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sFarewell to Jonathan, 1642, oil on wood,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윗, 품에 안긴 것은 요나단.
아니, 이 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요나단인 듯 하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더 이상 평범한 그림이 되지 않는다.
다윗은 위대하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요나단은 얼마나 더 위대한가.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3-4)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5-19)
난 요나단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앞에 겸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였음에도 다음 왕이 다윗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다윗이 목숨을 부지하였던 것은 요나단 덕분이었다. 그는 다윗에게 자신이 가져야할 왕의 상징인 칼과 겉옷을 주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다 한 사람이다.
그림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보다 더 품위있고 아량이 넓어 보인다. 다윗은 그의 넓은 아량에 안긴 아이같은 느낌이다. 요나단의 위대함이 조금은 느껴진다.
램브란트도 그런 요나단의 위대한 성품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에서는 그런 면이 느껴진다. 다윗에게 걸려있는 칼은 요나단의 성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왼쪽 배경은 요나단이 가야할 곳, 오른쪽은 다윗이 숨어야 할 곳. 둘의 상반된 처지도 그림은 보여준다. 다윗은 수풀에 숨어서 목숨을 이어가야만 한다. 요나단은 그를 찾지 못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난 이 그림을 보면 요나단의 성품에 감동하게 된다. 난 요나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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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인’님의 글입니다.
올해 1월 28일 토요일에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월 1일부터 있는 서울의 초대전 준비로 바쁜 가운데 신망애 성화감상 원고 독촉전화가 왔다. 내일이 마감일이라고 했다. 연락에 차질이 생겨 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다른 일을 내려놓고 신망애에 실을 성화를 생각하던 중 다윗과 요나단을 그린 그림을 실으라는 마음의 감동이 워낙 강하여서 순종하였는데 선정된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림 속의 다윗이 누구냐?
그림에 대한 작품설명은 세계적인 권위자가 하였는데 나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 속의 두 사람 중 누가 다윗이냐는 문제였다. 성구사전을 찾아 다윗과 요나단의 기사를 다 찾아 읽었다. 요나단은 나의 여지껏 생각과는 달리 굉장한 장군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스케치들을 다 찾아보았을 때, 등을 보이고 있는 소극적인 모습이 다윗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권위자의 해설과 다른 견해가 생겼다. 밤 늦게까지 이 작업을 마치고 주일 예배에 참여하였는데 선포되는 말씀이 ‘곤고해진 다윗’이었다. 이 설교에서 나는 어제 밤 늦게까지 한 나의 수고에 보답하듯이 왜 다윗이 등을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증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해설은 렘브란트의 다윗과 요나단 그림의 감상문이면서도 삼덕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깨우침에 반응한 나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뒷표지 다윗과 요나단 작품해설
미술이 자율성을 노래하기 시작한 1800년대 이전까지 서양미술사는 기독교미술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경은 미술가들의 영감의 보고였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히 다윗은 미술가들이 가장 애호하는 인물이었다. 다윗의 영웅적인 면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의 업적 등은 미술가들과 patron(후원자, 애호가, 주문자)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그림 속의 중심인물로 돋보이게 표현되어져 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다윗에 관한 또 하나의 그림도 위에서 말한 관성으로 인해 당연히 화면의 정면의 인물이 다윗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의 작품해설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성경의 기사들과 이 그림과 관련된 렘브란트의 스케치들을 종합하여 연구한 결과 뜻밖에 이 그림 속의 정면의 크고 근엄한 모습의 인물이 요나단이고 등을 보이고 있어 소극적으로 표현된 인물이 다윗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순간 필자는 렘브란트 회화의 영성에 감동으로 흥분하였다.
정확하게 삼상 20장 41절에서 취하여진 이 그림은 극도로 위축되어진 다윗의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렘브란트가 의도적으로 주인공인 다윗의 뒷모습만을 그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화면 속에 정지된 한 순간 이상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회화에서 정면의 인물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뒷모습은 소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그림 속에서 주인공이 비록 다윗일지라도 심히 곤고해진 다윗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는 회화적 표현성을 희생시키면서 다윗의 곤고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이 그림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곰과 사자, 거인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이지만 사울왕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위협에 다윗의 인내가 바닥이 나고 믿음도 한계가 드러났다. 다윗의 인생의 버팀목이 다 날아가 버렸다……’
이것들을 읽어버리게 되니 다윗은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환란과 시련에 하나님보다 사람이 두려워지게 되었다. 믿음이 바닥이 나면 사람이 두렵게 보인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사람이 크게 보이기만 한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내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다”라고 항변하고 한탄하는데서 다윗도 연약한 인간임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 2001. 1. 28 주일 설교 ‘곤고해진 다윗’중에서 –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다윗과 요나단이 성경의 대표적인 친구였듯이 렘브란트는 그림 속의 두 인물을 한 몸같이 겹쳐 그리고 있으며, 요나단의 두 팔은 다윗을 감싸고 있게 그림으로써 둘이 하나됨을 강조하여 위의 성경구절을 그림 속에 담아 내고 있다.
이들의 우정은 그 생명까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친히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하기도 한다.
‘다윗의 마음과 요나단의 마음이 하나가 되듯이 사단과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인생의 왕의 자리를 그리스도에게 내어 놓아야 한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주님께서 우리 생명을 요구하신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요구하신다…
요나단이 왕자의 상징인 겉옷과 군복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듯이 우리의 모든 것도 예수님께 넘겨 주어야 한다.’
– 2000. 12. 31 주일 설교 ‘다윗과 요나단’ 중에서 –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보고 그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는 글을 보았는데 이 그림 속에서 인생의 모든 버팀목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배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사람 훈련의 클라이막스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The Doubting of St. Thomas, Neues Palais, Potsdam
카라바조의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다. 어느 책을 봐도 나와 있는…
도마는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충격이고
제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늙은이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충격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둘은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미술은 굉장히 신비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후광을 두르고 있는 거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배경에는 천사를 그린다던지. 빛이 쏟아진다던지 하는 그런 표현이 주였다. 카라바조는 그러나 눈에 보일 법한 것들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적이다. 당시 종교계에 엄청난 비판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
네 사람의 머리는 가운데 모여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에 굉장히 관심을 갖게 만드는 구도라 생각한다.
도마는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았을까? 성경에 그건 나와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난 도마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지독하게 의심하는 도마의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도마는 좀 다른 모습이다.
카라바조는 그런 식으로 묘사하였다.
그래도 이 그림은 굉장히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2, The Hermitage St. Petersburg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
헨리 나우웬이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고 책을 한권을 써냈다고 하는데.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다.
이 그림은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온다.
저 지긋이 감은 눈과 두 손은 굉장한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아들은 그야말로 최고로 누추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 모습 속에서 죄악으로 가득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뒤에 서 있는 저들의 표정은 무표정인 듯 하면서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표정이 잔인,잔혹하다. 소름끼치는 표정들이다. 그들의 표정과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며.. 그래서 아버지의 넓은 아량과 사랑이 더 그윽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오만함을 꼬집으셨다. 난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영화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하실 때에 그들의 표정을 본 기억이 난다. 아주 떫은 표정.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림에서의 바로 저런 표정.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오랜기간 기다리셨는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에 얽매인 것들을 소멸하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이방인을 부르시고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기 까지. 얼마나 기다리셨겠는가? 고통받을 아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그마음이 초조하셨겠는가? 애타게 이방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그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슴 저미게 느껴진다.
누구나 한번쯤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해보아야 할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 앞에서 곧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 아들의 모습과 어느새 동일시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부터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퍼온 글
작품의 주제는 누가복음15장의 이야기이다. 한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먼 객지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다 없앤다. 할 수 없이 남의 집 더부살이로 연명을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동정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아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아버지한테로 돌아가기로 한다.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을 포옹한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러나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이것이 못마땅하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좋은 말로 달랜다.
렘브란트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 가운데 인간의 사랑과 용서와 포용이 잘 드러나는 장면을 택했다. 아버지는 자식으로 인한 지난 날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다정한 손길로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다른 형제들은 값진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쓴 채 옆 계단에 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냉담하게 이들을 내려다본다.
밝은 빛으로 강조된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 모습과 흰 수염, 그리고 핏기 없는 손길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쥐어뜯긴 것같이 보이는 엉성한 머리에 누더기옷을 걸친 아들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이다. 어둡게 묘사된 형제들은 시기와 무정과 죄악을 상징한다. 인간 내면의 사악한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 렘브란트는 역사상 위대한 종교화가이다.
주일 지상강론/ 고향가는 길
허윤석 신부
2000년 대희년의 그림으로 선정된 렘브란트의 작품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보면 돌아온 탕자인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손이 매우 인상적이다.
오른손은 부드럽고 길고 매끈하여 성모님의 손을 연상시키는 어머니의 손처럼 생겼고, 왼손은
오른손의 거의 1.5배 정도로 넓고 두껍고 힘있는 남성의 손으로 위엄과 권위가 느껴진다. 이것은
렘브란트가 하느님의 사랑을 예술적 의도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즉 어머니의 자애롭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깊은 사랑과 아버지의 위엄있고, 권위있고, 넓은 사랑을 함께 보담은 하느님의
사랑을 손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원천이요,
고향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고향 내음 나는 따뜻한 사랑이 그 주제이다.
복음에서 탕자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제 몫의 재산을 미리 모두 달라고
한다. 제몫을 청한 아들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
자신만의 쾌락을 누리는 데 쓴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힘은 그 상속 재산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된 것 역시 돈이 떨어져서 였다.
아버지 잘 만나 쉽게 얻은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면서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한 흔적은 성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어떻게
그렇게도 뻔뻔하게 아버지에 대한 죄스런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라는 말이 먼저 나올까?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되돌아 보자!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매일 커다란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 나의 생명과 신앙, 그리고 재능, 가족과 이웃, 건강과 물질들!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 형태로 받으면서 그 은총을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주일 미사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나? 하느님이 주신 건강을 자만하여 함부로 과음과
과식 그리고 즐거움에만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하느님이 주셨는데 오히려
그것을 남을 업신여기는 잣대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느님이 주신 시간을 자신의 발전과 봉사보다는
태만과 게으름으로 낭비하지 않았는가?
큰아들 역시 그리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한다.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큰아들은 이 말에 불평을 하며 “나의
것이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는 아버지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왔다.
은총(Grace)은 그 어원의 의미에 거저 가진 것이라는 1차적 의미가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 중심이 아닌 은총 중심으로 살 때, 두 아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탕자처럼 그 은총을 남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교만과 죄의 생활을 하는 것과,
장남처럼 늘 하느님의 일과 기도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자신 스스로 규정하여 아버지의 땅, 은총의 땅에서 살면서도 늘 자신의
몫은 없다고 투덜대는 두 가지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총은 참으로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따라서 우리가 은총을
구하거나 바랄 때 참으로 먼저 준비되어야 할 보험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겸손이다.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 죄를 고백하기 전에 우리의 고향이신 하느님의 모습, 우리의 태이신
그분의 손길! 어머니와도, 아버지와도 같은 손길을 먼저 기억하고 그분이 주신 은총에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은총만을 하느님의 사랑보다 앞세워 생각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쉽게 떠났고 우리는
죄만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게 생각하여 두려워하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쉽게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향이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신다.
나는 고향가는 길이 너무나 좋다.
가끔 고향보다 고향가는 것이 더 좋다.
늘 고향갈 때 변변한 것 하나 손에 들지 못한 못난 불효자가
빈손으로 가도
반기시는 내 어머니!
그 살내음이 고향가는 길에 뿌려져 있다.
내 어미가 나를 찾아오면
이 죄인은 또 다른 데로 도망치겠지만……..
내 발로 고향가게 하는 저 내음은
내 어미의 살내음이리라.
나는 고향이 내게 오는 것보다
고향가는 이 내음이 좋아라.
흐르는 내 눈물이 고향가는 이 길을
보지 못하고 눈감게 하지만
내 언제 눈뜨고 제정신으로 고향떠나 왔노?
내 고향 다시 돌아가는 것은
내 어미 살내음 맡고 눈감고 찾아가노라.
카라바조,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
Amor Victorious, Staatliche Museen at Berlin
카라바조의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
근데 웃고 있는 큐피트를 보면 모든 것을 비웃고 있는 사랑이 더 어울리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바닥에 떨어진 모든 가치들, 사랑 앞에서는 완전히 무기력하다. 여기서는 악기들, 악보, 이런 것들밖에 보이지 않고, 나도 책에서 본 내용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의미가 그림에 담겨 있다.
보기에는 좀 이해가 안갈지 몰라도 나는 카라바조가 그린 것이
감정에 일시적으로 빠져서 인생 망치는 그런 사랑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은 어떤 가치보다 위대하다. 나는 그런 그림으로 생각하고 싶다. 혹 아닐 수도 있지만.
카라바조, ‘마태를 부르심’
The Calling of St. Matthew,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누가 마태인지 의견이 분분했던 그림…
내가 느끼기에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 사람이 마태인 것 같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되는 모양이다.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은 얼른 돈을 숨기고 있고,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제각각이다.
오른쪽에서 쏟아지는 빛이 가운데 앉은 사람의 얼굴을 향해 쏟아지고 그는 ‘저를 부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고 있는 듯 하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왼쪽에서 돈을 숨기기에 급급한 사람이 안쓰럽다. 나라면 이들중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