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의 Bach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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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복된 예수여, 주 말씀 앞에)

Chorale Text
German:
Liebster Jesu, wir sind hier,
dich und dein Wort unzuhören;
lenke Sinnen und Begier
auf die süssen Himmelslehren,
dass die Herzen von der Erden
ganz zu dir gezogen werden.

English:
Blessed Jesu, at Thy word
We are gathered all to hear Thee;
Let our hearts and souls be stirred
Now to seek and love and fear Thee;
By Thy teachings sweet and holy
Drawn from earth to love Thee solely.
–Tr. C. Winkworth

복된 예수여, 당신 말씀 앞에
우리 당신을 듣기 위해 모였나이다.
우리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소서.
이제 당신을 찾고, 사랑하며, 경외할 수 있도록;
당신의 달콤하고 거룩한 가르침은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도록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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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바하의 오르간 코랄 편곡집에 있는 곡이다.
이 연주는 놀랍게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슈바이처 박사의 연주이다.
헌신적인 삶, 의사면서, 신학가
그보다 나는 그가 오르간 연주가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러웠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특히 바하의 오르간 곡을 그가 연주한 걸 들으면서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귀로 읽어내면서
음악 속에 그가 숨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음악 하나만 듣고도 참으로 존경의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두번째 연주 – Organ : Gustav Leonhardt)

(세번째 연주 – 원곡 코랄 BWV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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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퍼온 글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 쏟아진 수많은 찬사들과 존경심 때문일까.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어떤 음악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슈바이처가 어떤 태도로 음악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인들마저 슈바이처를 오르간을 잘 쳤던 의학박사 정도로만 안다는 것은 실망이다. 왜냐하면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삶의 여러 가지 활력소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의 삶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그가 보여 준 위대한 인류애뿐 아니라 음악에 있어서도 기꺼이 모실 만한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다섯 살 때 목사인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목사였던 외할아버지도 파이프 오르간의 열렬한 연구가일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슈바이처는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에 다니기 위해 뮈르하우젠에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는 거기서도 큰어머니의 배려로 피아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뮈르하우젠 교회로 부임해 온 젊은 오르가니스트 유진 뮌히에게 정식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배우는 행운도 거머쥐게 된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학적 깊이를 인정받는 바하에 대한 슈바이처의 깊은 식견과 사랑은 바로 유진 뮌히 선생의 영향이었다. 김나지움을 마친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향하게 된다. 법학과 신학과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희망을 안고서. 유진 뮌히 선생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성 스테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동생 에른스트 뮌히에게 슈바이처를 연결해 주었고, 바하는 그 선생 아래서 바하의 거의 모든 오르간곡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음악에 관한 한 슈바이처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방학 때가 되면 그의 숙모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갔다. 그 때 사사하게 된 스승이 당시 불란서의 가장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뷔도르(Charles-Marie Widor)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슈바이처가 음악만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24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학위를 얻고나자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그에게 강사 자리를, 그리고 통독의 도화선이 되었던 성 니콜라이 교회는 부목사 자리를 맡기게 된다. 이것이 19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변화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뷔도르 선생이 제안한 바흐 연구서를 10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의 깊이로 창작해 낸다. 그것이 이란 책이다. 이 책은 1905년 불어판으로 나왔다가 4년 뒤인 1909년에는 독일어판으로 다시 나오게 되는데 그 분량이 불어판에 비해 배나 된다. 그의 나이 약관 30세였으나 그 책으로 슈바이처는 유럽 음악계에 혜성처럼 떠올랐을 뿐 아니라 스승 뷔도르는 물론이고 가브리엘 포레, ‘마법사의 제자’로 유명한 뒤카스, 댕디 등 불란서 최고의 음악가들이 바흐 협회를 결성하고 상임 오르가니스트에 그를 추대하게 된다. 오늘날도 바흐를 연구하는 모든 음악도들은 슈피타의 <바흐>와 함께 슈바이처의 을 필독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음악도들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이미 대학생 때 자기 삶의 목표를 세운 게 분명하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남에게 베푸는 인생을 살자. 그러기 위해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에는 인류를 위해서 살자.”
그가 29세 되던 해 어느 날, 슈바이처는 기숙사에 놓인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된다. “이 곳에는 의사도 없습니다. 약도 없습니다. 의사이신 분은 와 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선교 호소가 들어있는 글을 읽으면서 슈바이처는 엉뚱하게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용솟음친 것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나서서 말렸다. 슈바이처는 하나님의 뜻대로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고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을 이수하기 시작한다. 7년 뒤 1912년, 마침내 슈바이처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다음 해 대학의 교직, 음악학자로서의 지위와 명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직을 모두 버리고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간다.

그러나 음악도인 내가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병원을 짓기 위해, 또는 의약품을 구입하기 위해 돈이 궁할 때마다 슈바이처는 유럽으로 날아 가 연주를 했다는 사실이다. 슈바이처가 1차 대전 때 전쟁 포로가 되어 고생을 했다는 기록도 고통 없이 읽히지 않는다. 포로에서 풀려나자 그는 또다시 돌아와(그러니까 유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강연과 오르간 연주로 병원 운영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아프리카에 있으면서도 슈바이처는 음악 공부와 피아노(아프리카엔 당시 오르간이 없었으니까) 연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베르거와 함께 끝낸 <바흐 오르간 대전집>은 젊은 시절의 바흐 연구서에 결코 손색이 없는 대작이다. 그렇게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라와 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던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슈바이처 앞에 서면 음악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가 남긴 몇 장의 오르간 연주회 음반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의 삶과 정신 때문이다. 슈바이처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음악과 인생뿐이 아니다. 돈, 사역이란 단어 역시 무겁게 다가온다. 슈바이처는 바흐 전문 오르가니스트였지만 자신의 연주를 사역이라 생각한 것 같지 않다. 또한 그는 유럽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자신이 돈을 위해 연주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이었으므로. 때문에 나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 노래 가사 속에 의식을 담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찬양 관계자들이 자신들을 사역자로 자처하는 것이 몹시도 민망한 것이다. 슈바이처가 한국 교회 음악의 귀한 모범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음악과 사역의 순서를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다. 음악과 인생의 우선 순위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슈바이처와 같은 젊은 후배들이 그립다.

http://insamo.org/ys/bbs/read.cgi?board=book_board&y_number=142&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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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의 카이젤부르그에서 태어나 권스바흐에서 자랐고 1965년 9월 4일 아프리카 람바라네에서 영면하였다.

슈바이처는 “나에게 천부적인 재질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음악의 재능 정도이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슈바이처는 5살 때에 목사였던 부친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 피아노는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부친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 외할아버지도 역시 목사이면서 파이프오르간의 열렬한 연구가였다. 슈바이처의 음악의 재능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었다. 권스바하의 목사관과 교회, 파이프 오르간과 함께 그는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배우며 성장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뮤르하우젠의 백부의 집에 기거하며 김나지움 시기를 보냈는데, 백모는 “피아노는 후에 꼭 유용할 것”이라며 그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켰다. 그 뮤르하우젠의 교회에는 베를린의 음악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오르가니스트 유진 뮨히가 있어 그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정식으로 배웠고 바하의 음악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 곳의 성 스테판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유진의 동생 에른스트뮌히로 그의 밑에서 바하의 오르간 곡을 거의 습득하였고 칸타타의 연주에서는 항상 오르간 파트를 맡았다. 대학시절 슈바이처는 방학 때마다 파리로 갔다. 그 곳에 거주하는 숙모인 마틸드 슈바이처가 명오르가니스트 샤르 마리 비도르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곡을 연주해 보겠느냐는 물음에 “물론 바하입니다”라고 슈바이처는 답했고 그 이래로 두 사람은 친밀한 사제간의 정을 맺게 되었다.

비도르는 파리 음악학교의 오르간과의 교수로 명연주가로도 유명했지만 엄격한 레슨으로도 유명하며 음악학교의 제자 이외에 제자를 두는 법이 없었으나 슈바이처만은 예외였다. 휴가중에도 레슨을 해 주고 슈바이처가 아직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 배를 곯고 다니는 것을 알자 자주 가는 레스토랑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베를린의 음악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바하 연구열이 파리에서도 일어 여기저기에서 바하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비도르는 프랑스에 이야기형식의 바하서적은 있지만 연구서가 출판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출판을 기다려 왔는데, 베를린 음악학교 출신으로 바하에 조예가 깊은 뮨히 형제를 스승으로 두고 바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슈바이처에게 이를 권유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슈페터의 바하 전기가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평전 형식의 명저였다. 슈바이처는 여기에 악곡의 해석과 연주상의 주의 등을 곁들여 볼 것을 생각하고 스승 비도르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1899년 24살 때 철학박사, 이듬해 신학박사의 학위를 딴 슈바이처는 모교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의 강사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의 공부도 중단하지 않았다. 1905년 드디어 프랑스어판 <바하>가 파리의 프라이트코프사에서 출판되었다. 슈바이처는 알자스태생으로 프랑스어도 독일어 못지 않게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데 책은 예상외로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슈바이처를 비도르와 만나게 해 준 마틸드 슈바이처에게 헌정되었고 비도르가 서문을 썼다. 455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다. 그 해 파리에서는 듀프레, 뒤카, 포레, 규이만, 댕디, 비도르등을 중심으로 바하협회가 결성되었는데 슈바이처는 상임 오르가니스트에 추대되었다. 그의 나이 30세때의 일이다.

슈바이처의 바하는 대단한 호평을 받아 출판사인 프라이트코프로부터 독일어판의 출판도 의뢰받았다. 슈바이처는 증보개정하여 1909년 독일어판도 출판되었는데 프랑스어판의 두배에 달하는 844페이지라는 대작이었다. 이 책은 슈페터의 바하전기와 더불어 바하연구가의 필독서로 꼽힌다.

이 바하의 부산물로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과 오르간 예술>이 출판되었다. 교회관계자, 음악관계자들의 앙케이트를 토대로 한 것으로 기계제작과 맞먹는 수공의 파아프 오르간의 장점과 특징을 찬미하고 그 보존을 강조하고 있다. 또 1909년 빈에서 국제 오르간 제작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거기서 결정된 국제조례는 슈바이처가 기초한 것이다.

슈바이처는 21살의 대학생 시절에 자신은 30세까지는 학문과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30세 이후에는 직접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9세 되던 해 ‘적도 아프리카에서 전도상 시급한 일은 의술을 익힌 신앙인을 파견하는 일…. 주님의 뜻을 따를 자를 교회는 기다린다’는 기사를 읽은 후 바로 여기에 직접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30세 때에 모교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의학과정에 진학하였다. 슈바이처는 주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의학을 지망하였고 그것은 문자 그대로 소명의 의학이었다. 대학강사, 목사, 바하 연구가, 뛰어난 연주자(오르가니스트) 그리고 의학생이었다.

“…나는 건강했다. 밤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어 학위논문이 음악이나 사교에 의해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공부에 쫏겨 철야한 다음 날 아침 비들에게 파이프 오르간 연주의 레슨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라고 슈바이처는 술회했다.

7년의 의학코스를 마치고 1912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듬해 38살 때 적도 아프리카의 람바라네로 건너가 흑인환자의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봉사에 희생은 으래껏 따르게 마련이지만 슈바이처는 교회의 성직, 대학의 교직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희생하였다.

적도 아프리카로 건너 갈 때 슈바이처가 가장 아쉬워 한 것은 음악 생활을 단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파리의 바하협회가 제작자 가보에게 방서방습을 고려한 오르간의 페달을 단 피아노를 특별 제작하여 보내 주었다. 그 덕분으로 슈바이처는 피아노를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람바라네에서도 음악을 향유할 수 있었다. 남십자성이 빛나는 밤에 슈바이처는 마음껏 피아노를 두드렸다. 연주회를 위한 정해진 연습도 아니었고 청중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바하에 몰두, 침잠하여 한껏 바하를 추구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의 피아노, 오르간 솜씨는 아프리카에서 떨어지기는 커녕 더욱 향상되어 만개했다.

그 후 두번의 세계대전을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슈바이처는 병원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슈바이처는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으로 약품과 의약재료를 사모았고, 기부금을 받아 병원을 운영하였다. 흑인환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구하고 유럽에서는 낡은 오르간을 구했다”라고 평한 사람도 있었다.

명저 바하외에 슈바이처는 스승 비도르와 함께 샤마社의 요청으로 바하의 오르간 곡집을 감수 출판했고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에드워드 니스베르거와 함께 1965년에 완성했고 수개월 후 영면하였다. 슈바이처는 바하의 탁월한 연구가이며 이론가였던 동시에 뛰어난 연주가였다. 음악적인 면에서 그의 생애를 바하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코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노력만이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바하를 간접체험한 사람만이 바하의 음악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슈바이처야 말로 진정한 바하의 체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양화진



김성민 전도사님께서 졸업선물 해주신 이 책은 선교사들의 묘지로 알려진 양화진에 방문했던 작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9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초기 선교사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존헤론을 시작으로 알렌과 원두우(언더우드), 시란돈(스크랜톤), 아펜젤러, 애니와 벙커, 헐버트, 릴리아스 호톤, 게일, 로제타 셔우드, 윌리암 제임스 홀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음은 물론, 새남터교회와 정동교회, 연세대학과 이화여대, 배재학당의 시작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더 보기 “양화진”

Durch dein Gefangnis, Gottes Sohn

수난곡에 나오는 코랄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채찍질한 후 놓아주는 뒤에 나오는 코랄이다.
연주는 Bach Collegium Japan 의 연주이다.
일본에 있는 바하 연주단체인데,
명동성당에서 하는 공연을 중계로 보았다.
그때는 요한수난곡은 아니었고, 다른 칸타타였던 기억이 난다.
아주 부드럽고 정결한 합창이다..
13,24행 56행 말미에 각운이 있다.
가사 내용도 매우 간결하면서 신앙적인 깊이가 있다.
정말 마태수난곡이나 요한수난곡을 듣고 있으면
바하의 신앙적 위대함이랄까 감히 접근할수 조차 없는 어떤 광휘..
이런 곡 하나하나의 악보를 손수 그려가며 만들 때의 그 고통과 또 그 기쁨이 어떠했을까..

BWV 31, Letzte Stunde, brich herein

Letzte Stunde, brich herein,
Mir die Augen zuzudr&uuml;cken!
Laß mich Jesu Freudenschein
Und sein helles Licht erblicken,
Laß mich Engeln &auml;hnlich sein!
Letzte Stunde, brich herein!

Final hour, break now forth,
These mine eyes to close in darkness!
Let me Jesus’ radiant joy
And his brilliant light behold then,
Let me angels then be like!
Final hour, break now forth!

———
이 아름다운 곡은
바하 작품번호 부활절 칸타타인
31번 칸타타(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eret/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도다)
에 나오는 8번째 곡이다.
페터 옐로지츠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림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아름다운 그림은
한 어린아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입맞추려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디서 누가 그린 그림인지 통 알 수 없는 그림이지만
십자가의 고통이 끝나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천진하나 그를 사랑하는 한 아이의 모습이 사뭇 감동적이고
그림을 그린 작가의 마음과 신앙을 들여다보게 하는
매우 깊이있는 그림이라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