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씀으로 인해서 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스스로 더 겸손하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참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저의 교만함 때문이라면 저는 글을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 내가 드러난다면 어떡하나? 어쩔 수 없이 내가 드러나고 만다면, 위대한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도, 유명한 저술가가 되어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지 않다’였습니다. 성경은 너의 이름이 알려지고 네 행위가 드러난다면 하늘에서 상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지 못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어떠냐를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기 원해서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것은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한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이 드러난다 해도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하는 행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언제나 고민과 근심거리였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원래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야 가능한 것이므로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부족한 듯 보여주는 것은 가식적인 것 아닌가? 겸손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들을 인정하고 개발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답변을 줍니다. 그러면 성경은 겸손이 과연 어떤 것이라 하고 있는지,  ‘겸손’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빌립보서 2장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이 말씀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쉽지 않습니다. 만약 문자그대로 우리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과 달란트들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도 불가능해 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야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라고 했을 때는 그럴만한 상황이 전제된 것입니다. 권면, 위로, 교제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토론이나 회의 같은 것이 그런 상황에 포함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 생각도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만 돌아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라기 보다는 남의 의견을 자기 의견만큼이나 존중해야한다는 의미를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합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비슷하게 겸손을 서로 용납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2-3)

 성령께서 무엇을 하나되게 하셨습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자기들만 언약의 백성들로 생각하고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을 가지고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나는 선택받은 민족이어서 구원을 받지만 너는 이방인이니까 안돼’ 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처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존중해 주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지 결코 자기를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은 자기 비하와 같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실제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겸손이라 여길 때가 많지만 성경은 그런 겸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겸손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좀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5)

 마태복음 기자는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나귀의 새끼를 탄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이 위치에 걸맞은 대접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비하와 다릅니다.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나는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못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겸손이겠습니까? 정말 겸손한 왕은 어떤 왕입니까? ‘나는 왕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백성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좌에만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너희는 청함을 받을 때에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눅 14:7-11) 왕이 자기를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지혜롭게 비교해서 우월한 것은 우월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남들보다 좋은 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더 높은 자리를 취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결코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음 말씀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 – 겸손한 자 -를 세리에 비유하셨고, 자기를 높이는 자 – 교만한 자 -를 바리새인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로는 자기를 냉철하게 판단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이 교만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티끌과 같은 자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도저히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로울 수도 있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더 의롭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무겁습니까? 지구에 모래를 하나 더한 것이 무겁습니까? 우습지요.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덜 지었다고 스스로 여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하여 집니다.
 저는 음란한 죄가 참 떨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레미야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마음을 새롭게 먹고 음란한 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사단아 물러가라’를 외치고 음란한 것들은 생각지도 않으며 한 두어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참 평안했고 기쁨이 넘쳤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만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음란한 죄 안 짓는 새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이런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무렵 다시 또 같은 죄를 범해버리고 만 나를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나의 교만했음을 질책하며 통회하였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의 그 교만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게 되고 남들보다 죄를 덜 짓는다고 여기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을 의롭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한 교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혹시 자기를 하나님보다 낮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요 5:18)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는 세상 율법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는 의미입니다. (갈 4:1-7)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분명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겸손과 자기비하의 딜레마의 해답을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셨지만 그와 같은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하려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까의 왕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나는 왕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왕으로 되기에 더 훌륭해’ 이것이 아니라, ‘나는 분명 왕이야, 하지만 백성들보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 입고 지낼 수는 없다.’ 참으로 예수님의 겸손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 다른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막 10:45)
 어떤 선교사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에서 선교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건강한 사람이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문둥병을 달라고 기도했고, 그 결과로 지독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문둥병으로 인해서 그 곳의 많은 문둥병자들이 감동되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그 예수님의

겸손을 품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2-13)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제가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서 인류에 큰 공헌을 할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시다. 만약 저하고 세상에 별로 쓸모 없어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날고 있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사고로 고장나고 탈출할 낙하산이 하나 뿐이라면 나는 과연 그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인류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세계의 발전이나 모든 것을 위해서 내가 살아남는 것이 더 올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리주의적인 발상일 뿐이지 성경적인 생각에는 어긋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훌륭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이고 어차피 부활하실 것이고, 또 인류의 생명은 수십 억도 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수 억 마리의 개미 생명보다 귀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모두의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귀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같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기꺼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비전을 품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나도 한국 교회를 변화시킬만한 큰 영적 지도자가 되고 싶다.’, ‘수많은 훌륭한 책들을 남겨서 다른 사람에게 도전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고 싶다.’ 등등 큰 뜻을 가져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너는 평생 너희 동생 병간호나 하고 살아

라’ 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 제가 평생 동생 간호하며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큰 뜻을 가지는 것이 결코 잘못된 생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일에 소홀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일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큰 교회에서 훌륭한 목사가 되어 교계에 큰 업적을 남기겠다는 뜻을 품기도 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조그마한 교회가 없는 촌락에 들어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일생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더 작은 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더 크고 훌륭한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겸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요나단의 겸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나단은 참으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나단을 생각할 때에 그는 다윗의 친구, 다윗을 도와준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만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마음만 먹으면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쩌면 왕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6-17)

 요나단은 자신의 적으로 여길 수도 있었던 다윗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다음 왕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요나단의 입장이었다면 ‘내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저 다윗의 다음이 되어야 한다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스스로 다윗을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면 혹시나, 하면서 못 본체 놔두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면 잘못은 사울에게 돌아가지만 나는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가 자신을 다윗 다음으로 여긴 것은 대단한 겸손에서 나온 행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큰 비전을 가지기를 원하며 왕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가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겸손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또 다른 겸손을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은 남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처음에 겸손을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옳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들을 자신이 꼭 해야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의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해서, 내가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충분한 왕이 될 자격이 있었지만 다윗을 대신 세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주여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4-15)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따라서 자신이 하던 일들을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워 맡게 하였습니다.(출 18:13-26)
 마찬가지로 겸손은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는 것이지만 내가 자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한

다는 것도 아닙니다. 가끔 나에게 벅차게 느껴지는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자질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을 교만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스스로 자기가 백성들을 이끌어 낼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능력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냉철하게 판단해낸 결과와 자신이 어떤 일을 감당하여야 하는가와는 절대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대체로는 맞지만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제 겸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더 살펴봅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베드로 전서에서는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훌륭한 따르는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항상 리더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따르는 자의 위치에 서기를 싫어합니다.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하시면 제일 은혜를 못받는 사람이 그 말씀을 듣는 다른 목사님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시고 그 제자를 가르치신 뒤에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leadership보다도 먼저 followship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제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의미의 겸손을 살펴봅시다.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잠 6:3)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라는 말씀에서 겸손은 어떤 단어로 바꿔 쓸 수 있을까요? 공손일 것입니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모습. 이것이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의 있게 대하는 것도 겸손의 의미에 포함됩니다. 또 겸손은 어떤 모습입니까? 겸손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스바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성경이 겸손은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쓰면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로 쓸 수 있습니다.
 
 1. 겸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2. 겸손은 자기를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낮추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할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일을 해야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3. 겸손은 자신의 위치에서 받을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4.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의롭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5. 겸손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서 자기 보다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6. 겸손은 작은 일에 충성하며 큰 일만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7. 겸손은 leader의 위치에만 서려는 것이 아니라 follower의 위치에서 권위에 순복할 줄 아는 것입니다.
 8. 겸손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9. 겸손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한 자들에게 여러 복을 주십니다.

 1.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벧전 5:6)
 2.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시 10:17)
 3.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십니다.(시 147:6)
 4.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잠 3:34)
 5.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잠 29:23)

 사람이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 죄가 바로 교만과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교만과의 싸움은 일평생 계속되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겸손하여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교만한 순간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냐고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첫째로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그 때 어거스틴은 ‘겸손은 교만의 반대다. 가장 큰 교만은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여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도 끝까지 겸손하기 위해서 자신을 항상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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