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27일 지리산 여행갔을 때 촬영
지리산 종주 때 세석산장에 가기 직전..
앞에 보이는 그 유명하다는 세석의 철쭉..
광수와 진영이
실로암 아이들
2004년 1월 중등부 하늘의 축제 때
지금은 벌써 훌쩍 고딩들이 되어버린 나의 애제자들~~
‘실로암 찬양팀’ 아이들..
이때도 참 연습 많이 했는데..
행사 당일은 처음 사진을 담당해본 나
J.W.Waterhouse, ‘The Favorites of Emperor Horonius’
교보문고에서 Waterhouse 라는 사람의 작품집을 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가다 한페이지를 펴 보았는데 이 그림이 양면에 걸쳐 인쇄되어 있었다
제목과 그림만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 이것저것 유추해야했다
호로니우스라는 황제는 작가가 직접 본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럼 작가는 호로니우스의 이야기를 책이나 어디선가 보고, 그 장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왜 호로니우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가 그린 장면은 어찌보면 무언가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나는 혼자 이 그림을 한참 입가에 미소를 띄고 즐겁게 들여다보았다..
괜히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의 놀이를 즐거워하던 왕이 생각난다.
영화에 나오는 그는 처음에는 위엄차게 등장하지만 광대들의 우스꽝스런 놀이에 푹 빠져 체통은 아랑곳없는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 호로니우스라는 황제는 그정도로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황제의 표정과 자세가 진지하고 위엄차다.
작가는 황제는 바보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자세에서 그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 위엄있어보이는 자세이지만
막상 황제인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비둘기의 모이를 주는 일이다.
그가 이 일을 사뭇 즐겼다는 것은 주변의 신하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신하들은 허리를 숙였으나 몰래 황제가 하는 일을 보고 있다.
신하들의 표정을 보면 뭔가 어이없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호기심인것 같기도 하지만,
웃지는 않는걸 보면 황제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황제에 대해 작가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마 워터하우스는 황제가 새들에게 모이를 준다는 사실에 대단히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일은 황제다운 일은 아니다. 사소한 일이면서 하찮은 일, 또는 한가해보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한가한 일을 즐겼다.
저 오른손으로 새들에게 정성스레 모이를 주고 고개숙여 관찰하는 모습은 황제가 정신적으로 이상해서라기보다
무언가 인생과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새들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리 교회 사찰집사님이 교회 마당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낭만적?으로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비둘기가 더럽다고 싫어하지만, 나는 비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그 때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어본 일이 있다. 집사님이 가르쳐주시기를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손만 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비둘기가 내 손에도 내려와 앉았다.
또다른 생명과의 교감, 나는 그 순간 그런 걸 느꼈다.. 비둘기가 나를 받아준다는 기분.
황제는 그런걸 즐겼을지 모른다..
머리아픈 국정들보다.. (저 신하들이 들고 있는 책이 무엇이겠는가? 결재서류같은 건 아닐라나?)
그는 이런 한가한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런 아이러니하면서도 신기한 장면은 작가에게 이 그림에 대한 생각을 부추겼을 것이고 이 그림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J.W.Waterhouse의 미술을 본 개인적인 느낌은 1800년대 말 작가 답지 않게 상당히 고전적인 미술에 가까운데
미인들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과 비슷하여 내가 봐도 정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여인의 모습은 현대적이다.
사실 옛날에 그린 그림들에 보면 비너스를 주제로한 그림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 않나?
아 이 당시에는 이런 여인을 아름답다고 했구나.. 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고 마는데 Waterhouse 가 그린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그런게 다르다. 그래서 와 님프들이 이렇게 예쁘믄, 그 속에 묻힌 남자는? 뭐 이런
경험을 예전 그림을 볼 때와 다르게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_-
또 섬세하고 따뜻한 색감이면서, 여인의 시선과 포즈가 절묘해서, 그런 부분을 현대적 감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방식에 따른 현대적 감각의 미가 조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작가인 것 같다.
어떨 때는 길게 그린 여인의 모습이 클림트의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또 아무튼 고전적 그림이 갖지 못한
특이한 감각을 지닌 작가인 것 같다.
또 여러가지 재미있는 신화적인 소재를 찾아 그린 그림이 많아.. 뒷얘기를 캐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그림을 보고 추론해보는 재미도 있고 말이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영풍문고에서 책구경을 하던 중 상당히 재미난 책을 발견했다. 사실 내가 전부터 철학이나 현대사상, 세계관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떻게 기독교를 전할 것인가,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에 대한 문제였다. 이 책은 그러한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뤘다고 느꼈다. 특히 선교와 연관지어서, 상황화와 선교에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점에서 상당히 얻을 것이 많은 책이다. 아무튼 이 책은 다른 것보다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독특하고, 특별히 선교라는 주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점에서 좋은 것 같다.
필 파샬, ‘무슬림 전도의 새로운 방향’
이라크로 떠나기 전에 코란과 이 책을 구입했다. 무슬림에 대한 좀더 분명한 이해를 하고 싶어서였다. 이 책은 무슬림에 대한 이해와 상황화와 관련된 고민 두가지를 동기에 해결해준 고마운 책인데, 내용이 아주 흥미롭고, 도전으로 가득한 책이다.
단순한 이론서를 떠나서, 무슬림에 대한 열정과, 현지문화이해, 상황화의 실제적 적용까지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지침서같은 책으로, 무슬림과 관련되지 않았더라도 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