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딕스, ‘산상수훈’


예수님은 마치 산처럼 위대해 보인다. 그 밑에 사람들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 자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마음이 온유한 자들, 핍박받는 자들에게 복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복음의 진수였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 겸손한 자들의 것이다.

그림의 구도가 특이하다. 예수님을 크고 안정되게 꽉찬 삼각형 구도로 그렸다. 배경에 흐릿한 산들을 그려넣어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고 있다. 표정은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자애롭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지나간 후에 깨닫게 되는 것……

내일을 바라볼 때는 짙은 안개속을 보는 것 같이 알 수 없지만
그 내일이 어제가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도하신다…..

우리는 인생길을 홀로 걷지 않는다……

아디아포라

2001년 7월
기독신문에 실린 송인규 교수님의 ‘아디아포라’ 글을 읽고 보낸 메일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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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30) 아디아포라

아디아포라는 문자 그대로 옮기면, ‘상관없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기원은 스토아 철학자들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신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단어에 해당하는 개념만큼은 바울 서신의 몇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든 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는 일들이 있으니, 한다고 해서 굉장할 것도 없고 또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별 문제될 것도 없는 그런 사항이 있다는 말이다(cf. 롬 14:17; 고전 6:12; 8:8; 갈 5:6).

교회 역사상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두 경우였다. 처음은 16세기 중반 독일 내 루터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때 개신교 운동은 로마가톨릭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던 차였다. 멜랑크톤과 그의 추종자들은 가톨릭과의 화평을 염두에 두고서 복음의 본질적 교훈에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한 가톨릭의 의식(ritual)과 행습(practice), 예를 들어 성자 숭배나 견진례(confirmation) 등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즉 개신교도이면서 가톨릭의 그러한 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아디아포라의 문제, 하든 말든 별 문제 될 것 없다는 입장으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맛디아스 플라시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를 필두로 한 반대파에 의해 큰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의 원수(곧 가톨릭교회)가 수행하는 의식과 행습 가운데 아디아포라라는 영역은 없다고 강력히 맞섰던 것이다.
두번째 논쟁은 17세기에 있었는데 역시 루터파 내에서 발생했다. 이 경우의 문제는 오페라, 춤, 카드 놀이 등 세상의 여흥과 관련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즉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오락 행위를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파는 이 행위를 ‘아디아포라’로 간주함으로써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자는 성경에서 명하는 바가 아닌 세상적 활동은 금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고, 후자는 성경에서 명백히 금하지 않는 바의 행위에 대해서는 ‘아디아포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디아포라를 인정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행동 가운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이 없는 그런 항목이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일견 ‘그렇다’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반응은 두 가지 근거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첫째,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낱낱이 제시하고 있지 않다. 비록 성경이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 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행을 행하도록 자격을 갖추도록(딤후3:16-17) 돕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동과 삶에 대한 시행 세칙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이 명하는 바도 아니요 금하는 바도 아닌 그런 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둘째, 우리의 삶을 보면 도덕적인 각도에서 보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그런 항목들로 가득하다. 넥타이 색깔을 색색으로 하든 단색으로 하든, 점심 식사 메뉴로 냉면을 먹든 칼국수를 먹든, 뉴스와 정보를 위해 텔레비전을 보든 신문을 읽든, 여름에 샤워를 두 번 하든 세 번하든 그 어떤 선택도 도덕적 가치와 타당성의 면에서 볼 때 서로 간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이상에 제시한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삶에 분명 아디아포라가 존재한다고 대답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이상의 견해는 실상 매우 피상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우선 어떤 사항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어야만 그것의 도덕적 적법성 여부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밝히지 않는 많은 사항들, 예를 들어 흡연, 대학 진학, ‘전도사’ 제도, 인간 복제 등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암시적인 방식이나 간접적 연관성을 통해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이라고 해서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별 상관이 없다고 결론을 짓는 것은 섣부르고 미성숙한 처사이다.
둘째,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한 맥락으로 뒤얽혀 있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경우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의 실상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인간의 행동과 결정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다른 맥락과 연관이 됨으로써 바람직한 것이든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든지 어느 한 쪽으로 판명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필자는 세 가지 종류의 맥락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적 관습이라는 맥락이다. 넥타이의 색깔이 이렇든 저렇든 상관이 없다지만 장례식에 참여할 때에는 한국 (또 미국과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그럴 텐데) 문화에서 검은색이 합당한 색깔로 정례화되어 있다. 또 한국의 문화에서는 여름에 닭을 먹든지 개를 먹든지 아무 상관이 없지만, 미국으로 장소를 바꾸면 후자의 취식(取食)은 법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로 여겨진 것도 실제적 삶의 정황에서는 문화적 관습이라는 맥락 때문에 더 이상 아디아포라가 아닌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 사랑이라는 맥락이 존재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 당시에 있었던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는 고기를 먹든지 먹지 않든지 신앙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앙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고기를 먹으면서-그 당시 모든 고기는 일단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다가 시장에 유통되었다고 한다-그리스도인이 우상의 제물에 참여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cf. 고전 8:7). 따라서 바울 사도는 고기를 먹는 것이 형제의 신앙에 해를 끼칠 경우 평생 그런 행위를 금하겠다고 결의를 표했다(고전 8:13). 따라서 고기를 먹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는 결코 아디아포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셋째, 지도자의 모범이라는 맥락이 있다. 이 맥락은 두 번째 것과 긴밀히 연관이 되지만, 지도력이라는 요인에 좀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형성된 바이다. 그리스도인이 즐길 수 있는 오락이나 취미 생활의 항목들, 예를 들어 당구, 바둑, 카드, 골프 같은 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아디아포라로 간주된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는 일반 그리스도인에 대한 모범 때문에 이런 항목들에 대해 스스로 절제를 발휘해야 한다. (적어도 현재의 한국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다.) 이것은 이런 활동 자체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일반 그리스도인들 못잖게 이런 활동을 즐길 경우 그들은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들의 존재는 실상 아디아포라가 존재할 틈을 배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인간적 차원의 맥락 (문화적 관습, 이웃 사랑, 지도자적 모범)을 찾지 못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아디아포라에 대해서는 부정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만물에 대한 신적 판단에 의하건대 아디아포라 사상은 맞지 않는다. 성경은 만물의 근본적인 가치를 선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선했다(창1:31;딤전 4:4). 만물은 그 자체로서-한글 개역판에는 “스스로”라고 번역됨-속된 (더러운/부정한) 것이 없다(롬14:14, 20). 만물과 관련한 악이나 죄는 만물의 본질 자체보다도 만물이 사용되는 방향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단·세상·옛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한 만물은 선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아디아포라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은 아디아포라라는 제3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만상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크고 작은 일-인간의 구원에서부터(엡1:5, 11) 참새 한 마리의 죽음(마10:29)에 이르기까지-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만사를 자신의 주권적 의지-이것은 일차적으로 “작정”(decree)과 “섭리”라는 개념 가운데 나타나는데-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 가운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윤리적 공간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아디아포라가 인간의 일견적(prima facie) 인식에 의거해서는 혹시 가능할지 몰라도, 존재론적인 각도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아디아포라를 부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필자는 자율주의(automomianism)를 배척했다. 그리스도인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 것이지, 언제라도 그 법을 초월하든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예속주의(hyponomianism)의 희생물도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 모든 세부 사항에까지 연관되고 인간의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에 의거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신적 꼭두각시’로 환원시켜서는 안된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비록 그 자유 의지가 타락과 더불어 손상을 입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회복되었다. 즉 우리는 참된 자유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숙명의 착고에 예속되어 아무런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는 고등 지능의 로봇들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환각이 아닌 사실이며, 우리의 선택은 결정론적 유희가 아닌 진정한 선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다(갈5:1). 우리는 이 자유 가운데 모든 것이 가하다(고전6:12; 10:23). 한편으로 우리는 이 자유를 이용하여 육체의 기회로도 삼을 수 있고(갈5:13),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갈5:16) 사랑의 종노릇(갈5:13; cf. 고전10:23-24)을 추구할 수도 있다. 비록 우리에게 아디아포라는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갈5:1, 13).
송인규 박사senio@netsgo.com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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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송인규 박사님께 메일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가슴이 떨리는 일입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4학년 재학중이고요. 영동중앙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 대학부 홈페이지에 저희 대학부 이진영강도사님께서

박사님의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30) 아디아포라’ 라는 글을 올리셔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습니다.

글을 읽고 박사님께 여쭙고자 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 밑에 있던 메일 주소로 글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감히 제가 이런 글을 드려도 되는지 걱정도 되지만 박사님께 그저 제가 들었던 느낌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디 좋게 보아주셨으면 ^^

박사님의 글을 먼저 인용하겠습니다.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한 맥락으로 뒤얽혀 있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경우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의 실상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인간의 행동과 결정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다른 맥락과 연관이 됨으로써 바람직한 것이든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든지 어느 한 쪽으로 판명이 나게 마련이다. ‘

박사님께서는 ‘아디아포라’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행동 가운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이 없는 그런 항목’

의 의미로 사용하셨고, 결론적으로 그러한 아디아포라의 영역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5, 8)

라고 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이 구절이 아디아포라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주를 위하여’라는 것이라면, 우리의 결론에 다양성이 있을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이 명쾌하게 제시하는 삶의 선택의 영역이 아닌, 성경에서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 여러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행동가운데서 각기 자기 마음에 정하여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본문입니다

‘첫째, 만물에 대한 신적 판단에 의하건대 아디아포라 사상은 맞지 않는다. 성경은 만물의 근본적인 가치를 선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선했다(창1:31;딤전 4:4). 만물은 그 자체로서-한글 개역판에는 “스스로”라고 번역됨-속된 (더러운/부정한) 것이 없다(롬14:14, 20). 만물과 관련한 악이나 죄는 만물의 본질 자체보다도 만물이 사용되는 방향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단·세상·옛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한 만물은 선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아디아포라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은 아디아포라라는 제3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만상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크고 작은 일-인간의 구원에서부터(엡1:5, 11) 참새 한 마리의 죽음(마10:29)에 이르기까지-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만사를 자신의 주권적 의지-이것은 일차적으로 “작정”(decree)과 “섭리”라는 개념 가운데 나타나는데-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 가운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윤리적 공간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

박사님께서 본질적으로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로 제시하신 두 가지 근거입니다.
첫번째 근거에 대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디아포라라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이 선하다고 하는 것이 모든 행위가 선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 만큼, 행위의 영역에 까지 확대해석할 수 있는 본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이 선하다고 해도 행위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을수도 있다라는 것에 대해 충분한 답변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근거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선한 행위만 있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악한 행위만 있을 수 있도록 행하신다는 것입니까? 첫번째 질문의 답이 긍정이 아니라면 두번째로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한 행위만으로도, 악한행위 만으로도 채우시지 않는다면, 아디아포라의 영역을 제외하고 하실지 않으실지도 마찬가지로 대답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 모든 만상을 포함한다는 전제가 아디아포라의 영역의 허용가능성의 배재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께서 글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셨던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없다고 하는 결론이 혹시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내릴 수 있는 다양한 행위의 결론들을 허용하지 못하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관심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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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 형제께,

제 글을 자세히 읽고 또 의문점을 제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형제님의 질문은 세 가지로 요약이 될 듯 하군요.

1. 성경에 의하면 (cf. 롬 14:5, 8)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2. 아디아포라는 사물이 아니라 행위의 영역과 연관된 것이므로, 만물이 선하다 (창 1:31; 딤전 4:4)는 “사물론”으로부터 아디아포라를 반대하는 “행위론”을 도출할 수 없지 않은가?
3.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해서 “아디아포라”라는 중립 영역을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는 말인가?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1. 롬 14:5, 8의 해석과 아디아포라
본인이 아디아포라를 부정하는 것은 궁극적인 시각 — 나의 어떤 구체적 행위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관점 –으로부터 연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i) 일견적으로는 (prima facie), (ii) 나(우리)의 현재 인식이나 판단에 의거해서는, (iii)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여러 행위의 다양성과 가능성의 면에서는 아디아포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세 가지 사항을 뭉뚱그려 지난 번 글에서 “이론상으로는”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롬 14:5는 이렇게 “이론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론상으로는 — (i) (ii) (iii) 의 면 –으로는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깁니다. 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자에 대한 구체적 뜻과 관련해서는,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볼 때 그 당사자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것,” “죽는 것과 사는 것 가운데 어느 하나” 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바울의 다른 설명으로부터 다시금 밝혀보도록 합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 5:6; cf. 고전 7:19)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동반된 믿음만 있다면 흡사 할례든 무할례든 상관할 바 아니라 — 이 문제는 아디아포라에 속한다 –는 인상을 줍니다. 사실입니다. 사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는 할례를 받도록 했고 (행 16:3 — 디모데), 어떤 경우에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갈 2:3 — 디도). 디모데의 경우는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줄 알기”(행 16:3) 때문이었고, 디도의 경우는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 까닭” (갈 2:4) 이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와 전도 여행을 떠날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할례 받는 것이었고, 디도의 경우에는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할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디아포라로 간주된다고 주장할 지 모르지만, 특정한 순간 바울을 향한 하나님 뜻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디아포라는 없습니다.

2. 아디아포라에 대한 정의 문제
이 점은 본인의 표현이 정확치 못했음을 사과드립니다. 원래 아디아포라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이 없는 사물 및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글을 쓰면서 느닷없이 “사물”을 이야기했고, 또 후자로부터 전자를 도출했으니, 이는 분명 본인의 실수입니다.

따라서 아디아포라에 사물과 행위가 함께 포함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면 본인의 논리 전개에는 별 무리가 없습니다. 본인이 지난 번 신문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었습니다. 만일 사물 가운데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의 사용 방향이 선하든 악하든, 결과는 악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할 경우에는 그 사용 방향이 선한가 아닌가에 따라 결과의 선악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카드 놀이, 춤, 영화, 화장 등을 악하게 보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물이나 활동 자체에 악이 있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들의 본질/원형은 선한 것인데 (창 1:31; 딤전 4:4)인데, 잘못된 방향이 끼어들어서 악한 일이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 사물의 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있어서 —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선과 악의 중립 영역이 배제되는)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3.하나님 주권 신앙과 아디아포라의 양립성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원 전 작정은 피조계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모든 일 (엡 1:11)이라고 간단히 이야기하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선한 행동(엡 2:10), 악한 행동 (잠 16:4; 행 2:23; 4:27-28), 우발적 사건들 (창 45:8; 50:20)을 열거하기도 합니다. 또 창세 이후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은 우주 만상 (시 103:19; 단 4:35)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물리적 세계 (욥 37:5, 10; 시 104:14; 135:6; 마 5:45), 동물계 (시 104:21; 마 6:26; 10:29), 국가들의 일 (욥 12:33; 시 22:28; 시 66:7; 행 17:26), 인간의 출생과 삶의 운명 (삼상 16:1; 시 139:16; 갈 1:15-16) 등 모든 것을 총망라합니다. 심지어는 우연처럼 보이는 작은 일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잠 16:33; 마 10:30).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i) 절대 주권론: 이 세상의 만사 — 인간의 행위 포함 –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고, 이것은 세부 사항에까지 미친다. (ii) 상대 주권론: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기는 하되 인간의 세부 행동까지 주권이 미치지는 않고, 하나님도 개입하시지 않는 윤리적 공간 — 인간 편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이 존재한다. (iii) 주권 이양론: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며 함께 우주와 미래를 만들어 가는 관계이다. 첫 번째 입장은 전통적인 Reformed 및 장로교 신학 (혹은 칼빈주의 신학)의 주장입니다. 둘째는 Arminian의 입장으로서 일반적으로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단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침례교인들은 첫째 입장과 둘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셋째는 Charles Hartshorne 등 과정 신학자들 (process theologians)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셋째 입장을 빼고서 첫째와 둘째는 모두 보수적/복음주의적 입장으로 분류됩니다.

저는 Reformed 신학을 전통으로 삼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또 제가 게재한 신문 역시 그런 전통이고 형제님의 속한 교회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신학 전통에 의거할 때 “아디아포라”라는 중립적 영역은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물론 아디아포라의 타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이가 두 번째 입장을 취하든지 아니면 첫 입장에서 두 번째 입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의 신앙 양심과 지적 확신에 따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rminian의 신학 입장이 가지는 문제점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Calvinist 입장에도 논리적인 어려움이 따릅니다. 두 가지인데 (a) 악의 책임 문제와 (b) 인간(그리스도인)의 자유 문제가 그것입니다. a는 철학적으로 해결점이 없기도 하고 지금 논의 중 문제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b와 관련하여 (i)의 입장을 취하면 인간에게 아무런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을 지금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의 설명을 정확히 하려면 우선 두 가지 종류의 자유 — 자유 의지 — 개념이 있음을 밝혀야 합니다. 하나는 자원(自願)의 자유 (freedom of spontaniety; FS)로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방해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임의(任意)의 자유(freedom of choice; FC)로서 어떤 일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 안에 있어 그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자유입니다.

FS는 FC보다 축소된 자유입니다. 그런데 FS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양립할 수 있고, 앞에서 설명한 (i) 의 입장과도 전혀 상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i) 절대 주권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자유는 존재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와 연관시킨다면, 아디아포라의 영역을 부인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가능합니다. (바로 그 점을 신문에 발표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 — 일반 철학자들과 Arminian 입장의 신학자들 –은 자유의 개념에 있어 FS 보다 FC를 내세웁니다. 만일 FC를 자유의 개념으로 채택하면 (i) 절대 주권론자들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는 셈입니다. (FS는 기껏해야 모조품 자유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서 본인은 한 가지 놀라운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비록 Calvinist에게 FS 밖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미래의 삶을 개척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무엇인지 모르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또는 개인에게 주시는 확신을 통해 구체적 사항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 한) 때문에, 죄가 아닌 여러 가능성을 판단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궁극적으로 아디아포라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 나의 인식으로는 무엇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제한적으로나마 FC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Reformed 신학자들이 명백히 의견을 밝힌 것이 적고 또 서로 간에 입장이 일치하지 않아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만일 FC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다면, 그 때에는 (i) 절대 주권론을 인정하면서도 아디아포라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i) 절대 주권론, (ii) 아디아포라의 배제, (iii) 자유의 활동 이  세 가지는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은 위에 드린 바와 같습니다.

저의 설명이 도움 되시기 바랍니다.

송인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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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아포라글과 관련하여 송인규목사님과 주고받은 두번째 메일 내용입니다.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듯하겠네요
제 시도는 아디아포라를 개인적인것과 보편적인것으로 분류하는 시도였습니다. 개인적인 아디아포라 문제는 그 존재범위가 중요할뿐 없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의견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 아디아포라가 없다고 해서 보편적 아디아포라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적용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메일 내용을 보시면 이해가 더 쉬우실 것입니다

제가 보낸두번째 메일 전문과 목사님의 답변을 그대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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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목사님께
먼저 변변치 못한 질문에 자세하고 세심하게 배려해주시고 답변해주신 것에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글을 곰곰히 읽고 생각하면서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을 얻게 되었지만
아직도 조금은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 번거스러우실것을 예상하면서도 이렇게 또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목사님께 대한 존경심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보내는 것이라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제 질문을 3가지로 요약해주셨고 그에 따라 답변해주셨는데, 저도 그 순서에 따라서
다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 드렸던 질문에 대하여

목사님께서는 ‘본인이 아디아포라를 부정하는 것은 궁극적인 시각 — 나의 어떤 구체적 행위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관점 –으로부터 연유한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답변에서 말씀하신 ‘아디아포라’의 의미는 개인(자기 자신)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문제로 한정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아디아포라’의 의미를 ‘개인적인 행위에서의 아디아포라 (이하 개인적 아디아포라)’와 ‘보편적인 행위에서의 아디아포라(이하 보편적 아디아포라)’ 로 나누어 생각해보았습니다(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 아디아포라라고 함은 개인이. 어떤 개별적 상황에서 옳고 그른 행위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고
보편적 아디아포라라고 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행위규범으로서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님께서 주신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목사님께서 ‘개인적 아디아포라는 없다’ 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할례문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성경에 할례나 무할례나 상관이 없지만 어떤 경우인지에 따라 할례가 하나님의 뜻이고 무할례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답변에 ‘“이론상”으로는 할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디아포라로 간주된다고 주장할 지 모르지만, 특정한 순간 바울을 향한 하나님 뜻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디아포라는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를 제가 생각할 때에 이론상 아디아포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은 개인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말할 수 없기 때문으로 ‘개인적 아디아포라’는 존재하지 않지만 ‘보편적 아디아포라’는 존재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 목사님께서는 제가 구분한 ‘개인적 아디아포라’ 와 ‘보편적 아디아포라’ 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보시는지요?

2. 만일 개인적 아디아포라도 없고 보편적 아디아포라도 없다면 롬 14:5-8의 해석과 할례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각기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했고 (보편적인 규범은 이야기 할 수 없다의 식으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보편적 아디아포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로마서를 통해서 드렸던 질문은 ‘보편적 아디아포라’의 존재가능성을 여쭌 것이었으나, 목사님의 답변은 ‘개인적 아디아포라는 없다’ 의 설명이 주가 되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 아디아포라의 존재와 보편적 아디아포라의 존재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3. 만일 개인적 아디아포라는 없으나 보편적 아디아포라는 있다면 글의 서론부분에서 말씀하신

가톨릭의 의식(ritual)과 행습(practice), 예를 들어 성자 숭배나 견진례(confirmation) 등의 문제
17세기의 오페라, 춤, 카드 놀이 등 세상의 여흥과 관련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

에 대해서 교회가 ‘그것은 아디아포라’이다 라고 결정을 짓는다고 해도 보편적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을까요.

다시말해 교회가 ‘이것은 안된다’ 라고 못박지 않고 ‘아디아포라이다’ 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그것을 적용함에 있어서 특별한 상황에 맞게 결정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에서 아디아포라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것 아닌지요.

저는 목사님께서 처음 글의 결론으로서 ‘아디아포라는 없다’라고 하신 것이 ‘보편적 아디아포라’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개인적 아디아포라는 과연 없는 것일까요?
목사님께서 아디아포라가 없다고 하신 근거로 두가지를 설명해주셨습니다.

‘1. 어떤 사항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어야만 그것의 도덕적 적법성 여부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2.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한 맥락으로 뒤얽혀 있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경우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의 실상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인간의 행동과 결정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다른 맥락과 연관이 됨으로써 바람직한 것이든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든지 어느 한 쪽으로 판명이 나게 마련이다.(문화적 관습, 이웃사랑, 지도자의 모범)’

그러나 ‘아디아포라가 없다(개인적 아디아포라)’는 명제가 증명이 되려면 개인적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아무리 예를 많이 든다고 해도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 검은 까마귀 백만마리를 동원한다고해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흰까마귀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개인이 살면서 결정하는 모든 결정들이 목사님의 말씀하신 범주에 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넥타이 색의 예를 드시면서 장례식장에는 검은 색이 문화적으로 옳다 하셨지만, 보통때는 상관 없을 때가 더 많은듯 합니다. 장례식 갈 때 넥타이 색의 옳은 색이 정해져 있다고 한들 우리가 살면서 넥타이 색이 무슨 색인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듯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결정을 내릴 때 좀더 신중하고 ‘성경의 간접적 맥락, 문화적관습, 이웃사랑, 지도자적 모범’ 등의 기준에 따라 그 아디아포라 밖의 영역을 늘려나갈 필요성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결정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우므로 아디아포라의 영역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두번째 답변에 대하여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제가 드린 두번째 세번째 질문의 의도는
목사님께서 드신 두가지 근거(모든 사물의 선함, 하나님의 주권)를 통해 아디아포라는 없다는 결론이 꼭 나오는지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아디아포라에 사물과 행위가 함께 포함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면 본인의 논리 전개에는 별 무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다시 드려야 할 듯 합니다.
아디아포라를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모두 선한 것’이라고 본다면
딤전 4:4 절의 말씀이 아디아포라의 존재가능성을 배제한다고 꼭 말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딤전말씀이 특별히 음식 문제를 가지고 논하는 만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음식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모두 선하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아디아포라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본문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의 모든 실과를 주셨으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그 동산안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다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께는 선한 것이 되며 이것은 아디아포라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세번째 답변에 대하여

목사님께서는 세번째 질문의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신앙과 아디아포라는 양립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해주신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주권신앙과 아디아포라의 양립가능성에 대해서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드렸던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이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허용할 수 없는가? 라는 것으로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권 신앙으로부터 어떻게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유추해낼 수(증명해낼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명제의 양립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한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유추해 내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제가 목사님의 답변의 의도를 잘못파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질문이 적절한 것인지 조금은 부담이 되고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만 존경하는 송인규목사님께 이렇게 메일을 드리고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너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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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 형제께,

제가 수양회에 다녀오고 주말의 책임들이 몰려 있어서 답장을 즉각
하지 못했군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신은 이번으
로 마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지난 번 답변 내용에 제 생
각이 다 표현되어 있어서 결국 그것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해 더 세부적인 사항으로 나가는 것이 크게 유익
할 것 같지 않다고 여겨지기(물론 순전히 이론 캐기(ratiocinative)
의 측면에서 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또 종종 필요할 때가 있지만 이
경우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
가 해결해야 할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많아, 도저히 이 문제만 붙
잡고 있을 실정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형제께서 의문을 제기한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반응하고자 합니다. 첫째, 아디아포라를 개인적 아디아포라와 보편
적 아디아포라로 나누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구분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특히 보편적 아디아포라의 개념에 대해서는 더욱 찬성을
하기가 힘듭니다. 모든 행위는 결국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비
추어 보아야 하는 만큼, 불필요한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입니다.

둘째, 아디아포라가 없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
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인식론적 level에서의 고찰은 단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교육적 도구일 따름입니다. 인식론적 level에서의
설명이 모든 문제를 cover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존재론적 level에서는 어느 누구의 행위라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딤전 4:4에 대한 해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물 자체
를 본질적으로 악하게 본 이들에 대항해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이
선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각자의 행위가 항시 모든 것을
먹든 말든 상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 역시 하나님의 주권
적 섭리에 의거해서 — 둘째 사항에서 밝혔듯 — 말할 수 있습니
다.

넷째, 하나님의 주권 신앙과 아디아포라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본인의 핵심 주장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존재론적으
로 하나님의 주권 신앙과 아디아포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자유조차 없다는 식으로 될
까봐 미리 예방 설명을 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자세히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Arminian과 Calvinist의 차이입니다 (형제에게 이
해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Calvinist의 입장에서 볼 때 아디아
포라는 없습니다. 물론 Calvinist의 입장 자체에 반기를 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는 한 아디아포라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제 입장에 대해 형제께서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
러나 제 편에서 또 답변을 시도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것은 형제의
질문을 평가절하하든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정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동안의 argument 좋았습니다. 또 제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이켜 보는 유익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형제의 신앙과 이
론적 분석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쓰이기를 기원합니
다.

송인규 드림

일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 아닌

집이 가난해 공부못한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려고 항상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일등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암투병중에 돌아가신 저의 스승이신 “이동우 교수님” 께서..
앞당겨 정년퇴직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일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 아닌 이등, 삼등, 꼴등… 모두 기억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 (후략)

어느 인터넷 홈페이지에 있는 PROFILE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일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지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해지거나 어떤 직위에 오르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만일 그 말에 동의하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됨의 기초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 성공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은 가치없는 인생이 되고, 1%, 아니 0.1%의 성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 99.9%의 실패한 인생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대다수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 가치없는 인생이라고 낙인찍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을 분별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섬기는 사회, 모든 인생이 성공하고 자기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사회, 우리 사회에 그런 가치관이 심겨질 때 이 사회가 진정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치있으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하잘 것 없는 인생의 모습에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로서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그러한 진정한 가치들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치있습니다.

결혼의 의미와 배우자의 결정

결혼은,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떠나 성경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따라서 결혼은 신성한 가치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드러내야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자기가 해야할 의무이지 상대방에게 권리를 주장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기 때문일 수 없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이유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배우자를 선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준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을, 현대에도 말 그대로 적용해야할 성질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 신앙의 조건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사랑도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성경에 분명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범했을 때(말하자면 간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이 돌아오기를 바랬던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한다는 말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보통은 이성적인 끌림을 말하는 것이다.(필로스적 의미라고 해야할까) 이 말이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아무하고나 결혼해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아가페)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은 배우자 선택에 관해서 신자와 결혼하라는 것 이외에 어떤 조건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일 성경에서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면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잘못이 될 것이다. 그것은, 외모, 학력, 성격, 어떤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떤 모범적인 예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독신이셨고, 바울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배우자를 고르는 고민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여야 할까? 어떻게 선을 행하고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과 ‘누구와 결혼하여야 할까?’ 라는 고민의 질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앞의 고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고민이라면 뒤의 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의 고민일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하면 되며, 그것은 인생의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의 결정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단한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에 관심은 더 중요한 것들에 쏠려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배우자를 결정할 때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 문제는 인생에서의 부수적인 문제이지, 핵심은 믿음, 예배, 사랑, 선행, 겸손, 섬김 등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선배들의 조언에 의지하는게 최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배우자 선정에 관해 많은 조건들을 제시한다. 외모로 결정하면 안된다. 사랑이 최우선이다. 조건이 비슷해야한다. 배우자의 가정환경이 중요하다. 남자에게 재력이 중요하다. 여성은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한다. 장남이면 어떻다. 독자면 어떻다.. 중매는 어떻고 연애는 어떻다. 나이는 언제가 좋다.. 등등 굉장히 많다.

그러나 심각한 고민 끝에 나는 일단은 이렇게 결정지었다.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고르던 간에 인간적인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자 하는 것은 예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떠어떠한 기준에 따라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짓는다면 그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결혼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정짓는 것과 다를바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그 기준으로 사랑은 내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는 의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아무 조건이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된다.. 는 말이 되고… 어떤 조건을 붙힌다면… 처름 누구누구와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보시길..)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내린다.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과 결혼하려는 마음은, –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다들 기분나쁘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솔직한 내 결론을 말하면, –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앙. 만은 예외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옷을 입으면 더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나쁘거나 죄가 아닌 것처럼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하는 이기심이 나쁘거나 죄, 헛된 정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정욕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고 다른 사람과 싸우려는 그런 성격의 정욕을 말한다.)

은현이가 질문한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 남자와의 결혼은 성경적으로만 말한다면 아무런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다. 결혼 후에 변함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느냐가 성경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그것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자 않는다.

그러나 경험상의 문제는 제시할 수 있다. 지금까리 그런식으로 결혼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혼에 있어서 사랑과 순종을 실천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들이 따르는지, 미리 검토해 볼 수 있다. 어떤 일의 결과를 예상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하신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한 잘못이다. 부부간의 사랑과 순종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를 때 버려야 할 것들을 미리 생각치 않고 따른다고 했다가 나중에 포기하는 것이 잘못이라 말씀하신 그 말씀을 간접적으로마나 적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에 부딪히게 된다면 최소한으로 결혼후에 겪게 될 어려움들에게 대해서 많은 사례들을 검토함으로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은 신성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사랑과 섬김 신뢰가 지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러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할 때 우리가 검토해야할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다. 나와 그 배우자 서로가 영원히 사랑하고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으로서 한 가정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조건들은 각자 나름대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 이런 환경이라면 자신 없다는 등으로…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을 내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조건 정도의 사람이어야지만,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있는 사람으로서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예를 든다면 이 말의 의미는 보다 정확하게 전달되어 진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정확히 번역하면.. 간음의 소지가 다분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불합리한 결혼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아내를 향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조건의 아내와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그의 자질을 염두에 두신 것임에 분명하다. 호세아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떤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느냐가 문제의 촛점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순종, 섬김을 실현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느냐가 문제의 촛점인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결혼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며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조건을 달아야한다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하고나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사랑과 순종)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배우자 결정에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 이렇게 질문하여야 한다. 나는 과연 이 사람과 결혼했을 때 하나님의 뜻인 사랑, 섬김으로 이 사람과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지혜있게 조언을 듣고 결혼 후의 어려움들을 검토하고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냉철함으로 그 배우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본 후에 결정내린 것이라면 능력있는 여자와 백수남자라고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