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안돼! 하나님 만이 나의 유일한 위로야!”
…..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의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걸?
안그랬으면 성경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6)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나님에게만 격려받으면 되는 거면 서로 격려하라고 하지 않았을테니깐.
하나님에게만 사랑받으면 되는 거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을테니깐.
하나님과의 만남만 있으면 되는 거면 서로 모이라고 하지 않았을테니깐.
그리스도인과 죄
이런 찬송시가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는 일들은 예수님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 같은 일들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에게 드린 것이 없습니다. 저는 항상 죄만 짓고 예수님
께 나의 십자가만을 드려왔습니다.
저에게 죄가 이리도 많은데 제가 무엇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 내가 너의 십자가를 진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언제 나에게 준 십자가를
도로 가져가라고 했느냐? 너의 십자가는 내가 모두 진다. 나의 피는 끊임없이
온 사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생수같이 넘쳐나는 것이건만 네가 빨아먹는 몇
방울의 피가 나에게 문제가 되겠느냐?
너는 내가 주지도 않고 취하여고 하는 줄 아느냐?
내가 쏟아준 피 너에게 쏟으라고 하지 않는다. 나의 죄사함을 네가 받아야
또 네가 나에게 줄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너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 네 죄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에
평생 괴로워하며 살라고 대신 죽은 것이 아니란다. 나는 너에게 평안을 주기 위
해서 죽은 것이란다. 내가 너에게 주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고 하지 않았느냐? 세상사람들도 느끼지 않는 죄책감을 네가 더 느낀다면
그것이 나의 십자가를 더 무겁게 하는 것이란다.”
날 안아준 친구
레크레이션 지도라는 수업을 듣는다.
..같이…
그곳에서 만난 한 친구가 있다.
조..라는..신과대 99학번 아이다.
같은 조가 되어서 자주 부대끼고 잘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다지 맘에 들이를 않았다. 99학번 이면서
선배들한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말을 툭툭하는가 하면
담배도 피고.. 그냥 신학과라는게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런 아이였다.
한번 길을 가다가 나를 만났는데
야.. 대출 좀 해줘라.. 라고 대뜸 그래서 아주 황당한 일이 있었다.
레크레이션 지도의 수업 과정 중에 캠프를 1박으로 가는 시간이 있다
엊그제 4일-5일에 다녀왔다.
그 아이와 또 같은 조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이를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저녁 시간.. 캠프화이어를 하는 시간에 ‘참회의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스티로폼을 하나 가운데 놓고 조가 둘어앉아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준 일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조 인호라는 그 아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며 하나씩 하나씩 꽂기 시작하는데
사람은 보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떤 사람을 용납해 주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것을 느꼈다. 아주, 순수하고 선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날 저녁 ‘축복의 시간’이라는 시간에 서로 떡을 떼어 먹여주는 시간
이었는데 그 아이에게 가서 떡을 주며
내가 그 때 마음이 어땠다는 이야기를 했고
기도를 해 주었다.
저녁에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이와 3명이서 있게 되었다.
그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 1 때 신학에 마음을 두었다고 하고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본 이야기 등등을 들었다.
재수를 했으니 .. 나와 같은 나이인 셈이다.
다음날 캠프를 끝내며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이야기를 했다.
이 캠프를 와서 내가 사랑하게 된 한 친구가 있다고
처음에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던 이야기,
다시 그의 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 했다.
나는 책을 통해 배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나도 사람들 앞에서 어떤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나도 한번 써먹고 싶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왜냐면 나는 그 아이한테서 선배인양 행세하며
그날 저녁 기도해 줄때 후배다루듯이 했던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도 한살 어린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레크세이션 수업에 들어갔는데
교실 밖에서 날 보자
그 친구가 반갑게 끌어안아 주었다.
별 일 아닌듯 지나쳤지만 마음은 참 기뻤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와의 우정을 드러내는 일은 참 귀하다.
배워만 왔던 그 일들이 생각대로 이루어 져 준 것도 참 감사하다.
많은 걸 배우고 얻었다.
그냥…
별 일 아니었지만…
스피노자와 죽음
스피노자의 “윤리학” IV, 67. 정의 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만 생각한다. 그의 지혜로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숙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해서 되도록 생각하지 않
는 것만이 현명한 일일수 밖에 없겠지만은
우리는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복되고 영광스럽고 즐거운지요.
죽음 앞에서는 어떤 철학자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충고와 욕
충고와 욕은 종이한장 차이다.
어떤 내용을 기분 좋게 얘기해주면 그것은 충고이고
그것과 똑같은 내용은 기분나쁘게 얘기하면 그것은 욕이다.
그래서 어떤 욕을 듣더라도 충고로 바꿔들을 수 있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