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1,12,13장

열왕기상 11장 솔로몬의 수많은 이방여인들과 그들의 신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마음… 하나님에게 선택받고 또 그분이 인정해주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솔로몬만큼 하나님께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그 또한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하신 결정은 단호했다. 그 나라를 빼앗아 솔로몬의 신복 여로보암에게 허락하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주시면서 마찬가지의 말씀을 하신다 너또한 다윗이 했던 것처럼 신실하게 행하면 내가 이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해주겠다. 그것은 여로보암에게도 마찬가지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시다. 자신의 명령과 법을 지키는 자를 기뻐하시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변질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과거의 나의 모습이 현재의 나의 모습까지 커버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지 돌아보아야할 것이다. 아 솔로몬.. 지금의 나의 모습과 어쩌면 이리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정들과 예배에 대한 강렬한 소망은 어찌 이리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만 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역사.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12장에서 그는 예루살렘이 남유다에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을 때 그들이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자기를 죽이고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결국 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벧엘과 단에서 예배드리도록 한다… 이 일은 엄청나게 큰 죄가 아닐 수 없다. 지도자가 이렇게 바르지 못하면 온 백성이 우상앞에 절하게 된다.. 리더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의 파렴치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산당들을 짓고 또,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여로보암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네가 다윗처럼 내 말을 순종하고 법을 지키면 그 왕위를 영원히 해주겠다고. 여로보암은 왜 그 말을 잊었던가. 왜 백성들이 자신을 배반하리라고 생각했나.
어쩌면 그와 같은 생각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인 르호보암이 살아있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언제나 그에게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인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르호보암을 보자. 그는 결정적인 발언 하나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그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조언들 받았다. 하나는 솔로몬의 신복들로서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이었고, 또하나는 자신의 친구들이었다. 백성들을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를 누렸다고는 했지만 그들은 많은 건축사업들로 아마도 지쳤던 모양이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기 전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41세였다고 하니 그는 솔로몬의 통치기간(40년) 대부분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또한 그의 같이 자라난 친구들의 나이도 40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조언은 너무나 몰상식했고 그 조언을 택한 르호보암의 선택도 그랬다. 이것은 납득할 수 없는 발상이다. 어떻게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도록 하셨다고 말씀한다. 결국 르호보암은 지혜롭지 못한 발언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왕위에서 쫓겨난다.
13장은 조금은 신비스런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인물이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 ‘늙은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제단 앞에서 요시야의 탄생과 그의 개혁을 예언하고 징조를 보인다. 요시야의 예언은 참으로 멋지다. 300년이후에나 태어날 요시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셨다.. 그의 삶에 대해서 기대를 품어본다. 어쨋거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그의 손이 마비되고 만다.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로 마른 손이 회복되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그가 입장을 바꾸고 하나님의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선지자를 가깝게 함으로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왔던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여로보암이나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사람이 타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오래 그곳에 머물지 말아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는 그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한다. 그는 왜 벧엘에 살았을까.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어떻게 그 장면을 보았을까. 그는 벧엘에서 제사할 때 참여한 이름뿐인 선지자엿을까. 그는 왜 선지자에게 음식을 대접했을까.
그또한 능력있는 선지자와 가까이 지내고 싶었을 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그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호의로서 안타까움에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는 왜 그의 말을 들었는가. 그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천사가 먹으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음식을 먹은 그는 저주를 받고 사자에게 물려 죽는다. 자신들의 친구의 말을 따른 르호보암, 그리고 늙은 선지자의 말을 따른 하나님의 사람, 둘은 잘못된 조언을 따랐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늙은 선지자는 슬피 울며 그의 시체를 묻어주고 자신도 이 사람 곁에 묻어달라고 말한다. 그는 선지자였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벧엘제서 제사드리는 여로보암을 바라보면서 누가 이 잘못된 일을 속시원히 바로잡아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그런 일을 하자, 자기가 그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경건을 잃어버린 한 선지자로서 현실에 만족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의도는 잘 알기 힘들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의 말을 따른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거짓 예언을 한 자는 살아남았는데, 그 예언에 속은 사람은 죽다니..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처럼 말하는 것도 잘못이겠지만, 사람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어찌되었건 여로보암은 손이 굳어버리는 일이 지난 후에도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그의 가문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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