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저 평범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서 삶을 매우 불분명하고 평범하게 살다갈 것 같다.
가끔 큰 꿈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보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고 또 생각하곤 한다.
나는 이상한 사고에 갖혀있다. 삶은 너무나 짧고,
나의 사소한 행위는 말 그대로 사소할 뿐이다.
아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이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남은 삶을 살다갈 것인가!
아 이러한 고민은 언제쯤 분명하게 끝이날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을 바라십니까?
나는 많은 눈을 가지면 세상을 더 바르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으니 모든 사물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저를 바보가 되게 만들어주십시오. 저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인생의 덧없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습니다.
늙어서 깨달아도 좋은 것을!
아 내 정신은 환갑이다.
탈출구 없는 정신착란. 무섭다.
이것이 사단의 장난이라면 그는 실로 두려운 존재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맴도는 것 같다.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
얼마전 전목사님께서 설교말씀 가운데 이런 문구를 들려주셨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본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행복을 위해 사십니까?
하지만 행복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바로 거룩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과연!
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적인가!
나는 이러한 훌륭한 말씀을 내교회에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했다.
이 시대의 삶의 정신은 어디로 가있는가? 시대의 삶의 정신은
개인의 행복내지는 더 나아가 가족의 행복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중심에는 돈이 지배하고 있다.
돈은 존경과 행복을 부여하는 이 시대 최고의 가치이고, 우상이다.
그러한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분명히 드러내고 밝은 빛을 비추는
듯한 이 말씀은 과연 기독교정신의 진수이다.
행복을 위해 살지 말아라, 거룩을 위해 살아라.
나는 몇 주가 지나갔지만 아직도 매일 이 말씀을
하루에도 몇번이고 되뇌이고 있다.
그 어떤 싯구나 명언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