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그림과 비교하며 보면 재미있다. 루벤스와 카라바조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이 그림에서의 그리스도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넘쳐보이는 신성한 사람으로 보이는 듯 하고, 카라바조의 그리스도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물로 보인다.
저 두 팔을 벌린 포즈는 루벤스 그림에서 자주 나오는 모티브이다.
두 제자는 놀란 듯이 보고 있고 한 제자는 눈을 들어 쳐다보고 있다. 생각건데 저 얼굴이 도마인 것 같다. 표정을 봐도 잘 못믿겠다는 표정이다.
두 부류의 제자들이 명확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눈길은 심상치 않다.
오토 딕스, ‘십자가를 지심’
개와 같이 목에 밧줄을 묶었다. 앙상한 발목은 힘이 풀렸다. 예수님은 언덕을 기듯이 올라간다.
채찍을 든 사람은 무자비한 표정을 지녔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호기심으로만 쳐다본다.
그 누가 이 사람이 자신을 위해 올라가는 것을 깨달았나? 그저 호기심어린 눈으로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람들을 선동한, 한 목수의 아들의 죽음으로만 알았을 뿐. 그리스도의 표정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
그는 하나님이셨다.
고흐, ‘나사로의 부활’
<위 – 고흐, 나사로의 부활>
<아래 –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고흐의 성경을 주제로한 3부작 중 하나이다.
나사로의 부활..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 아닌가? 바로 램브란트의 그림, 나사로의 부활의 모작이다.
무언가 많이 다르다. 그가 밀레의 작품을 모사할 때는 똑같이 그렸다. 그런데 많이 다르다.
좌우가 바뀌었고, 예수님 대신에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하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사로의 얼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었던 점이다.
아 우선 램브란트 그림을 보자.
절묘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삼각형 꼭대기에 예수님의 손이 있다.
권능의 오른팔을 드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빛이 비추인다. 나사로는 일어난다. 그는 4일 만에 일어났다. 몸에서는 썩은내가 났다.
램브란트는 나사로의 몸을 죽어져가던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놀라는 여인의 얼굴이 빛난다. 마리아나 마르다 일 것이다.
나사로의 표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고흐는 동생에게 자신은 렘브란트가 빛의 음영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을 자기는 색깔 사용을 통해 이룩해보고자 한다고 하였다.
‘무덤과 시체는 보라색, 노랑, 흰색이다. 부활한 나사로의 얼굴에서 손수건을 걷어내는 여인은 초록색 옷에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은 검은 머리에 초록색과 핑크색 줄무늬가 잇는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뒤쪽에 푸른색의 시골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떠오르는 해가 있다. 이러한 색깔들의 배합이 그 자체로 빛과 그림자가 표현하는 시각적 효과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색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고흐의 노란 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부활, 사랑을 대표하기도 한다.
태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흐가 태양신을 섬겼다던지, 자연주의로 회귀했다던지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3세기 이후 화가들은 태양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이다. 해바라기는 전통적으로 경건과 헌신과 관련된다. 고흐는 태양을 그림으로서 믿음의 치유능력을 나타내고 싶었다.
죽어져가는 자신을 살려내실 그리스도.
벨라스케스,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찾아온 예수’
좋은 내용의 글이어서 여기에 옮겨 실었습니다. 도계성산교회 조덕근 목사님의 글로 홈페이지에서 퍼 온 것임을 밝힙니다. (http://dokyesungsan.net)
마르다는 건장한 팔뚝으로 마늘을 찧고 있다. 마늘을 까서 넣어야 하는데 채 다 까지 못한 마늘이 작은 절구 주위에 널려 있다. 눈을 멀뚱히 뜨고 마르다의 요리를 기다리는 생선들과 막 껍질을 벗겨놓은 계란이 놓여 있다.
저쪽에 있는 예수님은 의자에 앉아계시고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마르다는 앉지도 못하고 서 있다. 약간 앞으로 기운 불안정한 자세다. 오른손은 절구공이를 잡고 왼손은 절구를 완전히 감싸 쥔 것이 아니라 슬쩍 잡고 있다. 절구공이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오른손으로는 힘있게 내려치지만 왼손이 절구를 꽉 붙들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늘이 튀려고 한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10:38-42을 형상화하고 있다.
저쪽의 마리아는 숄 같은 것으로 윗몸을 감싸고 있는데 마르다는 행주치마로 아랫몸을 감싸고 있다. 마리아는 머리를 풀고 있는 반면에 마르다는 헤어밴드로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일을 하는데 머리털이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마리아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옷 속에 손을 감추고 있는데 마르다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있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있는 쪽은 밝고 이쪽은 어둡다. 그런데 생선과 계란은 유난히 빛나고 있다. 마르다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르다 옆에 서서 손가락으로 마르다의 팔뚝을 찌르듯이 하면서 마르다에게 뭔가 말하는 노파가 있다. 저쪽 마리아의 뒤에도 노파인지 젊은 여잔지 분명치 않지만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도 역시 마르다에게로 팔을 뻗치고 있다. 마치 마리아를 뒤에서 안으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두 여자는 무엇일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절). 마리아는 그 뒤에 있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마리아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마리아 뒤에 있는 여자의 자세가 흐트러져 있다. 마리아가 이긴 것이고 뒤에 있는 여자가 진 것이다.
마르다 뒤에 있는 노파는 매우 침착하게 여유만만하게 마르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반면에 마르다는 불안정하다. 마르다의 윗옷 어깨부분과 팔목 부분에 주름이 많이 져있다. 마르다의 불안정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르다의 표정은 금방 울분을 토할 듯하다. 손으로는 마늘을 찧고 있지만 눈은 절구쪽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뒤에 노파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노파의 시선은 정확하게 마르다를 향하고 있다. 마리아는 뒤에 있는 여자에게 이겼지만 마르다는 뒤에 있는 노파에게 졌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40절). 일에 전념하지 못했다. 마르다가 일에 전념했으면 일하기에 바빠서 ‘예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라고 말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다. 마음이 갈래갈래 나뉘어졌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었다(41절).
마르다와 마리아의 뒤에 두 여자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를 그려넣음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을 시각화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 그림을 해석하는 전문가들은 ‘예수의 방문이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본 모습이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는 말인데……?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통로를 제공해준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우리 자신의 두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저렇게 다소곳이 앉아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천상의 말씀을 듣고 싶은 것이 나의 진정한 소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할 일이 산적해 있고 일이 많다보니 손은 재게 놀려지지 않고 절구는 자꾸만 흔들리고 마늘 조각은 튀고 생선은 나를 비웃듯이 멀뚱한 눈으로 입을 비쭉거리고 있다. 다 떨쳐 버리고 저리로 가지도 못한다. 현실은 마르다 뒤의 노파처럼 집요하게 나에게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나는 저쪽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음식을 다 만들고 가기 위해서 음식만드는데 열중하지도 못하고 ‘어쩔까!’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마르다가 있는 쪽과 마리아가 있는 쪽 사이에는 심연처럼 검은 어둠이 놓여 있다. 양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그림을 보다보면 그 중간의 어둠에 눈이 가게 된다. 마르다가 있는 현실과 마리아가 있는 이상 사이의 그 어둠의 어디쯤에서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2000년 8월 29일 조덕근 씀
고흐, ‘영원의 문턱에서’
자기 작품 속에 한 사상을 담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 ‘영원의 문턱에서’에서 나는 밀레가 믿었떤 무엇인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해 보이려고 하였따. 화덕가 모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작은 노인을 감동 깊게 표현함으로써, 그 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영원에 가 닿은 것을 분명하게 그려보려 하였다. 동시에 이 그림는 벌레에게는 있을 수 없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것이 있다…. Uncle Tom’s Cabin 에 보면 불쌍한 노예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아내와 함께 앉아서 회상하는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난폭한 대홍수처럼 몰려 오라
슬픔의 폭우여 쏟아져내려라
다만 나는 내 집에 평안히 이르리라
내 하나님, 내 하늘나라, 내 모든 것이여
이것은 참으로 그 어떤 신학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화덕가에 앉아 있는 가난한 벌목공, 아니면 거친 들판의 농부, 아니면 광부마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집에 있다는 느낌, 그곳에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감의 순간이다.
(1882년 11,12월, 헤이그, 고흐의 편지 #248, Letters 1: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