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언젠가 한번 내가 내 생활의 무의미함을 격렬히 한탄했을 때 했던 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 생각으로는 삶의 의의를 묻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알 수 없고 그것을 한 번도 묻지 않은 사람은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여자는 이 말을 괭이를 가지고 놀면서 별로 깊이 생각도 안 해보고 그저 예사롭게 말했다. 그 당시 그 여자는 매우 불행했었다. 그것은 그 여자가 두 번째 아이를 배고 가스 자살을 시도한 것을 내가 끌어내준 시대였다. 그 여자는 분명히 생명을 내던졌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받아들였던 순간에 이미 그 여자는 생의 의의를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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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루이제 린저, ‘생의 한 가운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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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로운 삶을 갈망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만 나 스스로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삶에 얽메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만 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은 사람을 보고 어리숙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리숙함에 대해 때로 동경한다. 그런 어리숙함이 어쩌면 스스로에게 더 정직한 것일 수 있으니까. 분위기 파악 못하는 말투, 어색한 옷차림, 유행에 뒤쳐진 헤어스타일, 눈치없는 행동…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때론 자유의 본보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사회적인 성공을 전혀 동경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를 동경한다. 하지만 내 주변에 같은 의식을 가진 사람을 나는 많이 보지 못하였다. 기껏 나는 소설 속 ‘깊은 강’ 에 나왔던 아쏘나 그를 찾아 인도로 갔던 미쓰코 속에서 그런 정신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 강에 가고 싶어졌다. 인도의 갠지스, 모든 것이 포용되는 강. 무한한 자유의 강.
나는 평범한 삶을 사랑한다. 다만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삶, 내 자신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삶 나는 그런 삶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퍽이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속박투성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느끼는 자유에 비례한 것이므로 우리는 자기자신에게 그리고 동시에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오늘도 자고 일어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나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로 나의 삶의 일부분을 살았다. 나는 1/365 살을 먹었다. 나는 7시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여 간단한 사무를 처리하고, 몇 개 기업의 사업보고서를 읽었으며, 신문 두 개를 정독하고, 반기 실적을 분석하고, 탐방 일자를 잡았고, 몇몇 기업 IR 담당자들과 통화하였으며, 두 잔의 인스턴트 커피, 고객의 계약서 검토, 잠깐의 회의, 생선구이로 식사를 하고, 몇건의 문자를 보냈으며, 얼마의 돈을 이체하고, 은행에 돈을 넣고 뺐으며, 지하철에서 루이제 린저의 책을 읽었고, 광화문에서 몇 곡의 재즈 연주를 들었고, 지나가다 길을 묻는 외국인을 만났으며 몇몇 사람들을 만나 식사와 까페라떼 한 잔을 마셨다.
이토록 평범한 하루가 지났다.
같은 책을 일고 다른이의 감상을 알려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참 모든게 정리가 잘되어 있네요. 감탄.
소수지만 깊이, 힘들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느끼며 살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왠지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may peace be with you.
반갑습니다~ 저도 댓글 덕분에 같은 위안을 느낍니다^^
다른 시간대 다른 공간에서도
남겨주신 흔적을 통해 위안을 얻고갑니다
외로운 고민이 아니었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