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딕스, ‘세례 받으심 (The Baptism)’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세례를 주는 요한의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의 의미는 어떠했나.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 그 밑에 세례요한의 큰 손, 그 밑에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짐작건대 왼쪽 위에 몇 번의 쏟아지는 터치는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인 듯 하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요한은 세례를 줄 때 성령이 그 이에 머무른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물로 알았다.
그의 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삼각형 모습으로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베르메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y & Martha, 1654-55,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베르메르 –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54-55년경, <위>

그림의 내용은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묘사하고 있다. 언니 마르다는 식사준비로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나가, 마리아가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주께서는 이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장 41~42)
이 이야기는 당시 네덜란드, 플랑드르, 이태리에서 유행했고. 특히 플랑드르에서 인기있는 주제였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이 주제를 그린 플랑드르 그림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특히 안트워프 화가 Erasmus Quellinus의 작품과 유사성을 지닌다.<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베르메르와 Quellinus의 작품은 같은 주제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베르메르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같은 비중을 두었고, 그것은 굉장히 마르다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불평하는 마르다를 나무라셨다. Quellinus의 그림을 보면 그 느낌이 온다.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반면 마르다는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구원을 얻는 두가지 방편을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임을 상징하고 마르다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서 행위를 상징한다.

Quellinus는 마르다는 그림의 중요인물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구원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의 모토였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그는 개신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미술에는 그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이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후에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동일하게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카톨릭은 믿음과 행위의 적절한 조화를 강조하였다.

어찌보면 카톨릭의 이러한 사상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논증하듯이, 의롭다함을 받는 방편으로서, 율법과 행위가 중요시 된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되며, 우리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은 참된 자유를 가르쳐준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모른다.

그림 속에 당시 종교개혁의 두 교리가 다르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토 딕스,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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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딕스가 그린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평범하다. 어찌보면 파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그는 기존의 우아한 예수님의 그림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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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이 어린아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실망을 했을지도, 어쩌면 반대로 큰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저 표정을 보면 무언가 섭섭한 표정들이다. ‘너정도면 천국에서 큰자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자. 어린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엔 저 어린아이는 자기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던 작은 자가 되던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인 듯하다.
자기가 왜 여기 서있는지 예수님께서 왜 부르셨는지 잘 모른다.


둘의 마음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The Artist’s Studio, 1665, oil on canvas, Kunsthistorisches Museum at Vienna


이런 그림을 알레고리화라고 한다. 그림의 사물마다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림 말이다.
이 그림에서 베르메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소녀가 보인다. 한 손에는 나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었는데 이런 모습을 한 여인을 ‘역사의 뮤즈’라고 한다.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책이며, 월계관을 쓰고 있으므로 ‘명성’을 상징한다.

책상에는 가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모방을 의미한다.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를 그리며

화가는 그림을 순서없이 월계관먼저 그리고 있다. 이는 화가의 의도를 나타내는데 한번 들은 설명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튼은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베르메르는 다른 그림은 다 팔았어도 죽을 때까지 이 그림만은 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야망이 담긴 작품이다.

오토 딕스, ‘승리의 입성’


저것이 승리인가. 승리자의 표정인가. 당나귀는 왜 저리 조용히 눈을감고 침묵을 지키고 있나.


군중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고 환영하고 있나. 종려나무 가지는 왜 흔들고 있나.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는 무슨 말인가.


다윗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어서 자기들의 적들을 처부숴 달라는 주문이었겠지.


그러나 그들의 적은 로마도 다른 이방 족속들도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진정한 적. 죄, 율법,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들 대신 그 저주를 받으신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까닭은 죽기 위하심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다윗왕 시대의 그 강성하던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을테니.


그래서 저들은 순식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살인마로 돌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