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오, ‘성안’


정말로 숨이 멎는 그림이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경외심이 들도록 만드는 그림이다..


저 큰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로 응시하는 모습이 나에게 무언가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성안..


누군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그리스도의 땀을 닦아 주었는데 그 세마포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자 기적이라고 하며 그 얼굴을 성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말 머라고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작품이다..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33, oil on wood, Pinakothek at Munich

예수님의 시체를 내리는 장면을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 십자가는 T 형 십자가로 그려져 있다.
빛이 쏘는 곳은 예수님의 전신. 이 그림이 특이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하체가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보면 하체에 하나 걸치고 있는데. 그것은 화가가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일 뿐. 본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셨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시고 십자기에 오르셨다. 최고의 치욕이었다.

그분은 침을 맞았다. 어쩌면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인 수모가 더 견디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우리 나라 여인들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던 것을 보면 못숨보다도 정절, 혹은 자존심, 자기 정체성은 인간에게 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잃는 것은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수욕도 참아내셨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 분은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 머리가 아니라 동일한 감정으로.

십자가에 핏자국이 너무나 선명하다. 왼손, 오른손, 그리고 기둥에, 예수님께서는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또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용균형의 글로 알게된 것이다. 형의 글을 여기 실어본다.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 팔을 붙잡고 있는 파란 옷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림이 작아서 표정이 잘 안드러나지만 그래도 이 사람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책에 이 사람에 대해 쓰여 있는 표현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파란옷의 이 사람은
 뉘우치는 그리고 고통으로 동요된 모습으로 슬퍼하고 있다.’
그 얼굴을 다시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책에 실린 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이 파란옷의 사나이의 표정을 좀더 잘 볼 수 있습니다.
(파란옷의 사내는 그림의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더 슬픈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느끼는 그 마음이 이 사람 얼굴과 동작에서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이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봅시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길래…
이 사람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그림에 등장합니다.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그린 그림에서 못박힌 예수님의 발 옆에서 울고 있는 군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요한도, 베드로도, 그 밖의 사도도 아니고, 실제 군인도 아닙니다.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십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
그림을 보면서 찬송가가 생각났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의 고난을 함께 하고자 했던 렘브란트…
오죽 했으면 이전에 어느 화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림…자신을 그 현장에 그려넣었을까요.
그는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정에 치우칠 수도 있겠죠.
허나 그처럼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군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 왼편에 저 팔을 끌어안고 있는 사나이가.. 바로 램브란트 자신이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그는 비통했을까?
바울이 그랬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유는 그의 생명(부활)에 참예하기 위함이라고. 우리가 그의 죽음에 동참하면 우리 육신은 죽은바 되고, 우리 영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그러나 목격하는 것이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육신과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율법에 의한 죽음이었다. 우리도 그분과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예수님과 똑같이 우리는 부활한다. 그것은 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의 비밀이 아닐까? 우리가 부활하면 율법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구속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감격이 넘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십자가 앞에서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도 못박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이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따라가는 것이지 못박히는 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율법에 대해 죽으라는 의미이다. 율법에 대해 죽으면 우리의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것이 놀라운 신비이다. 영원한 자유함을 누리는 비결이다.

해바라기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정물화가 아닐까.
정물화라면 이쁘게 그리고 싶을 것인데.

고흐가 왜 해바라기를 즐겨 그렸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야할 해바라기들이 다 제각각 자기 앞을 보고 있다.
고흐가 무슨 의도로 그렸던지, 내가 보기엔 이 해바라기들은 그래서 저렇게 다들 고독하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The Jewish Bride, 1665-67, Rijksmuseum, Amsterdam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그려낸 렘브란트의 그림. 어떤 책에선가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을 읽었는데, 그 사람은 이 그림에 대해서 대단한 호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남녀의 엄숙하면서 진지하고 따뜻한 얼굴 표정과 시선, 여인을 반쯤 감싸 안은 듯한 자세와 손길.

특히 반쯤 남자의 손을 덮은 여인의 손은 굉장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저 손이 내려가서 자기 두 손을 마주 잡은 모습으로 그렸다면 이 그림의 느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반쯤 포갠 부부의 저 두 손이 이 그림에서 굉장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포인트가 아닌가 한다.

한스 로크마커는 ‘ART – need no justification(기독교와 현대예술 – IVP)’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예술은, 주어진 삶의 위대성에 대한 경탄과 함께 성령의 적극적인 심성으로 나태는 등 실로 깊은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주제가 ‘기독교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그의 수난곡 못지 않게 기독교적이며,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 역시 그의 종교적 주제의 그림 못지 않게 기독교적인 것이다. 참으로 예술가에게 복음 전도자가 되라고 요규하는 것은 그가 예술의 의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다른 활동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자든지, 먹든지, 혹은 열심히 일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다. 우리 기독교는 경건한 순간들, 종교적 행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도 복음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고흐,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


고흐 그림중에 아마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쳐다본 그림들 중 하나

타오르는 듯한 나무 울렁이는 하늘, 난 이그림에서 화가의 상상력과 감성이라는 걸 가장 절실히 느꼈다

난 하늘을 이렇게 그린다는 것 자체가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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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이 그림과 함께 전시해야 한다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의 대낮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쌍의 그림은 휘트먼의 시 모음 제목인 ‘대낮에서 별이 빛나는 밤으로(From Noon to Starry Night)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보리밭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삶이다. 고흐는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까지 밀레의 그림이 표현해 주는 것과 같이 가슴 깊은 감명을 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나는 ‘씨뿌리는 사람’ 앞에서 오래 오래 서 있었다’

고흐의 말이다. 씨를 뿌리고 자라나고 거두는 이 보리밭을 통해 그는 인생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