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한스 홀바인 –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글 : 이주헌 미술 평론가

한때 바젤에서 활동했던 홀바인의 대표작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홀바인은 썩어들어가고 있는 앙상하고 싸늘한 주검을 통해 16세기 당시 부패한 카톨릭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닫힌 공간. 세상과 절연된 곳. 그 곳에 썩어져가는 육신이 외롭게 누워 있다. 마른 명태처럼, 꺾인 나무가지처럼 그렇게 버려진 육체. 시신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인간 형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쓸쓸한 이미지다.

돌을 깎아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경배도 드리는데, 청동으로 주물을 떠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아름답다고 연신 탄성을 울리는데, 주검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따뜻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얼음 같은 외면과 절벽 같은 이별만이 있을 뿐이다.

한 때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했던 화가 홀바인(1497~1543)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1521년)은 그 단절의 깊은 골을 죽은 예수를 통해 조망해 보는 작품이다.

파랗게 변색된 얼굴과 손발, 그리고 극심한 고통으로 뒤틀린 몸뚱아리. 과연 이렇게 비틀리고 짓이겨진, 썩어져가는 육체가 부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다는 것은 눈 앞의 이 냉엄한 현실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홀바인이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것은 지금 이 그림 안에 없다. 홀바인은 무엇보다 예수의 영혼을 그리고 싶었다.

주어진 소명과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깊이 자각했던 한 영혼. 그것들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 영혼. 그렇게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오히려 그의 육신은 이리도 망가지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홀바인은 그 망가진 육신을 통해 절묘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예수의 영혼을 생생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홀바인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유럽은 바야흐로 종교개혁의 열기에 휩싸여들었다.

역사가들이 당시 교황들에게 ‘패륜아’니 ‘탕아’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 것을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가 상당한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맞섰던 교황 레오 10세에 대해 한 카톨릭 역사가는 “사도 시대에 살았더라면 교회당의 문지기로도 적합하지 않았을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렇듯 세속화되고 권력과 돈에만 혈안이 돼 있던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들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에라스무스는 교황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

홀바인이 이렇게 남루하고 비참한 그리스도를 그린 데는 바로 화려한 보물과 예술, 기름진 음식에 취해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또한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에라스무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홀바인은 스위스 바젤로 이주해오면서 미코니우스라는 한 인문주의자로부터 형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배웠다.

작가로서의 명성이 쌓이면서는 당시 바젤에 와서 살던 에라스무스와 직접 교분을 쌓는 한편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의 예술에서 늘 꼿꼿한 인문주의자의 격조가 느껴지는 이유이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은 그러나 에라스무스나 홀바인이 기대한 세상을 그 당대에는 만나보지 못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끝내 유혈충돌로 이어졌고 양측의 불관용은 16세기 중반 이후 한 세기 동안 피비린내나는 폭력과 종교전쟁을 야기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는 양자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왕이나 제후의 절대권력 아래 있지 않고 독립적이었던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특히 급진주의가 세를 얻었다.

바젤도 폭력적 상황을 겪었고 이를 피해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한 에라스무스는 당시 홀바인이 그린 그의 초상화에도 나타나듯 매우 지쳐 있었다.

예수는 이 시기의 유럽을 위해 아마도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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