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Nouwen


“고흐만큼 나에게 영향을 준 작가나 화가가 없었다. 깊은 상처의 사람, 놀라운 재능을 가진 고흐는 나 자신의 아픔과 재능에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흐는 나의 전 생애의 영적 인도자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고흐야 말로 신학적 성찰을 위한 참된 근원이 됨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고흐는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 뿐 아니라, 삶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고, 고흐는 언제나 한 목회자로 남아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가 회개를 촉구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실이 바로 고흐의 그림이 지닌 깊은 우주적 호소력일 것이다. 고흐는 사람의 실패와 고난과 기쁨, 그 모든 것을 겪었고 또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그의 그림 속에 모두 표현했다.”

 – Henri Nouwen

고흐, ‘첫걸음’


고흐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 생각한다. 밀레작품의 모작이지만… 밀레와 같이 그도 농민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하던 아버지는 삽을 내려놓고 이제 곧 첫 걸음마를 떼려는 아이를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다. 아이도 아버지를 바라보며 같이 두 팔을 벌렸다. 아버지는 앞에서 아이를 반기고 어머니는 뒤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받쳐주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인생은 과연 무의미한가? 인간은 이 세계에 이유를 모르고 태어난 외딴 섬인가. 우연히 만들어졌나. 인간은 기계, 분자들의 집합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해 지어졌다. 인간의 삶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걸음을 떼는 아이의 모습은 사람의 일생중 가장 희망한 장면을 보여준다. 희망, 삶의 의미, 존재의 이유. 나는 고흐의 첫걸음에서 이런 것들을 발견한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다. 고흐의 그림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찾아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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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흐의 영성과 예술을 읽으면서 이 그림을 다시 떠올렸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가득한 삶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 농민의 삶 속에서 찾았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전형, 삶의 가치를 담아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밀레의 그림은 따뜻하기 그지 없다… 그림만 바라보아도 행복해질 것만 같다.

200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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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아트홀에서 퍼온 글…

이 작품은 고흐의 1890년 작품으로 밀레의 그림을 다시 그린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한 아이가 처음 걸음을 내딛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무척이나 설레이는 듯한 아이 그리고, 아이의 첫걸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함께하는 부모. 아주 행복하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고흐는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답니다.
1889년 5월에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무송 정신병원에 들어가 그 곳에서 1년 정도를 보내게 됩니다.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광기와 싸워야 했던 당시의 고흐의 그림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두려움과 슬픔이 짙게 배여 있습니다. 당시 고흐는 현실속의 사람들을 그리는 대신 밀레,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도미에등의 작품속 인물들을 다시그리곤 했는데요,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에는 두려움과 슬품 그리고 고독보다는 설레임과 행복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듯합니다. 힘들었던 시기지만, 고흐에게 자신과 똑같은 빈센트라는 이름을 가진 조카가 생긴 해 였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자신의 조카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들의 행복을 빌면서 말입니다.
혹은 자신이 버렸던 크리스틴과 그녀의 아이를 생각했을까요. 평생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가슴 깊이 동경한 삶의 풍경일까요 어떤 경우든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고독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자신의 덧없는 인생에 한없이 슬퍼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밀레의 그림을 다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고흐의 비극적인 개인사와 겹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보르헤스의 소설중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시 배껴 쓴 작품역시 위대한 작품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맥락을 강조한 것이리라 생각되는군요.
고흐라는 맥락은 이 작품을 한없이 아름답게도 한없이 울적하게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흐, ‘나사로의 부활’



<위 – 고흐, 나사로의 부활>
<아래 –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고흐의 성경을 주제로한 3부작 중 하나이다.
나사로의 부활..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 아닌가? 바로 램브란트의 그림, 나사로의 부활의 모작이다.


무언가 많이 다르다. 그가 밀레의 작품을 모사할 때는 똑같이 그렸다. 그런데 많이 다르다.
좌우가 바뀌었고, 예수님 대신에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하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사로의 얼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었던 점이다.
아 우선 램브란트 그림을 보자.
절묘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삼각형 꼭대기에 예수님의 손이 있다.
권능의 오른팔을 드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빛이 비추인다.  나사로는 일어난다. 그는 4일 만에 일어났다. 몸에서는 썩은내가 났다.
램브란트는 나사로의 몸을 죽어져가던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놀라는 여인의 얼굴이 빛난다. 마리아나 마르다 일 것이다.
나사로의 표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고흐는 동생에게 자신은 렘브란트가 빛의 음영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을 자기는 색깔 사용을 통해 이룩해보고자 한다고 하였다.

‘무덤과 시체는 보라색, 노랑, 흰색이다. 부활한 나사로의 얼굴에서 손수건을 걷어내는 여인은 초록색 옷에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은 검은 머리에 초록색과 핑크색 줄무늬가 잇는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뒤쪽에 푸른색의 시골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떠오르는 해가 있다. 이러한 색깔들의 배합이 그 자체로 빛과 그림자가 표현하는 시각적 효과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색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고흐의 노란 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부활, 사랑을 대표하기도 한다.

태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흐가 태양신을 섬겼다던지, 자연주의로 회귀했다던지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3세기 이후 화가들은 태양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이다. 해바라기는 전통적으로 경건과 헌신과 관련된다. 고흐는 태양을 그림으로서 믿음의 치유능력을 나타내고 싶었다.

죽어져가는 자신을 살려내실 그리스도.

고흐, ‘영원의 문턱에서’


자기 작품 속에 한 사상을 담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 ‘영원의 문턱에서’에서 나는 밀레가 믿었떤 무엇인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해 보이려고 하였따. 화덕가 모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작은 노인을 감동 깊게 표현함으로써, 그 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영원에 가 닿은 것을 분명하게 그려보려 하였다. 동시에 이 그림는 벌레에게는 있을 수 없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것이 있다…. Uncle Tom’s Cabin 에 보면 불쌍한 노예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아내와 함께 앉아서 회상하는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난폭한 대홍수처럼 몰려 오라
슬픔의 폭우여 쏟아져내려라
다만 나는 내 집에 평안히 이르리라
내 하나님, 내 하늘나라, 내 모든 것이여

이것은 참으로 그 어떤 신학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화덕가에 앉아 있는 가난한 벌목공, 아니면 거친 들판의 농부, 아니면 광부마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집에 있다는 느낌, 그곳에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감의 순간이다.

(1882년 11,12월, 헤이그, 고흐의 편지 #248, Letters 1:495)

고흐, 뒤집어진 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흐의 그림이다.

뒤집혀져 있는게

처음 탁 보는 순가 게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 생각했다.

바둥바둥대는 게의 모습.

조금 지나자 안쓰러워졌다.
웬지 불쌍하고 안되보였다.
도로 뒤집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림속에 갇힌 게는 영원히 뒤집혀져 있어야 한다.

고흐는 게를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스스로를 뒤집을 수 없는 게의 모습은 연민과 고독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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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도 이 게와 마찬가지 일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 뒤집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라는 존재일 것이다.

고흐는 신앙의 눈으로 이 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