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나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그 빛이 없어졌을 때도 수건으로 얼굴을 계속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에 더이상 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우고 싶었던 것이다. 내 수건도 겹겹이다.

98.12.24
모세가 쓴 수건에 대한 저의 글은 저의 상상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니,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내용이 생각났고 그저 저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기에 그런 글을 쓰게 되었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더 보기 “수건”

위대함

진정한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는 진정한 위대함은 되지 못할 듯 싶다.
나는 거대한 영적지도력을 가진 목사, 길이 고전으로 남을 책들을 쓰는 것,
수많은 종족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선봉장의 자리에 서는 것.
이런 것만이 진정한 위대함이라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제주도의 이름모를 한 촌락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양육하는
일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 해 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큰 비전을 품기에만 급급하여 작은일 드러나지 않는 일은 무시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위대한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위대하지 않은 일에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칠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요한복음 9,11장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하자. 또한 그가 다시오신 그리스도임을 사칭하며 세상끝날에 다시오신다는 말씀이 폐지되었고 몇가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가 예수인가? 메시야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 그것이 아니라고 증거하므로.

예수 시대로 돌아가보자. 나는 예수가 오기 20년 전에 태어나 철저한 유대의 신앙교육을 받고 율법-토라를 배웠다. 안식일에는 일을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을 가까이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 우리는 거룩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 그리고 난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신자다.

예수란 자가 나타났다.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 사람들이 웅성웅성대고 논쟁을 한다.
저 예수란 자가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안식일에 일을 한것은 죄를 범한 것이다. 그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그가 이적을 행한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현명한 나는 출애굽기에 모세의 기적을 따라했던 술사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어도 그런 기적은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 이단에 꾀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것이 그 시대의 우리가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난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의 무오성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를 핍박하였다고 생각한다.

사울도 그렇다. 그는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그 추종자들을 핍박한 것이 아닌가 무슨 다른 뜻이 있었는가. 도마가 생각난다. 난 도마가 좋다. 왜냐하면 나랑 비슷하다. 내가 도마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함께 있던 제자들이 웅성대며 나에게 뛰어 온다.’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 나는 말한다. ‘그 사람 진짜예순지 어떻게 알아. 난 못자국이로도 보지 않으면 안 믿을래. 너네는 근거도 없이 믿냐?’ 속으로 그런다. ‘쟤네들 큰일 나겠다. 나중에 예수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무턱대고 따라가겠구나…’

예수님이 오셔서 친히 못자국을 보여 주신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 없다고 이야기 하는 도마의 속마음은 아니었을까. 나라면 도마처럼 그리하였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보지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하는 말씀을 왜 도마에게 하셨는지 따지고 싶다. 나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이미 주신 약속과 말씀을 붙잡고 이적과 기사를 근거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어렵다. 유대인들과 도마와 사울.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율법대로 살기를 고집하여서 진짜예수를 구분하지 못하였다. 사울이 멋진 점은 그가 예수를 만나서 같은 열심으로 예수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갑자기 착해진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다만 그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깨달아 고쳤기에 하나님에 대한 같은 열심으로 그같이 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호세아서 말씀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도다’라고 했으며 로마서 말씀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라고 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알아가야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교회 형 말처럼 그들이 율법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도 그들중에 있었다면 예수를 믿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98.12.3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내가 요한 복음 9장만 가지고 단편적인 묵상을 하고 그것이 다 인줄만 알았는데 오늘 에기치 않게 ivf모임을 통해서 요한복음 11장을 묵상하게 하심으로써 말씀의 새로운 깊이를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율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미슈나나 랍비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었다고 한다. 랍비들의 교훈집 ‘미드라쉬 랍바’에는 신 31:14이하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임신 중인 여자가 죄를 범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녀의 자녀가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는 언급이 있다. 그들은 그들은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묵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랍비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맹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모세에 제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랍비의 제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잘못알고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어떤 사람의 소경됨이 자신이나 그 부모에게 있다고 한 점이다. 그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또 안식일의 법을 완전한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지지난주 목사님 설교 때에 들은 이야기 인데 그들의 율법 조항은 613가지 인데 그 중에 안식일에 대한 법은 33가지라고 한다. 일례를 들면 안식일에 손등으로 물건을 옮기면 죄가 아니지만 손바닥으로 물건을 옮기면 죄라는 것, (입으로 옮기면 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2000규빗(약 1km정도)을 걸으면 죄이기 때문에 그들은 한 1500규빗정도 걷고 쉬었다가 다시 1500규빗 정도 가고 다시 쉬고 하는 식으로 안식일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였으니 완전히 율법의 본질은 무시되고 뺀질뺀질한 형식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11장에는 바리새인들의 본심이 드러났기에 놀랐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똑똑히 들은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 11:47-48)”라고 한것은 (주석을 보니)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면 로마인들이 그것을 반란의 징조로 보고 이스라엘을 탄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신성모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참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정치적인 불안감에서 죄없는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한 것이니 참 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바리새인들의 한심함을 알지 못하고 그들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주셔서 그들의 본심을 깨닫게 하심이 아니겠는가

나의 논리도 잘못되었다. 만일 어떤 자가 나차나 선한 이적들을 행한다면 그가 하나님께로부처 온 사람인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귀신이 귀신을 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귀신을 쫓고 죽은 사람을 살린다면 그가 하나님께로 나온 사람임은 자명하다. 술사들은 모세의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선한 이적이라기 보다는 쓸데없는 흉내였다. 사단에게서 이적이 나올 수는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한 이적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7:15-18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 시대에 있었더면 나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지금 확언 하건대 내가 그 시대에 있었다고 했을지라도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분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사람의 가르침을 중요시 여기면 안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일이란 어렵다.
번번히 볼때마다 말씀이 달라진다.

용서에 대한 고민

성경통독을 하다가 민수기 14장을 읽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을 갔다온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굼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옵소서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 14:20)

그 다음이 어렵습니다. 더 보기 “용서에 대한 고민”

믿음 생활인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 알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본다.

사람에게 인정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인정 받는 일

그런일을 찾아서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일을 찾기 힘들다.
내가 하나님께 한다고 하고 있는 일들은 사실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함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의 믿음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받기 위한 한 욕구라는 것이다.

내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결국 영광은 내가 받고 욕은 하나님이
먹는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있도다..(눅 6:26)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 받는 일

그런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있었다.

그것은 왼손이 모르는 오른 손의 일이다.
남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서 나누고 간증한다는 핑계는 나를 드러내기 위한 모습
을 감추려는 시도일 뿐이었다.

수련회가 생각난다. 저녁집회가 끝나면 목소리 쉰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이 된다.
지난번 ivf하계수련회가 생각난다. 죄가 골방까지 따라들어간다는 그 말씀 내
귀에 아직도 들린다. 골방에 기도하러 들어가면서도 누군가 보고 있으리라는 그
떨칠 수 없는 생각.

그러나 1월달에 중등부 아이들 임역원 수련회에 가서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깨달았던 것은 금식할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는 것.
그것은 내의를 스스로드러내는 것만이 잘못이 아니라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의까지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때는 목소리가 쉬지않게 주의하며 전도할때는 교인들 없는 곳
에서 살펴가며 금식할때는 사람들 하고 밥 약속 없는 때에 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까지도 감추는 지혜.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