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인생은 우선 하나의 과업으로서 나타난다. 즉 이것을 유지하고 생계를 이어하는 과업이다. 이것이 해결되면 얻어진 것이 일종의 무거운 짐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 손에 넣은 것을 처분하고 처리한다는 제2의 과업이 출현한다. 즉 생활이 안정되면 잠복하고 있던 권태라는 것이 찾아오는데, 이것을 내쫓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인생의 제1의 과제는 그것을 손안에 넣으면 곧 그것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
인간세계 전체를 돌아보면 도처에서 보여지는 것이 한숨돌릴 사이도 없는 생존경쟁이다. 즉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위험과 재난에 대항하여 전심전력을 모아 살아가려는 맹렬한 격투의 모습이다. 그런 다음 모든 악전고투가 의도한 바이 보상, 즉 생존이나 생활을 관찰하여 보면 가끔 고통이 사라진 때가 발견되지만, 그것은 곧 권태의 습격을 받는 바가 되어 새로운 곤궁 때문에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곤궁의 바로 뒤에 권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 동물도 좀 영리한 놈은 권태의 습격을 받는다. — 이것은 인생이 어떤 진실이나 깨끗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욕구와 환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귀결이다. 이 움직임이 멈추어 버리면 곧 생존의 따분함과 공허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인간 생존이 일종의 착오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고찰에서 명백해진다.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지만, 그 욕망을 만족시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 만족에 의해 주어지는 대가란 고작해야 고통이 사라진 상태에 불과하며, 또한 고통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곧 권태의 포로가 된다. 이 권태야말로 생존 그 자체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권태란 생존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과 생존이 그것을 갈망하여마지않는 생명이 그 자신 속에 적극적인 가치와 실재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권태란 생길리 없고 단순한 생존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노력하게 하고 만족하게 함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틑 분투노력하고 있거나 순수하게 지적인 일을하고 있을 때에만 우리의 생존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땀흘리며 노력하고 있을 때에는 거리와 장애가 그 목적을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 이환영은 목표에 도달하면 없어져 버린다. – 순수히 지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인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극장 좌석에 있는 관객처럼 인생을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향락까지도 끊임없이 지향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해 버리면 곧 소멸하여 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추궇는 것이든 지적인 집념이든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느 쪽에도 몰두하지 않고 생존 그 자체로부터 물리침을 받을 때 우리는 생존의 무내용과 허무함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즉 권태로움인 것이다. 우리 마음에 기적적이고 이상한 것을 찾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 있는 것까지도 사물의 결과가 너문자 권태로워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권력자들의 장신구나 연회장에서 ㅂ로 수 잇는 호화찬란함도 결국은 우리 생존의 본질적인 비참을 모면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일 뿐이다. 왜냐하면 많은 촛불에 반짝이는 보석, 진주, 깃털, 장식, 진홍색 빌로드, 무회와 곡예사, 가면 행렬 등은 밝은 빛 속에서 보았을 경우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내가 생각은 했지만 언어화되기 힘들었던 내용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썼을까? 그래서 내가 책을 읽는게지. 나는 이전에는 죄된 자아의 비참함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갈망에서 죽음을 동경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권태로움에 대한 해방에서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의 상태는 확실히 신앙적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신앙의 길을 저버린 것은 아냐
나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거야
그래 나에게 사춘기가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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