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고흐는 아버지의 죽음을 추도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꺼진 촛불을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사야를 펼시고 있다.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옆에 있는 책은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식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그림에 고흐 자신의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한 의도가 있다고 한다.
그의 내면의 알지 못하는 고독감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일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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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내가 고흐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을 때 한 감상이다.
어떤 책은 이 그림을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림은 고흐가 성서를 존중하고 있음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펼쳐있고, 그 옆에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있다. 얼른 보아도 고난 가운데 내재한 삶의 기쁨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미술평론가들은 최근까지도 이 그림에 대하여 고흐의 아버지가 죽은 뒤 고흐는 성서와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분명히 대조시킴으로써 아버지를 자유로이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은 오히려 고흐가 가졌던 전통적 과거 신앙(성서)와 현재 자기의 관심사인 근대 문학(에밀 졸라)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둘을 종합하려 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근대 문학이 성서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근대문학으로 보충하려는 것이다. 만일 성서를 졸라로 대치하려 했다면 닫힌 성서를 작게 그리고, 열려있는 삶의 기쁨을 성서보다 더 크게 그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흐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에 나오는 주인공 폴링을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일찍이 고흐가 탄광촌의 광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슬픔의 사람’이요, 모든 고되고 힘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하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화가가 된 뒤에도 여전히 숭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84년10월 고흐는 예수를 가리켜, ‘어느 누구도 아닌 화가로서… 산 몸 안에서 일하는 최고의 미술가’라고 하였다. 특히 고흐는 화가인 에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생 레미 요양원 시절에 그린 삐에따에 나오는 예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그려 넣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성서에 이끌리고 있는지 넌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성서를 읽는다. 성서말씀을 내 마음 속에 새기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는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이해하려 한다.’ – 1877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 1568, tempera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at Naples
– 미술평론가 노성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무슨 일일까? 한 무리 거지 떼가 겨울 스산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모두 앞 못보는 소경들이다. 전부 여섯. 이 세상의 노동과 수고를 요구하는 날수와 같다. 이들은 마을을 뒤로하고 떠난다. 따뜻한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었을까?
날을 도와 이웃 마을로 옮겨가는 길이다. 버젓한 큰길은 갈 수 없는 신세다. 마을 사람들 눈에 띄었다간 재수 옴 붙었다고 돌팔매를 맞을 테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는 불구자들이 천대를 면치 못하던 시대였다. 발길 드문 뒷길이 오히려 속 편하다. 그러나 뒷길이 노상 그렇듯이 눈 밝은 사람도 마달 위험이 도사렸다. 좁기도 좁지만 가파른 둑방길 좌우로 얼음처럼 차가운 도랑이 흐른다. 자칫 헛발질하는 날엔 영락없이 서리 맞은 배추꼴이 되고 만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속담을 좋아했다. 지금도 세상에서 속담이 제일 흔한 나라다. 브뤼겔은 속담을 붓끝에다 묻혀서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다. 글과 그림의 구별이 따로 없던 때였다. 브뤼겔은 붓으로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비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을 말했다. 섭정 시대 네덜란드 사회는 자못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솔직하게 속을 터놓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말 한마디에 진실이 뒤집히고 이웃이 원수가 되기도 했다. 이럴 때 속담 한 마디는 한 잔 술처럼 아픈 생채기를 아물리는 처세였다. 속담은 아킬레스의 창날처럼 상처를 내기도 하고 아물게도 하는 힘이 있었다. 따끔한 교훈과 따뜻한 격려를 한꺼번에 담는 재치가 있었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앓듯이 내뱉는 속담 한 마디에 부끄러운 역사와 말 못할 진실을 담았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다. 주린 이가 주린 이를 채우거나, 병든 이가 병든 이를 낫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의가 정의를 일으키지 못하고, 거짓이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미움이 사랑을 피워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다.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건 그림에나 있는 일이다. 전도된 세상, 바보 배를 타고 가는 바보 세상에나 있는 일이다.
마태복음 15장을 보자. 눈먼 길잡이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비유를 던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힐 것이다.”
브뤼겔의 그림은 성서 이야기를 베꼈다. 교회 뾰족탑이 그림 복판에 솟아 있다. 성서의 관점에서 소경은 죄인이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으뜸 덕목이 밝은 눈을 가진 ‘슬기’(prudentia)라면, 그 반대말 ‘맹목’은 어리석음(imprudentia)의 표본이다. 소경을 믿고 따르다가는 필경 구렁에 빠지고 만다. 그러니 ‘하나님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아라’는 교훈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속담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거짓 교사를 겨냥한 비난에서 나왔다. 예수는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눈먼 세상을 일깨운 일이 있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눈을 뜨게 하신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육탐에 눈멀어 영혼의 눈을 앗긴 ‘눈뜬 소경’에 대한 비유로 바꾸어 읽었다. <이코놀로지아>를 쓴 체사레 리파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이 세상 눈뜬 소경들을 인도하는 등불로 해석했다. “내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힐 것이다”라는 예언은 실명의 저주로 읽었다. 소경의 실족은 교회의 등불을 외면하는 이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브뤼겔의 그림에는 소경 여섯이 나온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세상 무대를 건넌다. 첫째 소경이 먼저 웅덩이에 빠졌다. 그가 끼고 다니던 악기도 박살났다. 둘째도 덩달아 비틀거린다. 눈두덩이 움푹하다. 누군가 그의 눈을 후벼팠다. 셋째도 걸음을 가누지 못한다. 눈이 흰자위를 뒤집었다. 흑내장이다. 넷째는 각막백반. 소경 가운데는 나면서부터 신의 은총을 여읜 사람도 있지만, 제가 지은 죄값으로 눈알을 뽑힌 사람도 있다. 셋째 소경은 멈칫하는 순간 교회를 올려다본다. 저 멀리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는 첨탑을 뽐내며 어리석음의 구렁에 실족한 죽음의 행렬을 내려다본다. 넷째 소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곧 닥칠 일을 보지 못하는 건 눈뜬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경들은 하나같이 엉터리 예언자처럼 지팡이를 들었다. 무지와 거짓은 둘 다 지옥으로 직행하는 무거운 죄악이다. 길 잃은 인도자를 따라서 여섯 소경 모두 끈 떨어진 염주처럼 줄줄이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구렁텅이에는 일곱 가지 악덕이 우글댄다.
브뤼겔은 소경 여섯을 길게 펼쳐진 넓은 가로 무대에 배치했다. 지평선은 높이 끌어올렸다. 이들은 걸인, 순례자, 나그네 차림이다. 세상의 무대를 지나가는 이들의 행렬은 해골들이 서로의 뼈를 맞잡고 추는 죽음의 무도를 닮았다. 소경들의 머리를 사슬로 묶어 보면 왼쪽 지평선 부근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해서 차츰 오른쪽 화면 모서리로 곤두박질친다. 지평선과 소경들의 행렬은 다른 방향이다. 그림 속의 큰 동선을 두 개 끄집어낸다면 지평선과 사선이다. 이 둘은 그림 왼쪽 귀퉁이에서 시작해서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브뤼겔의 그림이 대개 그렇듯이 하늘 꼭지에 눈을 두고 내려다보면,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도 모르는 커다란 운명의 수레바퀴에 실려서 서서히 회전한다. 그렇다면 소경들의 비극은 단지 그들의 불행이 아니라 눈뜬 소경들이 타고 있는 바보 배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아니면 섭정기 네덜란드의 암담한 운명에다 성서의 비유를 씌웠는지도 모른다.
그림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마른 관목 한 그루가 을씨년스럽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는 ‘플루토의 나무’ 또는 기독 도상에서 자주 나오는 ‘사망의 나무’다. 반대편 오른쪽 귀퉁이 여울가에는 풀꽃이 한 송이 피었다. 붓꽃이다. 기독 미술은 꽃잎이 칼날처럼 생긴 붓꽃을 덕목의 꽃말로 읽었다. 웅덩이에 빠진 첫째 소경은 팔을 들어 붓꽃을 더듬는다. 사망의 계곡에서 구원의 향기를 맡았다.
그림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다. 흰 고깔을 쓴 둘째 소경이다. 그는 우리와 눈길을 맞추면서 외친다. 실명의 눈짓으로 삶의 헛된 가치를 증언하고 죽음의 행렬에 따라 붙으라고 초대한다. 브뤼겔은 빛과 그림자를 움푹하게 패인 눈두덩에 고루 발라 두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이처럼 사무치는 견인력을 가졌던 적은 드물었다. 성서를 설교하는 그림 속의 안내자가 이처럼 공허한 눈빛을 소유했던 적도 없었다
벤베누토 첼리니, ‘그리스도’
1556-62년경.
대리석, 높이 143.5cm. 스페인. 에스코리알.
산 로렌초 엘 레알 수도원
1
도계로 와서 또 하나의 즐거운 일은 도계도서관을 찾는 일이다. 그곳에 가면 값이 비싼 커다란 화집이 꽂혀 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빌려다가 읽고 또 본다. 바쁠 것도 없으므로 반납기간을 한 주간 더 연장해가면서 곁에 두고 내 책인 것 처럼 읽고는 다시 도서관에 보관해놓는다―마치 내 책인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림 읽기에 관한 책들도 곁들여서 읽어내려간다. 역시 천천히, 천천히 읽는다. 미술에 관한 이론서 한 권과 화집 한 권을 대출해서 연장기간까지 2주간 동안 틈틈이 내 영혼을 시원하게 하고 맑게 한다. 그래서 어줍잖은 ‘그림 읽기’도 시도해 볼 염량을 가져보게 된 것이다.
2
이 작품을 보면 좀 당혹스러운데–그래서 나도 괜히 도서관 얘기를 늘어놓고 있나–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난감하다. 전혀 익숙치가 않다. 예수 그리스도-십자가-하나님의 아들-구세주가 도저히 이 적나라한 나체하고는 연관이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우리들을 외식적인 신앙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벌거벗은 채로였다. 예수님의 옷은 로마 병정들이 가져가 버렸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한복음 19:23-24). 옷을 빼앗긴 예수님은 당연히 벌거벗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림이나 조각들을 보면 한결같이 허리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 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위선적인 신앙을 강요했던 것이 바로 이런 그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고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다면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당하신 그 수치를 절실하게 깨달을 때에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알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던 그림이나 조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수치]을 놓치게 하였다. 마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서 경건의 탈을 덧씌우면서 우리를 분리주의자[바리새인]로 만들어 버렸다. 감히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그리겠는가? 하는 경외의 마음으로 했겠지만, 그 처음의 마음과는 너무도 먼 곳에 와 있게 된 것이다.
3
이 작품을 본 것은 데이비드 핀이라는 이가 지은 <<조각 감상의 길잡이>>라는 책에서였다. 역시 도계도서관에 있는 책이다. 이 저자는 이 조각을 힘들게 촬영했다고 적고 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또 다른 훌륭한 작품으로는 첼리니가 흰 대리석을 쪼아 만든 그리스도의 누드상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스페인의 에스코리알(Escorial: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유명한 건축물-역주)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이 작품과 좀 특이한 인연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작품이 16세기경에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왔을 때, 스페인의 국왕은 적나라한 그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다 자신의 스카프를 조각의 허리 부분에 묶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항상 흰 천이 정갈하게 허리에 둘러져 있게 되었다. 언젠가 나는 첼리니에 관한 책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에스코리알에 가서 허락을 받은 다음, 그 작품이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한 작은 성당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허리에 걸쳐 놓은 천 조각을 보고는 나를 안내했던 사람에게 내가 사진을 찍을 동안만이라도 그것을 좀 치워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그럴려면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마드리드 시의 관계 부서를 찾아가 문의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촬영 장비들을 준비하고 다른 부분들의 사진을 먼저 찍고 있을 동안 빨리 좀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람이 문의를 하러 떠났고 대신 자리를 지킬 다른 사람이 한 명 불려 왔다.
삼십 분 가량 지나자 작업복 차림의 신부님 한 분이 총채로 이곳 저곳의 먼지를 털어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그리스도상 앞으로 와서 그 천 조각을 걷어 내고는 조각 전체를 말끔히 청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기뻐서 그분에게 내가 사진을 찍을 몇 분 동안만 그것을 그대로 치워주실 수 없겠냐고 부탁드렸다. 그분이 쾌히 승낙을 해주어서 그 작품이 지닌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몇 통의 필름에 담을 수가 있었다. 내가 촬영을 마치자 그 신부님은 천 조각을 원래 자리에 다시 둘러 놓고는 총총히 그곳을 떠나셨다.
이윽고 처음의 그 안내인이 되돌아오더니 책임있는 관계자들과 연락을 해보았지만 불행히도 그 작품의 누드 상태로는 촬영 허가를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미 내가 필요한 사진을 다 찍었다느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은 몹시 화를 냈다. 내게 그 사진들을 폐기시키겠다는 각서를 쓸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크게 혼날 줄 아시오!”라고 겁까지 주었다. 좀더 지위가 높은 한 관리는 불법적인 원판들을 확실히 없애기 위해 내 필름들은 스페인 정부의 관계 당국에 의해서만 인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단 한 장의 사진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 만일 우리 집사람이 기지를 발휘하여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체포까지 당할 뻔했다. 아내는 내가 대부분의 필름들을 이미 안전하게 치워 두었다는 것을 알고는 카메라에 남아 있는 필름만 꺼내서 그게 전부인 양 주어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듯이 일부러 더 큰 제스처를 쓰며 나를 못살 게 군 그 사람에게 필름을 넘겨 주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우리는 풀려났다. (데이비드 핀 지음 / 김숙·이지현 옮김 <<조각 감상의 길잡이>> (시공사, 1993), 77~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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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어떤 수치와 욕을 당하셨을까?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스캔된 사진 한 장으로도 뭔가 짚여오는 것이 있다.
<출처 : http://dokyesungsan.net >
한스 홀바인,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한스 홀바인 –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글 : 이주헌 미술 평론가
한때 바젤에서 활동했던 홀바인의 대표작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홀바인은 썩어들어가고 있는 앙상하고 싸늘한 주검을 통해 16세기 당시 부패한 카톨릭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닫힌 공간. 세상과 절연된 곳. 그 곳에 썩어져가는 육신이 외롭게 누워 있다. 마른 명태처럼, 꺾인 나무가지처럼 그렇게 버려진 육체. 시신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인간 형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쓸쓸한 이미지다.
돌을 깎아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경배도 드리는데, 청동으로 주물을 떠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아름답다고 연신 탄성을 울리는데, 주검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따뜻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얼음 같은 외면과 절벽 같은 이별만이 있을 뿐이다.
한 때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했던 화가 홀바인(1497~1543)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1521년)은 그 단절의 깊은 골을 죽은 예수를 통해 조망해 보는 작품이다.
파랗게 변색된 얼굴과 손발, 그리고 극심한 고통으로 뒤틀린 몸뚱아리. 과연 이렇게 비틀리고 짓이겨진, 썩어져가는 육체가 부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다는 것은 눈 앞의 이 냉엄한 현실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홀바인이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것은 지금 이 그림 안에 없다. 홀바인은 무엇보다 예수의 영혼을 그리고 싶었다.
주어진 소명과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깊이 자각했던 한 영혼. 그것들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 영혼. 그렇게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오히려 그의 육신은 이리도 망가지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홀바인은 그 망가진 육신을 통해 절묘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예수의 영혼을 생생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홀바인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유럽은 바야흐로 종교개혁의 열기에 휩싸여들었다.
역사가들이 당시 교황들에게 ‘패륜아’니 ‘탕아’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 것을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가 상당한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맞섰던 교황 레오 10세에 대해 한 카톨릭 역사가는 “사도 시대에 살았더라면 교회당의 문지기로도 적합하지 않았을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렇듯 세속화되고 권력과 돈에만 혈안이 돼 있던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들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에라스무스는 교황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
홀바인이 이렇게 남루하고 비참한 그리스도를 그린 데는 바로 화려한 보물과 예술, 기름진 음식에 취해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또한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에라스무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홀바인은 스위스 바젤로 이주해오면서 미코니우스라는 한 인문주의자로부터 형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배웠다.
작가로서의 명성이 쌓이면서는 당시 바젤에 와서 살던 에라스무스와 직접 교분을 쌓는 한편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의 예술에서 늘 꼿꼿한 인문주의자의 격조가 느껴지는 이유이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은 그러나 에라스무스나 홀바인이 기대한 세상을 그 당대에는 만나보지 못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끝내 유혈충돌로 이어졌고 양측의 불관용은 16세기 중반 이후 한 세기 동안 피비린내나는 폭력과 종교전쟁을 야기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는 양자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왕이나 제후의 절대권력 아래 있지 않고 독립적이었던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특히 급진주의가 세를 얻었다.
바젤도 폭력적 상황을 겪었고 이를 피해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한 에라스무스는 당시 홀바인이 그린 그의 초상화에도 나타나듯 매우 지쳐 있었다.
예수는 이 시기의 유럽을 위해 아마도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고 싶었을 것이다.
오토 딕스, ‘동방박사의 방문’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는 마리아의 표정,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남다르다. 인물들의 외모에서는 평범함만이 느껴지지만, 모자의 표정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만 같다. 동방박사는 세 사람으로 각기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그렸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그냥 얼핏 보기에는 흑인 같은데, 그럼 이 동방박사 세사람이 모든 인류를 대신하는 것인가? 작가에게 질문할 수 없으니 혼자 추측해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