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의 시인에 대하여

“저는 옛날에 제가 이정도면 부모님 생각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저는 아주 유치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옛날에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해서 잘못했다는 걸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걸 그 당시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지금 자신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그저 옛날에 자신이 잘못생각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금의 내 모습은 완전한 모습으로 여기는 착각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은 지금의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너무나 잘못된 생각들에 파묻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한다.

그 또한 일종의 겸손인듯 싶다.

일흔 번 씩 일곱 번

또 똑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힘들때
나는 일흔번씩 일곱번…
이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셨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하라고
그렇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도
나를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이 것을 붙잡곤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히 솟아난다.
그리고 완벽하다.

내가 아무리 힘을 써서 죄를 짓는다 한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그 죄를 다 씻는다.
죄가 더하면 더할수록
주님의 은혜가 그것과 비할바 없이 넘쳐난다.

적게 사함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절실히 절실히 내가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느낀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다.
원수가 날 정죄할 때에도
나는 의롭게 설 수 있다.

나에게는 더이상의 정죄함이 없다.
왜냐면 나는 주 보혈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가슴을 때리고
가슴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흘러납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은 완벽하십니다.
그분의 은혜가 저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주님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무엇에 비유할까요?
저는 마땅한 비유를 찾고자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뒤져봅니다.
주님 저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만큼이나 문장력을 주신다한들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포기해야 겠습니다.

주님께 또한번 다짐합니다.
위엣것을 찾으며 살겠다고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시소

나는

내 죄 때문에

혼자 바닥 외로운 곳에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올리워 졌다.

하늘 위로 위로..

새 같이 날으는 기쁨이었다.

한 쪽에서는

주님께서

대신 낮아지고 계셨다.

독수리타법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알려진 타자방법.
오른손 왼손 검지손가락만을 이용하여 타자를 치는 방법이다.

여러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놓으면 자판이 안보이니 초보자들은 당연 독수리타법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방법도 숙달하기 나름이어서 어떤 사람은 독수리 타법으로 300타 가까운 굉장한 타수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단순한 방법이기에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사람들하고 대화하면 보통 이렇다.

‘두 손가락으로 그만 치고 이젠 열손가락으로 차근차근 연습해라, 그래야 늘지’

‘나 해봤는데 아무래도 이게 편해. 타수도 이정도면 되고, 열손가락으로 쳐봐야 너무 느려서 답답해서 못하겠더라고.’

‘그래도 두 손가락은 한계가 있으니깐, 지금이라도 열손가락으로 제대로 치는 거 연습해 그게 평생 도움이 될거다.’

‘어쨌든 난 이게 편하다니깐. 너한텐 그런지 몰라도 난 이걸로도 하나도 안불편하고 다 할 수 있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답답함을 느껴보신 일이 있는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고수하고자 하는 독수리 타법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변화를 꾀한다는 건 이런 어려움이 따른다. 익숙한 것에 우리는 안주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두려움과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때 주어지는 어려움으로부터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움츠러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움추림을 견디지 못한다면 더이상 앞으로 뛰어나갈 수 없다. 멀리뛰기 위해서 움츠려야 하고 변화를 위해서는 인내와 적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내와 적응은 미래의 변화된 나, 변화된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 비전은 혼자만의 예상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 연구와 계획,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비로소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위대함

진정한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는 진정한 위대함은 되지 못할 듯 싶다.
나는 거대한 영적지도력을 가진 목사, 길이 고전으로 남을 책들을 쓰는 것,
수많은 종족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선봉장의 자리에 서는 것.
이런 것만이 진정한 위대함이라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제주도의 이름모를 한 촌락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양육하는
일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 해 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큰 비전을 품기에만 급급하여 작은일 드러나지 않는 일은 무시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위대한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위대하지 않은 일에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칠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