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온몸으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고 있다.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어느 시대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 못한 동시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화란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렘브란트 이래로 가장 위대하고, 혁명적인 화란의 화가”라고 불리어졌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6년 동안에 그린 1,500개나 되는 작품 가운데서 단 한 개의 작품을 팔았을 뿐이다. 만약에 그가 좀더 많은 작품을 팔 수 있었다면 그는 좀 더 확고한 사상과 더 좋은 인식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아마도 그가 질병과 절망으로 인하여 37세의 젊은 나이에 자멸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 고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 매우 동정적이었다. 이는 자기를 고통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두어 생각하는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벨기에의 Borinage의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같이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

그가 체험한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88년부터였다. 그의 형 데오는 인상적인 화법으로 자기 메시지를 전하도록 그를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사마리아 사람이 과연 선한 이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말에 태워서 주막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사람이 상자 속에 있던 귀한 물건들은 다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자기 생명만은 구할 수 있었다.

이 그림에 여리고로 가는 구부러진 길에 저마다 따로 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인다. 고흐는 그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얼마나 경건을 가장하고 있는지 이 그림에서 잘 보여주었다.

반 고흐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또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해 보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의 선한 이웃들도 개인적으로 혹은 여러 기관을 통하여, 사악한 사람들에게 매맞고 도적 맞은 사람들과 이기적이고 무관심한사람들에 멸시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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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맣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친구를, 아내를, 무엇이든 네가 좋아하는 것을 살아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길 위에 있으리라, 그러나 사랑하되 고상하고 진지하게 친밀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힘을 다하고 모든 지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에 도달할 것이다. 확고한 믿음에 이를 것이다.

이 그림은 그의 종교화 삼부작 “삐에따” “나사로의 부활” “선한 사마리아인” 중 하나이다. 고흐는 생 레미에 있으면서 전통적으로 종교적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룩함이나 신적 임재를 그려낼 수 있는 미술 언어를 연구하였다. 고흐는 올리브나무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들라크로아 작품을 다시 그린 것인데 토마스 아켐피스의 윤리를 그려낸 것이다. 아켐피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외적 행동은 칭찬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자비심에서 행한 행동은 그것이 비록 가장 작고, 세상 눈이 보기에 무가치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판단하되 행하는 자의 속마음을 보고 판단하지, 행한 일의 크기나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목사들의 위선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고흐 자신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윤리를 그린 것이다. 나아가서 자신이 당하던 아픔과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느 ㄴ자기 개인의 시련이 뜻없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뜻과 목적이 어느 날 무덤 저너머의 삶 속에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남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고흐의 이상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 고흐의 예술과 영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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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사마리아인의 모습.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사람의 몸이 꼭 붙어서 하나가 되면서 누가 누구의 몸인지 마치 한사람의 몸처럼 그려내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있다. 실로 구원이 임하는 순간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웃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심중에 웃었다.(창 17:17)

다니엘 풀러라는 사람은 ‘성경의 일관성’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웃은 것은 경배와, 놀라움과 믿음의 행위였다고…
그것은 사라의 웃음(창 18:12)과는 다른 것으로 해석한다…

특이한 해석이지만 일리가 있다.

그 근거는 로마서 4:22절의 바울의 주장은 창세기 15장 6절로 17장 17절 사건을 설명한 것이라는 점이다.
로마서 4장에는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15장의 사실만 가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왜냐하면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라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와 달리 꾸짖음이 없다는 점, 그가 엎드렸다는 점.
또 바로 할례를 행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음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또한 하나의 믿음의 행위로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시 137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시편 137편…
이방인들 앞에서 처참이 무너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
나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면 노래할 수 없다는 한 무명인의 고백
시온을 기억하며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그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재능도 다 필요 없는 것.
없는 것이 나은 것.. 혓바닥도 입천장에 붙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픈 저 안타까운 마음, 눈물.

구유에 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구유에 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이것은 가난, 여관 주인이 무정함과는 상관이 없다.
당시 아구스도의 호적령으로 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여관에 방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마굿간에서 나신 것이다.

1. 이것은 예수님께서 역사의 흐름 속에 태어나셨음을 의미한다.
(전설적, 허구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2. 이것은 또한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이사야 1장3절과 연관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그래서 누가복음 2:12절에서는 이것이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구유의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어떤 의미의 표적이냐 하면, 자기 주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를 다시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레위인 비느하스, 그리고 바울

비느하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인물

아론의 손자이며, 엘르아살의 아들이다. 아론하면 모세의 형 아닌가.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바로 앞에 서라고 했을 때 그가 말 못한다고 빼니깐
아론이 나서게 된다. 모세보다 3살 많은 형이었다.
아말렉 전투에서 모세가 지팡이 들고 있을 때, 팔이 피곤해지자 붙들어주던
인물이 바로 아론과 홀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과 홀은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는다.
그런데 하는 짓이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했던 일이다.
하마터면 아론은 그 때 하나님한테 죽을 뻔했다.
모세가 기도해서 살아남았다.-_- (신 9:20)

그가 대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_-

그럼 여기서 대제사장은 뭐고 제사장은 뭐고 레위인은 무엇인가.
역사를 짚어보자.

레위인의 조상….. 레위…
레위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한명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된다.

레위와 시므온은 아주 불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다.
여동생 디나가 세겜성 촌장한테 강간을 당하자,
세겜성에 가서 남자들을 다 쳐죽인다. -_-
레위는 그런 화끈한 인물이었다.
그게 화근-_- 이 되었는지 야곱이 나중에 유언을 남길 때
레위는 저주를 받는다.

“너희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야, 칼로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구나.
분명히 말한다만 이 아비는 너희가 꿍꿍이속으로 짜내는 모의에는 가담하지 않으리라. 너희 모임에 간섭하지 않으리라. 화난다고 사람을 쳐죽이다니, 눈깜짝하지도 않고 장난삼아 남의 재산인 소도 마구 해치우는 녀석들.
하는 짓 그 횡포가 너무도 잔인하구나. 저주를 받으리라. 살기가 눈에 번뜩이니, 저주를 받으리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흩어지게 하리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흩어 놓으리라. ”

-_-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저주이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흩어질 것이라는 저주이다.

그런데 저주란 것은, 항상 영원 불변한 것은 아니다.
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모세가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 편은 다 나와라~”
라고 말했을 때 레위 지파 사람들이 척 하고 등장했다.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절한 사람들을 다 칼로 쳐죽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_-

그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것이다.
레위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성전일을 돕는 자들이 된다.
그들의 조상 레위가 한 일과 얼마나 비슷한가!
참 멋진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어서 그들지파 안에서 제사장들도 나오게 되고, 성전의 일을 맡게 된다.
그들은 야곱의 저주와 같이 다른 지파처럼 땅 없이 흩어져 살게 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로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들의 분깃은 말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멋지다-_-

그렇다면 제사장은 누구인가?
레위지파 사람들은 다 제사장? 그것은 아니다.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된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했던 형 동역자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다. 비록 금송아지를 만드는 우를 범하긴 했지만, -_-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님께 선택된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가문을 잇게 하신다.

아론의 아들이 네 명이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나답과 아비후 -_-, 그리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이상하게 제사를 드리다가 여호와의 불에 휩싸여서 -_-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아론의 망나니 아들들….-_-
그래서 결국 우리의 희망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옮겨지게 되는데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 뜻대로 순종했던 자였던 것 같다.
이다말도 뭐 특별히 잘못한 건 없지만, 이다말보다는 형인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을 계승받는다.
아론의 최후는 참 드라마틱하다. 한번 보시라.

에돔 땅 변두리에 있는 호르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은 이제 세상을 떠나 조상이 누운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아론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므리바 샘에서 내 말을 어긴 까닭이다.
너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가
아론이 입고 있는 제사장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혀라. 아론은 거기서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보고 있는 가운데 호르산으로 올라갔다.
모세는 산 위에서 아론이 입고 있는 제사장 옷을 벗겨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 아론은 호르산 꼭대기에서 숨을 거두었다. 모세와 엘르아살은 산 위에서 내려왔다.
온 공동체는 아론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30일 동안 슬퍼하였다.
(민수기 20장 23-29절)

이렇게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엘르아살은 어떤 인물인가?

모세에게 아론이 있었다면
여호수아에게는 엘르아살이 있었다. -_-

그야말로 여호수아의 단짝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유명한데 이 엘르아살은 유명하지 않은게 흠…

엘르아살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는 오늘의 주인공!!!

비느하스이다…

홉니와 비느하스?    -_-
그 비느하스하곤 다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리제사장의 망나니 같은 아들들
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_- 걔하고 비교하지 마시라…

이 비느하스는 훨씬 멋진 인물이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을 집중 분석해보자…
비느하스의 가장 멋진 대목아닌가!

싯딤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이방인들과 음란한 짓들을 했다… -_-
음란한 짓보다 문제가 된 것은 걔네들 제사에 초대받아가지구
우상한테 절도 하고 술마시고 잼나게 즐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척-_- 화를 내시면서 모세에게(현대어 성경을 인용해본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 하는 저것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 저들을 잡아다가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밝은 대낮에 처형하여라. 그리하여야 나 여호와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지 않으리라’

그래서 모세가 재판관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울고 있었는데 마침 한 남자가 눈치없이 이방 여인을 데리고 천막에 들어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 때 우리의 호프 비느하스의 등장… 그는 과연 어떻게 할까…

창을 들고 나왔다… -_-

그 천막에 들어가 여인과 남자의 배를 창으로 뚫어서 죽였다.-_-;;;
그 때 이스라엘 전염병이 멈췄으니…..
그 전염병은 자그마치 2만 4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었다.

오오오옷 비느하스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칭찬이 쏟아진다…..

`아론 제사장의 손자이자 엘르아살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속에서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알고 그 두 사람을 잘 없앴다. 그러므로 내가 더 이상 너희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죽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너는 비느하스에게 전하여라. 내가 비느하스의 후손을 잘살게 해주겠다.
그의 집안이 언제까지나 제사장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 그가 내 마음을 잘 알아주어 분노를 멈추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벗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제사장의 직분을 약속받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_-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살인을 즐기시는 하나님? -_-

신명기를 보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22장 22절 – 외우기도 쉽네)

둘다 죽여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칭찬과 약속을 받은 자가 되었다.

바울은?
바울은 왜 스데반을 잡고서 기뻐했을까?
그는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위인들 같이 비느하스 같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싶었다.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을 욕되게 하는 자들을 그는 그냥 둘 수 없었다.
하나님께 너무나 충성된 자였기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것이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길리기아에 있는 다소시에서 태어나 여기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선생의 문하생으로서 나는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철저히 지키도록 엄격하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도 남보다 더 열성적이어서 오늘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도망 치는 자를 끝까지 쫓아가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후략)’

사도행전 22장의 내용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내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얼마나 열심히 구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향이 빗나간 열심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선량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느하스와 같은 열심과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열심은 방향이 빗나간 열심, 지식을 좇지 않은 열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른 지식, 바른 믿음 안에 행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깊이 성경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