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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용 가스계량기 생산라인 |
가스용품(가스기구) 중 가장 일반적인 제품이 LPG용기와 조정기, 호스, 밸브이다. 또한 이들 가스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가스경보기 및 차단장치, 가스검지기 등 가스안전기기이며 가스계량기도 가스공급사와 사용자간의 신뢰를 형성하는 제품으로 가스산업 발전과 더불어 그 발자취를 함께 해왔다.
이러한 가스용품들은 가스신문이 창간된 20년 전 당시보다 양적인 면에서 위상이 크게 달라진 제품도 있다. 질적인 측면에서는 업체들의 노력과 검사기관의 관리 강화 등으로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평가다. 다양한 가스용품이 지난 20년간 걸어 온 과정을 정리해 봤다.
차별화된 품질·기술력으로 해외시장서 호평
절연기능의 플랜지밸브 개발, 매몰형도 국산화
LPG용기 ’89년 140만개→’09년 36만개로 급감
체적거래제 시행…LPG호스시장 치명타 ‘허덕
■ 인터뷰 – (주)신우전자 이기원 사장
20년째 국민생명과 재산보호 앞장 ‘자부’
“가스안전과 관련된 정책은 강화돼야”
“가스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우리나라의 안전 불감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모토로 1989년 창립해 올해 20년째를 맞는 신우전자의 이기원 사장(53)은 안전은 이론이 아닌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언제 어디에서 가스사고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정기적인 점검과 동시에 가스누출을 경보하고 밸브를 차단하는 안전장치를 활용할 때 가스안전이 확보된다는 설명이다.
“창업 초기에 가스안전기기 업계의 경영 분위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제조업체들은 제품생산을 위한 제조설비와 검사장비, 서비스망을 구축해 최고의 제품만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품질우선주의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5년경부터 소방업계의 자동식소화기 시장 진출로 혼란이 왔습니다. 제조 및 검사 설비가 없어도 시장에 참여가 가능하다보니 가스경보기 및 차단장치의 품질수준이 후퇴하게 된거죠.”
현재 가스안전기기 및 자동식소화기 시장은 30개사가 난립해 오히려 가스안전기기 산업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명을 다루는 제품을 아무나 생산할 수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완벽한 제조 및 검사설비를 갖춘 곳만이 국민들에게 우수한 안전기기를 보급할 수 있으므로 안전과 관련된 분야의 정책은 강화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가스안전기기를 소비자가 직접 구매할 때는 가격보다 품질이 우선이지만 건설사나 설비업체들이 단체납품을 받을 때는 품질보다 가격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것도 안전 불감증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관련기관이 제조업체들보다 앞서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며 관련법과 시행규칙 등이 신축성 있게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관리가 뒤따르지 않을 때에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이제는 소비자들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안전기기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관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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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대의 LPG용기 생산업체였던 경희강재의 하차장 |
LPG용기
LPG용기는 1980년대 중반 경희강재 등 20여개의 업체에서 연간 생산량이 250만개에 달할 정도로 성수기를 누렸다. 그러나 1989년에는 15개사에서 140만개로 생산량이 감소하더니 1992년에는 14개사에서 120만개로 줄었다. 1994년에는 20kg용기가 38만개 생산되는 등 전체 66만개로 급감했다. 1995년에는 서울경금속이 국내 최초로 20kg 알루미늄 용기를 개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해안지역에 2만5000개, 일본시장에 9만여개를 수출했다. 하지만 이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
이런 과정 중에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도 있었다. 1995년 한국코인은 위조각인 한 13kg용기 6천여개를 유통, 본지의 한 지면을 장식했다.
2001년 117만개로 일시 증가했던 용기는 2002년 다시 57만개로 감소한 이 후 지난해까지 4년 연속 30여만개로 줄었다. 특히 1983년부터 용기를 생산해오던 국내 최대의 메이커인 경희강재가 2004년 생산을 중단한 것은 더 이상 시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FRP용기에 대한 산자부 검사특례가 인정되어 13kg과 15kg 수입품 2종이 가스안전공사의 검사를 거쳐 서울, 부산 등 10개 지역에서 6개월 한시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지난해 칠보콤포지트에서 30kg을 최초로 국산화 했다. 2009년 현재 민수용 용기 제조업체는 윈테크와 성신공업, 캔택, 칠보콤포지트 등이며 자동차용은 (주)캐놀 등 5개사이다.
LPG용기시장은 차량용을 제외한 민수용의 경우 도시가스로의 전환, 소형저장탱크 보급 확대 등으로 가장 크게 퇴보하는 품목이 되었으며 향후 전망도 밝지 않다는 분석이다.
조정기·호스·기화기
LPG조정기는 민수용 LPG용기 시장만큼이나 1980년대에서 1990년 중반까지가 가장 활발한 품목이었다.
1989년 당시 조정기 시장은 일신금속공업사와 화영상사, 우성정공 등 3사가 주축이 되어 제품을 생산했다.
1992년 우성정공이 생산을 중단했으며, 1995년에는 일신금속공업사의 조정기가 무더기로 불량이 발생해 회수명령을 받는 등 대혼란이 빚어졌다.
이렇게 시장이 조금씩 감소하는 가운데 조정기 업계는 새로운 업체들이 탄생했다. 1999년에는 대진정공에서 발신형 절체조정기 및 일반 조정기를 개발해 시장에 뛰어들었고 1998년에는 일본의 이토코키에서 한국법인인 한국이토를 설립, 다양한 조정기를 생산했다.
2000년에는 일신금속공업사가 부도로 문을 닫았으나 2005년에는 휴콘스테크놀러지가, 2007년에는 영창이엔씨가 각각 생산에 새로 참여했다. 현재 LPG조정기는 화영상사 등 4개사에서 생산하고 있으나 LPG시장 감소로 성장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대성계전은 199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도시가스용 조정기를 생산, 보급중이다.
호스시장도 LPG조정기처럼 성장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1990년 중반부터 시작된 LPG체적거래는 배관사용으로 LPG호스업체에는 치명타였다. 우성정공과 일신금속공업사의 생산중단으로 화영상사를 중심으로 야성, 일신메탈 등에서 생산해오다 지난해에는 세영메탈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도시가스용 호스시장에는 화영상사, 코푸렉스 외 2008년 화승엑스윌이 새로 참여했다. 동아금속주름관은 198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스관용 금속플렉시블호스를 개발, 가스안전공사의 검사를 받아 출시하기 시작했다. 또한 1997년 9월 도법 시행령 개정으로 금속플렉시블호스는 매립 및 매몰이 허용되어 1999년부터 실내 가스공급용으로 시작, 지금은 대부분의 주상복합 및 일반 아파트의 실내배관은 금속플렉시블호스를 매립형으로 사용 중이다.
1999년 신성금속과 2001년에는 아세아유니온에서도 가스용 금속플렉시블호스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코뿔소, 로얄금속, 두본후렉시블, 중원후렉시블 등에서도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가스보일러 연결용 금속플렉시블호스는 2004년과 2007년 두차례에 걸쳐 누설전류에 의해 이음쇠 부분이 용융되는 사고가 발생해 절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LPG기화기는 20년 전 한진공사와 도아기계공업, 삼진에너지 등이 국내 대표적인 업체로 제품을 생산했다. 1972년 설립된 한진공사는 2000년 LPG기구유통업체인 거봉상사에 매각, 거봉한진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나 1978년 설립된 도아기계공업은 2002년 부도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 회사는 이후 화성엔지니어링이 인수해 지금까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1994년에는 대성에너지(현 신용에너지)가 기화기 시장에 신규 진출했으며 2002년에는 엔텍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2005년 삼진에너지가 부도가 나며 문을 닫은 가운데 일부 직원들이 삼진유화를 설립했다.
LPG기화기는 역사에 비해 시장성장이 더딘 제품으로 액유출 사고 등 가스사고의 중심에는 항상 기화기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제조업체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액유출차단장치 개발, 소형화, 디지털화 등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후 줄어드는 LPG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소형 절전형 등 차별화된 제품개발로 해외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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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경보기 생산공정 |
가스밸브
가스밸브는 배관용과 용기용 그리고 퓨즈콕이 대부분이다. 고려특수금속은 1988년 국내에서 최초로 10㎏/㎠ 플랜지식 볼 밸브에 대해 KS를 획득하는 등 지금까지 플랜지식 밸브를 생산하고 있다. 화성과 에쎈테크, 울트라테크, 디아이테크 등이 국산 KS플랜지 밸브업체로 참여하고 있다.
과거 1995년에는 영진기계에서도 플랜지 밸브를 생산했으나 부도로 문을 닫았다. 당시 영진기계는 757개의 플랜지 밸브를 위조각인해 유통시켜 문제가 됐다. 플랜지 밸브는 1995년 절연체를 체결한 제품이 개발돼 1996년 화성에서 이를 생산했다. 이에 앞서 1992년에는 만영기금에서 황동 볼 밸브에 절연체를 결합한 절연밸브를 개발, 이후에 화성으로 기술이전 했다. 1995년에는 태양기업사에서도 플랜지형 절연 밸브를 개발하는 등 입상 밸브는 전부 절연밸브로 대체되어 갔다.
플랜지 밸브의 경우 1990년 후반기 들어 국내 밸브가격 경쟁력 저하로 저렴한 중국산 제품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건설사 등 대규모 수요처들이 국산을 선호해 중국산이 자리를 잡지 못하자 1998년에는 중국산 가짜 KS제품이 들여와 보급되기도 했다. 이같은 사항은 본지의 추적취재로 기사화되면서 수입이 중단됐다.
매몰용접형 볼 밸브는 수입품만 보급되다가 1990년 한국기계화학(현 KMC)에 의해 국산화됐다. 이어 대한산업특수밸브에서도 개발했으나 1997년 부도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뒤 매몰형 밸브는 1999년 화성과 2000년 케이피씨 그리고 대본엔텍, 대화지앤브이 등이 차례로 생산에 참여하는 등 춘추전국시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2001년 대본엔텍과 대화지앤브이는 문을 닫았고 케이피씨도 생산을 포기함에 따라 현재는 KMC와 화성 2개사만이 생산하고 있다.
2002년에는 매몰형 밸브의 퍼지관과 스템기준이 규격화됐다. PE 볼 밸브는 1996년 폴리텍이 국산화에 성공한데 이어 2년 후에는 대연정공도 생산함으로써 수입대체화에 성공했다.
황동 볼 밸브는 화성이 20년 전부터 시장을 주도해온 가운데 태양기업사와 에쎈테크, 그리고 중국에서 생산되는 KS밸브가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다. 2001년부터 본격 수입된는 중국산은 국산보다 가격경쟁력에서 앞서 해마다 수입물량이 늘고 있다. 하지만 가스안전공사에서 매년 수집검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품질향상이 안되자 가스업계에서의 선호도가 떨어지고 있다. 2007년 국정감사에서는 중국산 가스용 KS 황동밸브의 품질저하와 관련한 본보의 심층보도가 이슈화되기도 했다.
에스엔에스밸브는 1998년 국내 최초로 초저온용 볼 밸브를 개발, 한국가스공사 인수기지 공급에 이어 2003년부터는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LNG선 건조사에도 납품하고 있다.
그밖에 LPG용기용 밸브는 20년 전부터 영도산업과 화성, 한국종합밸브에서 생산했으나 1976년 설립된 한국종합밸브는 1996년 회사를 매각함으로써 생산을 중단했다. 1994년 우일금속(현 에쎈테크)에 이어 1995년 대우금속이 제품을 개발, 시판에 나섰으나 대우금속은 1997년 밸브생산라인의 화재로 생산을 포기했다.
그 뒤 LPG용기밸브는 영도산업과 화성, 에쎈테크 등 3사에서 생산해오다 지금은 덕산금속 등 4개사에서 차단기능형 용기밸브를 생산 중이다. 특히 2008년 3월 ‘차단기능형밸브 차단기능 못한다’는 본보의 보도가 나가면서 100만여개 이상의 밸브에 대해 회수명령이 내려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아직까지 법제화되어 있는 과류차단형 LPG용기밸브는 개발업체와 지경부간의 법정공방이 현재 대법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다.
가스안전기기
가스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안전이다. 이처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가스경보기와 차단장치, 가스검지기는 많은 업체들이 신규로 참여하는 등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가정용 가스경보기는 20년 전 게코전자와 한국벨트가 시장을 주도했으나 1989년 설립된 신우전자에 의해 시장 주도권의 변화를 가져왔다. 1994년 가스경보기 시장은 신우전자 등 10여개사에서 참여, 42만개를 생산했으나 제조업체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 졌다. 결국 대기업인 금성계전이 생산을 중단했으며 한국벨트도 사업을 포기했다. 1995년에는 전자파장애시험 추가 등 가스경보기의 검정기준을 강화함으로써 품질향상을 가져왔다.
갈수록 시장이 악화되면서 1996년 게코전자가 가스경보기의 검정필증을 위조한 사태가 본보의 추적보도로 기사화되면서 결국 게코전자는 부도로 문을 닫기에까지 이르렀다. 2006년에는 가스경보기에 대한 KS표준화작업이 완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스경보기(소방산업기술원)와 가스경보차단장치(가스안전공사)의 검사 이원화는 업계 발전의 장애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스경보기 시장의 성장이 정체된 가운데 2001년부터는 타이머가 부착된 가스차단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인공지능 가스잠금장치 등이 개발되는 등 제품의 첨단화가 빨라졌다. 2004년에는 가스타이머 생산업체가 10개사에 육박하는 등 높은 관심을 받았으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주방에서의 가스레인지 과열로 인한 화재사고가 빈번하자 지난해부터 각 지자체 및 가스안전공사, 소방서 등은 타이머형 가스안전기기 보급에 나서고 있어 제조업체들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가스계량기
가정용 가스계량기는 20년 전 대성계전과 금호전기, 대한가스기기, 금성계전, 대한전선 등에서 생산했으나 금호전기와 대한전선은 시장을 떠났다. 1997년 금호전기 계측기사업부는 분사해 지금의 위지트로 생산을 이어오고 있다.
1998년에는 극동기전이 가스계량기 생산에 참여, 2001년 마이컴 가스미터를 개발했다. 그러나 계량기 시장은 3등급 가스계량기가 1만3천원까지 떨어지는 등 경쟁이 극심했다. 결국 인덱스 커버 크랙 발생, 카운터 고장 등의 하자로 업계는 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2002년 울산시에서는 봉인위조 및 카운터 조작 등의 산업용 가스계량기 조작사건이 발생, 계량기 업계 및 도시가스사를 긴장시켰다. 2005년에는 가스계량기의 국제기준 부합화 작업으로 신형식 인증품이 본격 생산되었으며, 2006년에는 최대유량 1000㎥/h(G650)이하의 모든 가스계량기도 형식승인을 받도록 계량법이 개정됐다.
2006년에는 지텍산업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동시에 극동기전은 대구시 신천동 하이페리온 주상복합빌딩에 국내 최초로 374대의 마이컴 가스미터를 설치했다. 2007년 대성계전은 산업용 가스계량기의 첫 형식승인을 받는 등 업체들의 개정된 계량법에 의한 형식승인이 이어졌다.
2008년에는 옴니시스템이 대단위 아파트에 최초로 디지털 가스계량기를 납품함으로써 가스계량기의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고 나섰다. 가스계량기 시장은 지난해 신품 176만개, 수리품 137만개 등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다.
[가스신문 창간 1989년… 그때, 그리고…] 가스안전분야 |
1990년대 대형사고 계기로 안전관리 대폭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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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전주의 CNG충전소에서 충전 중 CNG용기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
지난 20년간(1989~2009) 가스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해 가스의 대중화가 이뤄져 누구나 쉽게 가스를 사용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됐다. 하지만 이 기간 중 역사에 기록될 대형가스사고가 연이어 발생하기도 했다.
1994년 서울 아현동 가스공사 정압기지 폭발사고와 이듬해인 1995년 대구지하철 공사장 도시가스폭발사고, 1998년 경기도 부천LPG충전소 폭발사고 등을 비롯해 지금까지 매년 200~300건의 가스사고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스에너지 정책은 가스사고의 아픔을 겪으면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대형 가스폭발사고를 계기로 지금은 보편화된 배관안전점검원, 배관 시공감리제도 등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검사제도는 없는 법, 최근에는 당시 신설됐던 제도들의 완화가 논의되고 있다. 20년간 가스안전과 관련된 사항들을 짚어 본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이런 저런 제도’
’‘고미제’ 논란만 일으키다 3년 만에 폐지
KOLAS의무화, 차단형밸브도 갈등 야기
1990년대 후반 들어 부탄캔에 충전된 부탄을 흡입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흡입을 차단하기 위해 부탄캔에 고미제(苦味劑)를 주입하는 방안을 1998년 법제화한다. 그러나 고미제는 시작부터 논란이 일었고 급기야 부탄캔 제조업체에서 고미제 충전 중 주입구가 막혀 생산이 중단되는 석출사태가 벌어진다. 그 뒤 정부는 실수를 인정하고 법제화 4년 뒤인 2002년 관련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른다.
2000년 들어서는 불량 LPG유통이 화두로 떠올랐다. 유통되는 LPG용기에 유분이 많아 LPG품질이 사회문제로 지적된 것.
조사결과 LPG품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에 2002년부터 LPG품질검사를 시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2004년에는 재검사기관의 기술수준을 높인다는 목표아래 KOLAS 지정 의무화가 역시 찬반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시행기간 내내 KOLAS 의무화에 대한 반대의견과 예상보다 필요성이 낮다는 판단에 따라 지금은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정부의 무리한 진행으로 논란이 불었던 제도는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2007년 11월에는 고의로 인한 LPG사고 예방을 목적으로 차단기능형 LPG용기용밸브 사용이 의무화됐다. 하지만 시행 2개월 만에 부적합 제품이 발견되면서 수거와 폐기가 되풀이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불량 LPG유통으로 LPG품질규정 제정
준비 부족으로 현장서 제도정착 갈등도
가스레인지 소화안전장치 의무화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인 1989년 가스레인지의 소화안전장치 설치가 의무화됐다. 지금은 모든 레인지에 장착됐지만 20년 전에야 겨우 선택사항에서 의무사항으로 변경된 셈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가정에서 LPG를 사용하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LPG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판매시설의 정기검사제도를 신설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후 대형 석유화학시설의 노후화가 문제로 지적되면서 1993년 안전진단제도가 마련됐다.
하지만 1999년 규제완화 차원에서 이 제도는 폐지되고,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고압가스시설을 대상으로 4년마다 정기검사를 시행하는 제도가 신설됐다.
도시가스사용이 급증하던 1990년대 중반 가스보일러 설치도 크게 늘었다. 때를 맞춰 1994년 가스보일러 제조기준이 개정돼 제품별 안전장치의 세부규정이 마련됐다.
가스산업인에 대한 지원과 포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1994년 정부와 한국가스안전공사가 주관하는 제1회 가스안전촉진대회가 개최됐다. 첫 회 수상자로는 대통령 표창에 (주)유공 울산Complex(단체), 김재성 호유에너지(주)여천기지 사원(개인)이, 국무총리 표창에는 (주)럭키여천공장, 한국가스신문사(이상 단체)가 선정됐다.
연이은 가스사고로 암울
1994년 12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스공사 정압기지에서 계량기 보증작업 중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해 1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건물 145동과 차량 93대가 파손됐다. 이 사고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면서 정부는 부랴부랴 보름 만에 도시가스안전관리강화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뒤인 1995년 4월 대구지하철 공사장에서 또 다시 도시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해 101명이 사망하고, 201명이 부상을 당하는 역대 최악의 가스사고로 남겨졌다.
이 사고를 계기로 대대적인 도시가스분야 안전관리 강화대책이 마련됐고 현재까지 대부분 유지되고 있다.
1996년 퓨즈콕 설치가 의무화됐으며 1998년에는 민간을 중심으로 협의회를 구성, 퓨즈콕 보급 속도를 높인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부탄캔의 고미제 주입이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부탄캔을 흡입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가 잇따르자 정부가 고미제 주입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제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등 논란만 불러온 뒤 2002년 관련조항이 삭제됐다.
2000년 초반에는 불량 LPG가 유통되면서 LPG품질규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으며 2002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돼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2001년에는 우리나라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본사가 대한민국 가스산업대상을 제정해 안전부문에 대한 시상을 추진했다. 당시 첫 회 안전부문은 SK가스가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어 LPG사고 예방과 건전한 유통문화 정착을 위해 같은 해 11월에 안전공급계약제도가 전국으로 확대 시행됐다. 찬반 논란 속에서 시행된 안전공급계약제도는 지금도 시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갈등의 골이 깊다.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 3월 인천 부평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LPG폭발사고가 발생해 집안에 있던 6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가스배달원 안전교육을 의무화했다.
규제완화 바람
2000년대 이후 강화되기만 했던 각종 제도에 규제완화의 바람이 불었다. 2002년부터는 2년마다 이수해야 하는 안전관리자 정기교육이 폐지됐으며 2003년 실습시설을 대폭 늘린 가스안전교육원이 시흥에서 천안으로 이전, 새롭게 문을 열었다.
2004년에는 재검사기관의 품질관리 수준 향상을 위해 KOLAS 지정 의무화가 시행됐다. 도입 초기부터 업계와 마찰을 빚던 이 제도는 끝내 시행 5년만인 올해 폐지될 운명을 맞았다.
2005년 1월에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CNG버스 생산라인에서 용기가 폭발한다. 이어 그해 7월 전주 덕진CNG충전소, 2007년 구리, 2008년 청주에서 CNG버스용기가 연이어 폭발해 시민의 발인 버스의 안전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2005년에는 특정사용시설 검사를 자유화하는 지자체가 늘어나면서 검사권을 놓고 가스안전공사와 민간검사기관이 물밑 속에서 한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2008년에는 굴착공사 정보지원센터가 시범실시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됐으며 올해부터 가스기술기준 코드화가 시행돼 민간(위원회)에 의한 기술기준 개정이 가능해졌다.
■ 태양산업 – 1989년 승일제관서 분리, 창사
부탄캔 생산 국내는 물론 세계 1위 ‘우뚝’
수출 1993년 100만불→2006년 3000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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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은 태양산업의 대표 브랜드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탄캔으로 등극했다. |
태양산업(대표 현창수)은 부탄캔과 에어졸캔, 화장품(캔), 자동차용품(캔) 등을 생산하는 종합 에어졸캔 생산기업이다. 이중 부탄캔 브랜드인 ‘SUN’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제품이다.
태양산업은 지난 1989년 당시 승일제관(현 승일)에서 분리, 창사됐다. 현재는 SUN 브랜드 제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종합 에어졸기업으로 우뚝섰다.
현재 태양산업(계열사 포함)의 SUN 부탄캔은 시장점유율이 국내에서 무려 70%내외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인증 취득과 수출규모에서는 언제나 업계에서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기록 메이커다.
1993년 부탄캔(에어졸캔 포함) 생산기업으로는 최초로 수출 100만불탑을 수상한데 이어 이듬해에 500만불, 1996년 1000만불 등 불과 3년만에 수출규모가 10배나 증가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후에도 수출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2000년 2000만불, 2006년 3000만불을 돌파했으며 올해 4000만불 수출이 기대되고 있다.
태양산업의 SUN을 사용하는 국가는 40여개국에 이르며 일본에서는 사용되는 부탄캔 2개 중 1개꼴로 SUN 부탄캔이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경기한파에도 불구하고 부탄캔이 수출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태양산업의 약진 탓에 후발주자도 힘을 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나라는 부탄캔 생산 세계 1위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태양산업 설립 20년 동안의 인증과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95년 업계 최초로 ISO9002인증을 획득한데 이어 1998년 UL마크, 2000년 독일 TUV-RS 제품검사에 합격했다.
이밖에도 태양산업은 2004년 중국 청도에 생산공장을 설립하고 가격경쟁력을 갖춘 신제품을 출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특히 기존 수출국을 벗어나 해외시장 확장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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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신문 창간 1989년… 그때, 그리고…] 도시가스분야 |
‘기름 없이 타는 등불’로 시작해 이젠 ‘국민 연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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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도시가스공급은 나프타 분해방식(CRG)이다보니 도시가스사가 제조공장 모습을 띠고 있다.(최초 민영도시가스사인 대한도시가스의 옛 모습) |
87년 나프타방식→LNG전환…92년 100만톤→2004년 150억㎥ 돌파
70년-서울시도시가스사업소 탄생, 78년-민영도시가스사 ‘대한’ 첫선
우리나라에 ‘가스’라는 에너지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시기는 개항 직후 일본으로 파견된 개화파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통해서다. 일행이 당시 도심의 가로등으로 설치되어 있던 ‘기름 없이 타는 불’이라는 가스등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가 1876년이다.
그 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인 경술국치 이전인 1905년 일본의 2대 통감 증내황조의 아들 증내관치가 가스사업을 벌이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에 가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일한와사주식회사(日韓瓦斯株式會社)를 설립하게 된다. 당시 가스사업은 권동수 등이 독점권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1906년 통감부는 “이전에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된 특허 중 일부는 무효로 간주한다”는 통감부령을 고시해 권동수 등이 허가받은 가스사업권을 강제로 박탈하기에 이르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스등 점화는 1909년 11월 3일이다.
도시가스산업 스타트
1935년 석탄가스 제조설비가 완공되면서 유연탄을 원료로 제조한 가스를 자체 배관망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취사용으로 공급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국내에 LPG시대가 열리고 LPG수요가 65년 20만톤, 71년 49만톤, 74년 112만톤으로 급증하면서 정부는 도시연료의 현대화를 추구하기 위해 도시가스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서울시(70년 10월 1일, 서울시도시가스사업소 발주)는 시범적으로 용산구 이촌동에 LPG/Air 방식의 설비를 1971년 5월 완공해 3000여 가구에 가스를 공급한다. 이어 1972년 11월 14일 서울시도시가스사업소(서울시영도시가스)가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분해 방식의 설비를 만들어 도시가스를 공급한다. 우리나라 도시가스의 시초인 것이다. 그리고 1978년 7월 7일 (주)봉명에서 신규법인인 대한도시가스(주)라는 이름의 민영 도시가스사가 탄생하게 된다.
동력자원부 탄생 후 관련법 제정
우리나라의 가스법령이 실질적으로 제정·정비된 것은 1978년 동력자원부(현 지식경제부)가 발족되면서부터다.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기 보름 전인 1978년 12월 5일 동력자원부는 가스사업법(법률 제3133호)을 제정하게 된다.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으나 비로소 체계적인 법령이 제정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며, 이 법률은 7장 및 부칙으로 구성돼 1979년 2월1일자로 시행됐다.
가스사업법 제정에 이어 1979년 2월8일 가스사업법 시행령(대통령령 제9311호)이 제정된 다음 11월 16일 일부 개정됐다. 그후 1983년 12월31일 도시가스사업법(법률 제3705호)이 제정됨으로써 현실을 반영한 도시가스 법령이 사실상 첫 선을 보이게 된다.
전국 32개 도시가스사 구축
1980년 초부터 도시가스사업에 뛰어드는 민영 사업자들이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다.
81년 부산도시가스(3월4일)와 극동도시가스(현 예스코:3월31일)가 설립되며, 82년께 해양도시가스(82년 5월)가 연이어 설립됐다. 또 같은 해 연탄사업에 주력해 왔던 삼천리가 경인도시가스(주)를 인수하면서 도시가스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또 전북도시가스(6월23일), 목포도시가스(7월15일)가 설립됐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처음으로 부산도시가스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도시가스를 공급하게 됐다. 82년 10월 26일이다. 서울시영도시가스가 아파트 단지에 공급했던 시기가 1971년인 것을 감안할 때 서울과 지방간의 도시가스 공급은 10년 차이가 난다.
그 후 도시가스사업에 민간사업자의 참여가 두드러지면서 1998년 (주)지에스이, 1999년 제주e도시가스가 도시가스사업자로 막차를 타 전국 각 시·도에 1~2개의 도시가스사업자인 32개사가 지역별로 자리를 잡게 됐다.
초창기 도시가스사들은 코크스를 주 연료로 한 나프타분해 방식(CRG)이었다. 원료인 나프타에 촉매제를 투입해 가스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따라서 가스공급을 위해서는 제조공장이 필요했다.
공급방식 전환(CRG→LNG)
당시 가스제조 기술이 필요하다보니 비료공장의 기술 인력들이 대거 스카웃 됐다.
우리나라의 도시가스 공급은 1987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CRG에서 청정에너지인 LNG(Liquefied Natural Gas: 액화천연가스)로 바뀌게 된다. 나프타를 분해해야 하는 제조공장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점도 이 때부터다.
1989년 12월 환경청은 서울 및 수도권지역의 대기보전대책의 일환으로 서울시로 국한된 LNG(청정연료) 사용대상지역을 수도권 15개 시·군으로 확대하며, 90년 9월부터 서울의 모든 아파트에는 난방연료로 LNG를 사용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한다. 91년 9월부터는 기존의 아파트, 91년 1월부터는 신설 아파트에 적용하는 사용 의무화를 두게 된 것이다.
비약적 성장 후 재도약
도시가스 보급 확대가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한다.
중부, 청주, 대전 지역에도 천연가스 공급이 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해 11월 26일 도시가스용 LNG공급물량이 처음으로 100만톤을 돌파했다. 그리고 서울지역에는 가정용 도시가스 보급 확대를 위해 서울시가 93년부터 수탁공사제도를 도입하면서 배관연장의무화를 단행하게 된다. 93년 도시가스 공급물량은 150만톤을 넘어서는 등 해마다 20%이상의 급신장세를 보이면서 도시가스산업도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95년 4월28일 대구시 상인동 지하철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사고는 국내 도시가스산업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는다. 도시가스산업에도 안전과 관련된 각종 규제가 마련되는 등 관련법이 한층 강화된다. 도시가스사가 일정금액 이상을 안전관리분야에 투자하도록 의무화를 단행한 것도 이 시기다. 98년에는 압축천연가스를 활용한 버스가 국내 첫 운행되고 도시가스사들이 정부의 환경정책에 따라 CNG충전소 건설 및 운영사업에 뛰어들게 됐다.
국내 도시가스산업의 내적변화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SK엔론(지금의 SK E&S)과 LG정유 등 그룹들의 도시가스사 진출이 이어졌다. 대한, 부산, 청주, 구미, 포항도시가스를 계열사로 두고 있던 SK엔론이 충남, 강원, 익산, 전남도시가스를 추가로 인수했다. 이 시기엔 정부의 천연가스산업 구조개편도 함께 진행됐다.
2002년 이후부터 국내 도시가스산업은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외형적 변화를 걷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업 분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가스판매물량 역시 2000년 121억8000만㎥에서 2003년까지 7~9%의 판매 신장을 보였다. 하지만 2004년 150억㎥를 돌파한 후 판매신장은 낮은 한자리수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수준으로 접어들게 됐다.
국내 도시가스산업은 80년대 ‘태동의 시기’를 거쳐 ‘90년대 격동기’의 시기를 맞고 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까지 ‘고성장 시대’를 구가한 것이다. ‘기름 없이 타는 등불’에서 시작한 가스가 지금의 액화천연가스인 LNG로 변모해 1300여만 가구가 사용하는 국민연료로 사랑받는데 까지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전국의 32개 도시가스사들은 이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집단에너지사업, 신재생에너지, 자원개발 등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 삼천리 – ‘멈추지 않는 변신’ 에너지업계 1위 우뚝
연탄사업→도시가스사업→토털에너지사업
에너지에서 환경까지…‘미래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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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도시가스 인천공장 기공식은 당시 방송사에서도 취재를 할 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
삼천리(회장 이만득)는 1955년 창업주인 이장균·유성연 명예회장이 공동으로 ‘삼천리연탄기업사’를 설립하면서 탄생했다. 60년대에 접어들며 정부의 강력한 산림녹화 정책과 연탄사용 장려정책에 힘입어 연탄산업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 산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삼천리의 연탄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삼천리는 품질개선에 주력해 1964년 무렵 열량, 연소시간, 재의 단단함 등에서 이전의 연탄들을 뛰어넘는 22공탄을 개발했다. 여기에 연탄의 브랜드화라는 차별화된 마케팅전략을 추구하면서, 삼천리 연탄은 인기가 높아지며 유사품이 나돌기까지 할 정도였다.
소비자들에게 최고 품질의 연탄을 공급한다는 경영방침 아래 삼천리 연탄 판매사업은 창업 직후인 56년 2500톤에 불과하던 규모가 10년 뒤인 65년에는 13만톤으로 늘어났다. 신당, 시흥, 이문, 오류 공장을 가동하며 78년에는 약 190만톤의 연탄을 판매해 당당이 연탄업계 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하면서 80년대까지 연탄업계를 주도했다.
경인도시가스 인수하며 첫발
그러나 아시안게임(86년)과 서울올림픽(88년) 유치를 계기로 쾌적한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연탄사용을 억제함에 따라 1980년대 중반부터 연탄소비는 급격히 줄기 시작한 반면 1980년대 초반부터 보급된 도시가스가 점차 대중화됨에 따라 환경 친화적 에너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가 늘어나게 되는 등 변화의 바람을 맞게 된다.
삼천리는 이 같은 에너지 산업의 흐름을 발 빠르게 인식해 1982년 경인도시가스(주)를 인수하면서 도시가스산업에 첫 발을 내 딛는다. 안정적인 노사문화를 바탕으로 사업 초창기에 배관투자에 박차를 가해 안정적인 공급 루트를 만들고, 재무전략을 성공적으로 수립한 결과 1996년 도시가스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면서 제2의 도약을 맞게 됐다.
삼천리는 총 약 4560Km(공급관)에 달하는 국내 최장의 배관망 네트워크를 통해 경기도 13개시와 인천지역 5개구 240만여 세대에 가정용, 영업용, 업무용, 산업용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전국 33개 도시가스사 중 17.4%의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지난해 매출액 2조945억원, 당기순이익 518억원이라는 경영실적을 올리는 등 삼천리는 명실상부한 도시가스업계의 리딩 컴퍼니로 자리를 굳혔다.
토털에너지사업으로의 변신
삼천리의 변화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지난 2005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에너지에서 환경까지, 미래를 창조하는 삼천리’라는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고, 도시가스산업을 기반으로 에너지사업의 다각화와 친환경 생활문화 사업으로의 진출을 추진 중이다.
삼천리가 지속적으로 추진 중인 고효율 에너지사업 분야인 △열병합발전사업 △집단에너지사업 등은 기업의 미래가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정부차원의 에너지다변화정책과 친환경정책에도 잘 부합된다. 특히 삼천리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집단에너지사업은 송도신도시집단에너지사업(2004년)을 시작으로 광명역세권지구(2005년 12월 사업권획득) 외 소하·신촌 지구까지 영역을 늘려가고 있다. 수요가에게 도시가스, 열, 전기라는 동시에 공급하는 종합에너지사업을 구현한다는 계획이 하나둘씩 실현되가고 있는 것이다.
해외자원개발에도 적극 나서 예멘 39광구(2005년 8월) 유전개발 참여에 이어 이라크 바지안 탐사광구, 지난해 2월 미국 멕시코만 가스전 8개 광구에 대한 광권 계약을 체결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 하나의 성장엔진인 태양광발전사업은 지난해 4월 전남 ‘함평 태양광발전소(2MW급)’를 시작으로 연료전지 등 다양한 신쟁에너지 분야로 뻗어 나가고 있다.
■ 서울도시가스 – 최초 도시가스공급에서 자원개발까지 ‘선구자’
서울시영도시가스 모태…수요가 100만 첫 돌파
해외 유·가스전 개발, IT진출 등 사업다변화 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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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년 대성의 날을 맞아 고 김수근 명예회장과 임원들(맨 앞줄 왼쪽부터 최영두 이사, 홍민규 사장, 김수근 회장, 배남규 전무, 은희복 이사)이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서울도시가스의 탄생은 남다르다. 1970년 10월 2일 서울시 산하의 도시가스사업소가 발족된 후 가스를 공급했던 서울시영도시가스가 모태다. 당시의 도시가스 공급 방식은 지금의 LNG와 큰 차이를 보인 나프타분해(LPG+AIR) 방식이며, 도시가스사가 제조사로 분류된 것도 이런 공급방식 때문이다.
대성연탄으로 잘 알려진 대성그룹 창업주 故 김수근 회장은 연탄 제조업에서 석유 유통업, 도시가스 판매 사업에 이르기까지 에너지라는 외길을 통해 대성그룹을 성장시켜 왔다. 대성그룹이 도시가스사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국영회사인 서울시영도시가스를 인수하면서 서울도시가스를 설립하게 됐다.
도시가스산업 역사의 중심
서울도시가스는 1983년부터 서울북부지역의 가정, 상업, 산업용 수요처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91년부터는 경기지역에 도시가스공급 후 95년 상장하게 된다. 지난 96년에는 동종업계 최초로 ‘100만톤, 100만 가구’ 공급이라는 기록을 달성하는 등 국내 도시가스산업 역사에 중심이 되어왔다.
현재 187만 가구에 3648km(공급관)의 배관을 통해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1조3158억원에 영업이익 225억원, 당기순이익 455억원을 달성했다. 서울도시가스는 회사의 비전을 2012년까지 글로벌 종합에너지기업으로 변모한다는 전략을 수립해 신규사업 확대 등 새로운 경영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특히 21세기 발전 방향을 수송용 연료인 CNG 충전사업, 건설, IT산업, 엔지니어링, 에너지절약인 ESCO사업, 신재생에너지 분야인 연료전지 그리고 소형열병합 및 CES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서울도시가스는 판매 사업을 기반으로 사업다각화를 통한 또 하나의 성장엔진을 가동해 기업의 미래가치를 업그레이드 중이다.
해외자원개발 발빠른 행보
도시가스사업 외에 서울도시가스는 자원개발 분야에서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 리비아, 호주, 베트남 등 총 5개국에서 이미 원유 및 천연가스 개발 사업에 참여 중이며, 캐나다의 목재사업까지 추진하는 등 기업의 미래가치를 높일 수 있는 에너지 분야에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원유 및 가스전 탐사 부문에선 이미 리비아 NC 174광구(합작회사:한국석유공사)를 통해 2004년에 첫 원유판매 배당금을 받아 향후 20년간의 투자자원을 확보해놓고 있다. 베트남 11-2광구(합작회사:이태리 Agip社)의 경우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4월 서울도시가스는 터키 흑해 North Thrace 해상 천연가스 탐사사업에 79억2780만원을 투자했다. 이번 탐사사업에는 미국 T사, 캐나다 S사, 터키 H사와 공동으로 참여해 2010년 6월까지 탐사가 진행되며 탐사 성공시 개발 및 생산기간은 30년, 추가 10년 연장이 가능해 사업성이 높다.
사업다변화와 열린 경영
서울도시가스는 에너지 분야 외에도 어학원 사업 , 인터넷빌링 사업, 연어 및 송어 가공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가공처리 사업은 남미 칠레에 ‘PROCINT S.A’라는 연어와 송어 가공처리 공장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종업원은 약 250명으로 이 곳에서 생산된 연어와 송어 가공제품은 전 세계에 판매되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GOOD-CAMPUS’를 설립하면서 뛰어든 어학원 사업은 서울도시가스가 추구하는 열린 경영의 한 단면이다.
열린 경영을 추구하는 서울도시가스는 다양한 혁신제도 도입과 복지 개선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처럼 서울도시가스는 연탄사업에서 도시가스 판매사업 그리고 자원개발까지 사업다각화를 꾀하는 등 도시가스업계의 선두주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가스신문 창간 1989년…그때, 그리고…] LPG분야 |
정책적 무관심 속‘경쟁력 제고’가 여전한 화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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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경 선보인 LPG버스. 아쉽게 상용화에는 실패했다. 이같은 노력이 어우러져 현재는 4.5t급의 LPG상용차가 개발되고 있다. |
대표적 서민연료로 음지서 묵묵히 역할 충실
연료·업종간 갈등 심화…자생력 키우기 온 힘
우수한 인프라 불구 정부지원 못받아 시장위축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지적도
국내에서 LPG연료는 지난 1950년대에 처음 소개되면서 나무, 석탄 등에 이어 새로운 에너지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경쟁연료인 도시가스(LNG)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새로운 다양한 에너지가 개발되면서 조금씩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지만 국내에서 5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LPG연료는 서민연료로 도서벽지 등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가스신문 창간년도인 1989년 그 때부터 지난 20년 간 LPG연료가 걸어온 발자취를 뒤돌아봤다. 나름대로의 성과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LPG연료가 걸어온 20년간의 흔적을 살펴본다.
■ 1990~1995년
용기보증금제 논란, 캐비닛히터 보급
1990년대 LPG용기의 소유권은 소비자가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관리는 충전소에서 하면서 용기관리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정부가 용기보증금제도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판매업계의 적극적인 반발에 부딪혀 결국 시장에서 정착하지 못하는 제도의 하나가 됐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에도 지금과 같이 서민들이 사용하는 LPG연료보다 중산층의 연료인 LNG가 더 저렴하다며 복잡한 프로판유통체계의 개선과 특소세 인하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시기에도 농협이 LPG판매업계 진출을 서두르면서 기존 LPG판매업계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로판의 경우 가정·상업용 등 수요처가 일정하게 유지됐지만 부탄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자동차용 외에는 딱히 사용할 곳이 없었다. 따라서 남아도는 부탄의 소비촉진을 위해서 가정용 난방기의 다원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의견에 제시돼 캐비닛히터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LPG자동차가 확대보급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찍혔는데 바로 6인승 이하 밴류와 적재중량 1톤 이하 화물차에 LPG연료의 사용이 허용된 것.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자동차충전소 수가 부족한 가운데 고속도로에는 아예 충전소가 없다는 점이 애로점으로 지적됐다.
이밖에 충전소의 정량판매가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쌍용정유가 LPG수입업을 추진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하면서 기존 수입사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 1996~2000년
체적시스템 본격화, LPG경차여부 검토
1996년도에 들어서 낙후된 LPG공급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체적거래제 도입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소비자의 3대 불만인 정량성, 안전성, 편리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업계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움직임이 빨라졌다. 본보 역시 일본의 실태 등을 직접 탐사취재해 체적거래시스템의 우수함과 필요성을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캐비닛 히터의 경우 이동의 편리성, 조작의 용이성, 탁월한 난방효과 등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하며 LPG사업자들은 물론 가스기기 시장의 성장에도 큰 도움을 줬다는 평가다.
용기보증금제도는 업계와의 협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돼 결국 유명무실해졌으며 LPG용기 바코드제가 거론되기도 했으나 용기소유권 문제와 일본과 다른 현실 등으로 잠정 연기됐다.
특히 LPG시장이 완전경쟁 상태이고 수요대비 공급에 여유가 있다는 판단으로 정부는 LPG유통가격 자율화를 검토하게 된다.
현재 프로판산업의 새로운 탈출구로 평가받고 있는 소형저장탱크 시스템이 이 시기부터 논의됐다. 당시는 워낙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에 프로판사업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일본, 미국, 캐나다 등의 선진국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최근 LPG경차가 출시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우리는 LPG경차를 조금 더 일찍 만날 수도 있었다. 왜냐면 당시에도 경차 보급확대를 위해 LPG경차 허용 여부가 논의되기도 했으나 세수부족, 충전소 인프라 부족 등으로 결렬됐기 때문이다.
LPG충전·판매소의 경쟁과 통폐합이 강조되면서 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LPG충전·판매소를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꾼다는 방침을 세워 업계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1998년9월 발생한 부천 대성에너지 폭발사고로 인해 허가제 도입여부는 수면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는다. 이밖에 LPG판매소의 공동화가 시행되면서 1996년 5300여 곳에 이르던 LPG판매소는 1997년에는 4400개소로 18%가 감소했다.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 가장 이슈화 됐던 사안은 LPG가격 자유화다. 그동안 정부가 통제했던 LPG가격을 시장에 맡기면서 도매가격은 수입·정유사가, 유통부문 역시 충전·판매업계가 독자적으로 책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2001~2005년
가격자유화 시행, ‘LPG의 날’ 제정
이 때에도 공정위는 LPG수입사 및 유통단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했는데 당시 LG가스와 SK가스에 대해 총 3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하부 유통사업자단체, 통합업소 등에는 시정명령을 내려 업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정부가 주도적인 의지를 갖고 추진한 게 LPG안전공급계약제이다. 일부에서는 현장에서의 LPG안전공급계약 체결률이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효용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당수 사업자들이 의구심을 표시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판매업계의 통합작업이 정착단계에 접어들면서 서울 등 수도권 통합판매소의 경우 높은 배당과 함께 지분가격이 치솟는 등 구조조정 성공으로 인한 성과를 충분히 거뒀다.
특히 프로판 유통구조가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대두되면서 정부, 수입사, 충전, 판매업계 관계자들은 오랜 논의 끝에 LPG배송센터 시범사업자 선정을 마무리 지었다.
97년부터 지속된 RV차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우리나라는 20001년 기준으로 LPG자동차 세계 1위의 보급국가가 됐다는 소식이 이때에도 있었다.
특히 그동안 LPG자동차의 개발·보급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던 환경부가 청소차의 LPG전환에 적극 나서는 한편 산하에 대한LPG산업환경협회(현 대한LPG협회) 설립을 허용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정부정책이 도시가스(LNG) 보급에 치중해 LPG 관련 종사자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자 산업자원부가 직접 나서 LPG산업의 발전 및 홍보를 위해 ‘LPG의 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 2006년 이후
연료간 양극화 심화…사업자, 소비자 ‘원성’
2006년 이후에는 LNG연료와 LPG연료 간의, LPG연료 중 부탄과 프로판 간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정부는 프로판유통단가를 낮추기 위해 배송센터도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도 한 반면 안전을 이유로 LPG가격 인상요인이 되는 차단기능밸브를 도입하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대형 정전사고로 인해 제주도에 LNG발전소 건립방안이 확정됨에 따라 LPG사업자들은 사실상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2013년까지 도시가스를 조기 공급하겠다는 정부방침 역시 LPG사업자들을 코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특히 정부는 한국가스공사에는 손실보조금까지 지원키로 하면서 도시가스(LNG)가격 안정화정책을 펼쳤지만 LPG업계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전무해 LPG사업자들과 소비자들의 원성을 드높게 했다.
프로판사업에 대한 미래가 암울해지자 LPG수입사를 비롯해 충전·판매업계는 신규사업 아이템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배송센터시범사업은 판매업계의 반대로 전국확대가 결국 무산됐으며 최근에는 소형LPG용기 보급 여부가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부탄업계의 경우 2차 에너지세제개편을 마무리하는 등 자동차 연료로써 입지를 다지고 있다. 특히 차종의 가뭄을 한동안 겪었으나 LPG경차를 비롯해 하이브리드카 등 신차출시소식이 줄을 잇고 있어 기대감이 크다. 이밖에 서울에서 열린 2008년 세계LPG포럼의 성공개최 등 성숙된 국내의 LPG산업이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에는 국내 LPG가격이 LPG수입가격 인상여파와 고환율 영향으로 인해 수차례나 사상최고가를 잇따라 경신하면서 LPG연료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극에 달하게 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 인터뷰 – 인천 한일종합가스 김정도 회장
“25년전 돈 된다는 말에 뛰어 들었죠”
‘보따리 상’ 등 편법사업자 해결 절실
선진유통 공부 위해 매년 해외산업시찰
인천가스판매업협동조합 연수구지회장이자 한일종합가스 회장을 맡고 있는 김정도 씨는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일선에서 LPG연료를 소비자들에게 공급해왔다. 현장에서 겪었던 그의 생생한 기억을 통해 LPG연료의 변천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25년 전 당시 가스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선배로부터 LPG판매사업이 멋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멋있다는 말은 곧 돈을 벌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면서 저는 서울 은평구에서 가게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됐죠. LPG연료는 주로 부유층에서 사용했는데 24시간 배달을 해야 한다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김 사장은 기억에 남는 일로 새벽2시경에 주문전화를 받고 배달을 갔더니 밤늦게 가스배달을 시킨 이유가 커피를 끓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허무함을 느꼈던 것을 꼽았다. 다른 LPG판매업소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되자 다행스럽게 1989년부터는 배달시간을 아침7시부터 저녁9시까지로 정하면서 이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1990년경에 부천으로 사업장을 옮겼는데 도시가스(LNG)보급이 점차 확대되면서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해마다 일본 등 선진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는데 결국 체적거래시스템을 도입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죠”
김 회장은 일반 용기로 인한 공급은 한계가 있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체적시스템 도입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부천이 모범지역으로 꼽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고 전했다.
해마다 판매물량이 크게 감소하는 것을 체험한 김씨는 LPG판매소의 공동화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부천시지회 초대회장을 6년간 역임했는데 62개에 이르던 LPG판매소를 20군데로 줄이면서 사무실 임대료를 비롯해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배달차량도 240여대에 달했는데 이를 80여대만 운영하게 하면서 각종 경비도 크게 절감시켰다.
“부천시 지회장을 역임하면서 LPG판매사업으로는 비전이 보이지 않다고 판단해 신규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뼈를 깎으며 자금을 모으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제가 일선에서 물러난 후 부천조합에서는 주유소·충전소를 비롯해 냉동사업 등에 뛰어들 수 있었죠. 최근에는 택배사업도 시범운영 중입니다”
한창 열정이 넘칠 때는 조합원들의 정신·실무교육 차원에서 해마다 경포해수욕장을 찾아가 유격조교에게 직접 훈련도 받고 다양한 실무교육을 실시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LPG사업을 일궈오면서 현장에서 겪는 문제점에 대해 그는 망설임 없이 일명 ‘보따리 상’이라고 불리는 편법 사업자들이 해결돼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정부가 프로판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 아래 배송센터, 소형LPG용기 보급 등 다양한 방안을 연구 중이지만 단편적인 방안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가스신문 창간 1989년…그때, 그리고…] 가스기기분야 |
88서울올림픽 이후 급성장,이젠 세계로 세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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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보일러 생산·수입회사 한때 37개사까지 늘어
공급과잉으로 경쟁 심화…감정싸움에 법적 분쟁도
내수한계 넘어 가스기기 수출 6000만달러 상당
양적 팽창뿐 아니라 IT와 융합하는 새 시대 도래
80년대 후반~90년대, 가스화 시대
1980년대 중반이후 국민소득 증대와 함께 환경문제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지면서 가스보일러 보급은 급성장세를 이루었다. 88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한껏 위상이 높아진 우리나라는 90년대 들어서 질풍노도처럼 세계화를 외치며 지구촌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각 산업설비는 첨단화와 대형에 박차를 가하고 시설투자금액 조달도 순조로워 거의 모든 기업이 기존의 사업을 확장했다. 반면 과당경쟁으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기도 한다.
보일러 업계도 마찬가지다. 각 제조사는 경쟁이 극에 달한 내수시장에서 탈피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경동보일러(현 경동나비엔)가 93년 네덜란드에 510만 달러 상당의 열교환기를 수출하고 로보트보일러가 같은 해에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300만 달러의 보일러를 수출했다. 또 코오롱이 영국에 1250만 달러 상당의 보일러를 수출하기도 했다.
일부 공격적인 제조사는 외국 현지에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경동보일러는 1995년에 중국 북경에 ‘북경경동보일러유한공사’를 설립하고 귀뚜라미보일러는 1999년에 중국 천진에 ‘천진귀뚜라미유한공사’를 설립해 직접적인 보일러의 수출 길을 마련했다.
90년대는 석유와 가스 제품의 혼돈기간을 거쳐 가스시대로 옮겨간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90년대 상황을 에너지별로 보면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 등 기름·가스와 함께 전기에너지 이용이 보편화된 반면 연탄보일러는 거의 자취를 감춘 때였다.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가구의 비중은 86년에서 95년 사이에 5%에서 62%로 빠르게 증가해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특히 86년에 국제유가가 하락해 난방비가 저렴하면서 사용이 편리한 기름보일러는 88~89년에 공급이 밀릴 정도로 호황이었다. 그러나 때를 같이해 88년부터 신도시 건설 붐과 함께 가스보일러 시장이 활황세를 타면서 기름보일러는 성장세가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는 90년대 초반에 보급률이 이미 95%에 도달할 정도였다. 당시 가스레인지 연간 시장규모는 1500억원 대로 추산된다. 이때 출시한 가스레인지 제품은 이미 보급된 가스레인지의 교체 수요를 목표로 한 제품들로 그릴이 부착된 2구 버너와 3구 버너가 주종을 이룬 때였다. 특히 2구 버너는 기술개발이 절정에 이르러 100% 국산화를 이루었다. 단순히 음식을 조리하는 것만이 아닌 편의 기능이 추가돼 점화방식도 회전식, 누름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튀김과 볶음 요리를 할 수 있는 2중 버너와 자동소화타이머까지 장착한 제품이 나와 소비자의 환영을 받았다.
가스오븐레인지는 1986년쯤부터 수요가 늘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에는 연간 400억원 시장규모가 됐다. 특히 주목할 것은 89년부터 가스레인지의 수요가 가스오븐레인지 쪽으로 옮겨 붙으며 성장세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사실 가스오븐레인지의 경우 시장진입 초기에는 소비자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업계는 가스오븐레인지 시장을 ‘전망 불투명’으로 판단해 영업과 광고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한국인의 식생활에 맞는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 탓도 컸다.
춘추전국 시대로 공급과잉과 출혈경쟁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스보일러가 사용된 것은 1982년 수입자유화 후 (주)공영토건이 프랑스 샤포토에모리사의 ‘쎌틱’을 수입하면서다. 그러나 공영토건은 장영자 사건으로 부도가 난 후 샤포토에모리의 보일러를 수입·판매하기 위해 10여개 업체가 경합을 벌이게 되고 이때 기술제휴를 맺지 못한 업체는 다른 수입처를 찾아 가스보일러를 수입해 옴으로서 우리나라는 마치 세계 가스보일러의 전시장 같은 시장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4년 10월에 한국가스안전공사에서 가스보일러 정밀검사에 합격한 롯데기공의 가스보일러가 국산보일러 1호 제품으로 등록됨으로서 본격적인 국산보일러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 뒤로 린나이코리아가 86년, 삼성·대우·코오롱이 88년부터 보일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88년부터 91년까지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많은 업체가 경쟁적으로 보일러 제조에 참여해 한때는 생산·수입사를 합쳐 37개사까지 이르렀다. 88년에 약 10만여대의 보일러 생산량이 89년에 23만대, 90년에 41만대를 거쳐 96년엔 70만대까지 보일러 생산량이 급증해 가스보일러 전성기의 서막을 알린다.
이러한 성장 속에서 대다수 업체들이 생산라인 증설과 자동화를 이뤄 생산능력이 수요를 초과하게 되고, 이는 결국 업체간의 출혈경쟁으로 이어진다. 과당경쟁으로 채산성이 악화된 상당수 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난으로 결국 가스보일러 사업을 포기하는 일이 잇따라 빚어졌다. 이후 지금의 보일러6사 시대로 정착되기 까지 상당한 진통이 필요했으며, 과당경쟁의 잔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업계간 불화와 분쟁의 위기
과당경쟁은 결국 업계간의 불화와 분쟁, 그리고 제품 성능의 옳고 그름에 관한 ‘성능논쟁’으로까지 이어지며 감정싸움으로까지 치닫게 됐다. 2000년대가 보일러 업계의 파국 시대로 점철돼 버린 것이다.
2000년 초반에 생산능력 초과와 오랜 과당경쟁의 씨앗이 급기야 법적 분쟁으로 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걱정하던 일이 현실화 된 것으로 린나이코리아와 경동보일러가 가스보일러 기술무단 도용과 관련한 특허권분쟁으로 불을 붙였다.
먼저 린나이가 경동보일러에 대해 침해중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고, 법원은 린나이코리아에 손을 들어준다. 이 때문에 한때 경동보일러는 일부 보일러 품목의 생산을 중단하기까지 해야 했다. 이후 두 회사의 합의로 이 분쟁이 원만하게 마무리되긴 했으나 이후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각 제조사간 특허 분쟁이 줄을 잇는다. 그 같은 파국은 가스기기업계의 상징인 한국가스석유기기협회(현 한국에너지기기산업진흥회)의 위기로까지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이 일련의 상황들은 소위 ‘가스기기협회 사태’라고 할 만큼 한 맥락으로 이어져오는 일인 것이다. 특히 보일러사간의 분쟁으로 2005년엔 기기협회 회장(당시 린나이코리아 강성모 회장)과 상근부회장이 협회 회장직과 부회장직을 사임하면서 보일러 업계의 골은 깊어진다.
기기협회 회원 개별적으로 보면 린나이코리아는 그저 하나의 경쟁사에 불과할 수 있어도 협회 차원에서 보면 기기협회 회장인 린나이코리아 대표가 자신의 회원들을 고소한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불화는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기업계는 협회 회장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급기야 회장이 협회 회장이라는 자리를 사직함으로써 파국은 더 짙어져 갔다. 당시 기기협회의 상위부처이던 산업자원부까지 직접 나서 업계 간의 갈등진화를 중재하기도 했으나 그 어떤 타협이나 화해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이 같은 업계 간의 소모적인 논쟁은 그 이듬해인 2006년까지 이어지다가 경동나비엔 회장이 기기협회 회장직을 승계하면서 일단락 하는 듯 했으나 불과 반년 만에 또 다시 회장이 사임함으로써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이같은 업계 간의 직접적인 분쟁과 대립이 1차전이라면 2차전은 소위 보일러 성능논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일러 업계는 오랫동안 ‘일반보일러’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업체와 ‘콘덴싱보일러’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업체 간의 성능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위 말해서 열효율 82%의 일반보일러가 좋은 제품이냐, 환경성과 한국 가옥에 맞는지 알 수 없는 86%의 콘덴싱보일러가 더 좋으냐 하는 효율의 싸움이다. 이러한 성능논쟁은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흐르다가 ‘효율측정 방식’ ‘고효율기자재 인증’ ‘효율 등급 제도’의 실현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2008년에 이르러서야 에너지관리공단의 용역의뢰로 가스안전공사가 실제 사용환경에서 보일러를 직접 실험하는 사태를 낳게 하고 그 결과 콘덴싱보일러 제조업체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물밑에서의 이 같은 업계 간의 오래되고 끊임없는 싸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스기기산업은 외형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시장 성장성에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가스보일러의 연간 생산량은 평균 100만대 수준으로 이같은 생산규모는 단일 국가로는 세계 두 번째 규모이다. 총 4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보일러 수출액과 함께 가스온수기 및 가정용 가스조리기 수출액 등과 합치면 국산 가스기기의 수출규모는 총 6000만 달러 상당에 달한다.
내수 시장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사업다각화 정책과 수출 정책을 추진해 양적인 면에서 기기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IT기술과 융합한 홈네트워크 사업과의 연계, 가스의 효율적인 이용 측면에서 각방난방시스템 개발 등 기술적 진보에서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스기기 산업을 성숙기가 다 지난 산업이 아닌 앞으로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보이는 새로운 산업으로 인식전환을 꾀하며 세계로 세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 1974년 설립된 린나이코리아
주방문화 혁명 몰고 온 ‘가스기기의 名家’
가스레인지 국산화, 올림픽 성화대 제작도
린나이코리아는 1974년 1월21일 한국의 주방문화생활 근대화를 기치로 설립됐다. 당시 한국의 주방문화는 부뚜막과 아궁이로 표현되는 전근대적인 형태여서 부엌은 뭔가를 숨기고 싶은 곳,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가스에너지의 등장과 함께 가스기기 전문기업의 탄생은 시대적인 요구였으며 그에 발맞춰 린나이코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1975년 린나이코리아 제1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은 가스오븐레인지와 가스밥솥이었다. 핵심부품을 일본에서 수입해 제1공장에서 조립하는 형식이었으나 국산제품이 첫 선을 보이자 한국 부엌의 형태는 어둡고 음습한 공간이 아닌 손님에게 더욱 보여주고 싶은 공간이 될 정도로 가정의 주방 문화에 일대 혁명을 몰고 왔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은 린나이코리아에게도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이 두 행사에 쓰일 가스연소방식 성화대를 처음으로 만들어 국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가스를 이용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장대한 성화대를 보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감동을 기억의 상징처럼 각인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게 한다. 이 일을 린나이코리아가 해 낸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스기기 전문제조사로서 린나이코리아의 위상이 정립된 것이다.
린나이코리아가 가스보일러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83년이다. 그리고 3년만인 1987년에 첫 제품을 출시하면서 가스보일러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처음엔 보일러제조사가 지나치게 많아 보일러 공급과잉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1988년쯤부터 다소 공급과잉문제가 해소되기도 한다. 올림픽 전후에 가스보일러에 대한 수요가 급팽창해 해마다 두 배 이상씩 신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린나이코리아는 1989년에 새 보일러(RB-15000CS)로 시장공략을 본격화했다. 이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진일보한 제품으로 오늘날 린나이보일러의 가장 큰 특징인 슬림화 및 최소화를 처음으로 실현한 제품으로 당시 세계 최소형 보일러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 가스보일러 전 모델에 대해 KS허가를 취득하면서 정부에게도 품질규격을 인정받으며 표준화와 고급화를 선도한다.
이러한 앞선 경영마케팅으로 성장세가 이어졌다. 매출액은 해마다 전년과 비교해 20%씩 오르고 당기순이익도 매년 20%식 증가했다.
근래 린나이코리아의 유통부문에서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대리점의 부실로 악성채권과 함께 경영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이어지고, 1997년엔 IMF사태와 함께 대리점이 부도사태를 맞다가 일본으로부터 외자를 유치해 어렵게 고비를 넘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린나이코리아는 가스기구의 명가답게 새로운 경영전략을 다지고 있다. 본사 사옥에서는 밤새 불을 밝히고 마케팅전략을 수립하고 있으며, 연구개발진은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고, 대리점을 비롯한 유통진들은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고객만족에 오늘도 땀을 흘리며 제2의 부흥기를 도모하고 있다.
■ 1978년 설립된 경동나비엔
보일러전문으로 출발, 가스기기社 첫 상장
기술력·제품 차별화로 ‘콘덴싱’ 개발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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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병 대표가 2005년 2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고 있다. |
1978년 경동기계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경동나비엔은 보일러 전문기업으로 출발해 지금은 에어컨, 환기, 홈네트워크 시스템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창업 당시 경동이 출시한 버너와 관체를 일체화한 콤팩트형 사각보일러와 강제급배기식 FF보일러는 오늘날 가정용기름보일러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1988년 선진 유럽의 콘덴싱 가스보일러를 아시아 최초로 만들어 국내에 소개하고 약 10년이 지난 1998년엔 자체 기술로 콘덴싱보일러를 개발해 일찍부터 에너지절감과 기후변화협약에 대응하는 환경경영을 실천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민소득 증가와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를 감안한 정부의 청정에너지 도입 의지로 가스보일러는 보급의 확산 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가전3사와 다른 대기업이 가스보일러 시장에 참여한 상황에서 제품의 차별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시장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자 당시 경동기계의 경영진은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차 1987년 3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ISH전시회 네덜란드 네피트(NEFIT)사의 부스에서 새로운 타입의 보일러를 발견한다. ‘콘덴싱’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붙여진 보일러다.
경동기계는 네피트 사를 찾아가 기술제휴를 요청했다. 이에 네피트는 일반보일러보다 제조 원가가 비싼 콘덴싱보일러의 보급을 활성화하려면 한국에서 부품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해 기술제휴에 응했다.
그리고 1988년 2월3일 경동기계와 네피트 사의 기술제휴 계약이 체결됐다. 경동기계가 보일러의 열교환기를 제작, 이를 네피트사에 수출하고 네피트는 열교환기 제작기술과 나아가 가스보일러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보일러의 대표 기업인 경동나비엔이 콘덴싱보일러를 개발한 배경이다.
1993년에는 가스기기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 주식을 상장했으며 국내 보일러 업계로는 가장 먼저 외국 수출길을 열기도 한다. 중국에 연변경동보일러유한공사와 북경경동보일러유한공사를 설립해 중국을 무대로 세계 각국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2004년에는 10년 앞을 내다보는 경동 비전 2014를 선포하고 제2의 창업을 준비하면서 기존의 ‘경동보일러’라는 사명을 ‘경동나비엔’으로 변경해 생활환경 창조기업으로 거듭나는 한편 미국법인과 상해법인을 신설해 외국진출에 더 큰 힘을 쏟는다.
2006년에는 한국형 가옥에 맞고 세계 시장을 겨냥한 온수중심의 ‘뉴콘덴싱 on水’보일러와 콘덴싱온수기를 개발해 보일러의 본고장인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러시아, 중국 등에 보일러를 수출해 한국의 온돌문화를 전파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
[가스신문 창간 1989년…그때, 그리고…] 산업용가스분야 |
메이커4社 93년 총매출 1200억,지난해는 1조원 ‘훌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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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용가스메이커들은 온-사이트플랜트, 파이프라인 등을 통해 대량으로 산업용가스를 공급하면서 매년 급성장해 왔다. |
89년 고압가스協 설립인가…초대회장에 김기석씨
고압용기 전도, 도색불량 등으로 가스사고도 빈번
유통구조 변화와 함께 충전소 늘고 판매업소 줄어
20년 전 6N㎥ 용기 산소 소매가격 3500~6000원
20년 전 산업용가스업계의 풍경은 어땠을까. 10년 전에 일이야 어렴풋이 생각나겠지만 20년쯤 되면 그야말로 가물가물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가스신문이 ‘한국가스신보’로 처음 발행했던 1989년 산업용가스업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유통구조 상으로야 지금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 당시에는 변변한 단체가 하나도 없는 등 업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년 간 산업용가스업계는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반도체산업 등 국내 기간산업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하면서 질적·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가져 왔다.
본보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지난 20년간 산업용가스업계의 발자취를 신문에 게재된 기사와 함께 살펴보기로 했다. 단, 그 많은 일들을 신문 2쪽 분량으로는 모두 소개할 수 없으므로 ‘디지털 가스신문’ 개설 이전인 1999년까지 10년간의 산업용가스업계를 되짚어보면서 그동안 ‘가스신문’을 사랑해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20년 전에는 산업용가스라는 명칭보다는 가스의 압력을 기준으로 한 고압가스 내지는 일반고압가스로 많이 불러왔다. 하지만 도시가스나 LPG와 같은 연료가스와는 달리 그 쓰임새가 용접, 절단, 의료, 전기, 반도체 등 모든 산업에서 매우 다양하고 널리 사용되므로 용도로 분류해 산업용가스로 불리면서 정착돼 왔다.
산업용가스분야 중 1989년 한국가스신보에 가장 먼저 실린 기사는 사단법인 전국일반고압가스협회가 동력자원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초대 회장에는 한진상사 김기석 사장이 추대됐으며 전무이사는 이병관씨가 선임됐다.
20년 전 산업용가스 가격은 얼마 만큼 했을까. 1989년 7월 6일자 신문에 실린 6N㎥규모 용기에 충전된 산소가격을 보면 공장도가격(충전가격) 1800~2000원선, 소비자가격(판매가격) 3500~6000원선이다. 20년이 지난 현재의 가격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더디게 올랐는지, 아니면 얼마나 오르지 않았는지 잘 알 수 있다.
91년 10월 고압가스용기관련 기사에는 6N㎥규모 고압가스용기의 가격이 7만8000원으로 조사돼 있었다. 15년간 거의 오르지 않다가 최근 5년간 급격하게 올라 현재는 14만~15만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자율경쟁 위한 허가기준 완화
92년 1월에는 부산·경남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이 현판식을 갖고 출범했으며 초대이사장에는 협신산업가스 추정효 사장이 맡았다. 93년 1월에는 대성산소(현 대성산업가스)가 99.9999% 이상의 초고순도 특수가스를 생산할 반월공장을 준공했다.
93년 2월 동력자원부는 고압가스판매 허가기준을 완화하는 고법 시행령 개정안을 공포했다. 그동안 규제사항이었던 내용을 보면 ‘사업의 개시 또는 변경으로 그 공급이 수요에 비하여 지나치게 과잉되거나 공공의 안전과 이익을 저해하지 아니할 것’으로 돼 있었으나 이는 시장경쟁 등을 제한하는 한편 영업권 보호측면으로 적용할 우려가 있어 이 가운데 ‘그 공급이 수요에 비하여 지나치게 과잉되거나’라는 부분을 삭제했다.
또 93년 10월에는 이천종합가스(대표 최종배)가 준공했으며 이즈음 초저온용기(LGC)의 보급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관심을 끈다. 당시 LGC를 보급하는 곳은 한국초저온용기, 한일엔지니어링이 미국 등 외국제품을 들여왔으며 한국비료공업과 쌍용정공이 각각 LGC를 국내에서 생산, 판매했다.
94년 9월에는 초저온용기 재검사기간을 4년으로 연장한다는 내용의 기사도 관심을 모았다. 한편 대한비오씨가스가 영국 BOC그룹에 완전 합병됐다는 기사도 눈에 들어왔다.
95년 1월 산소가격 보도를 보면 6N㎥ 규모의 고압용기에 충전된 산소의 충전가격은 1700~3000원이며 소비자가격은 3500~9000원으로 게재돼 있다. 사실상 현재의 가격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일부선 담합행위 등 불명예
95년 3월에는 한국산업가스, 대성산소, 유니온가스, 대한비오씨가스 등 산업용가스 4대 메이커가 공정위로부터 담합행위로 인해 과징금 3551만원을 부과 받는 등 불명예스러운 일도 있었다. 당시 공정위는 이들 4개사가 모여 가스가격을 단계적으로 인상키로 하고 가스가격에 비협조적인 충전소를 대상으로 가스공급을 제한하는 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또 4월에는 서울 영동대로 진입로에 산소용기 120개를 싣고 달리던 가스운반차량이 교통사고로 인해 전복돼 스핀들 파손 등으로 가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이 차량은 용기를 보관실에 넣지 않고 노상 주차함으로써 모씨가 이 차량을 훔쳐 달아나다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동시에 가스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94년에는 고압용기 품귀현상도 일어났다. 한국고압용기(현 하이프레실)와 남양산업(현 엔케이)은 탄산용기 수출에 주력했고 ‘협동’은 부도가 났기 때문이다.
95년에는 일부 일반고압가스판매업소의 불법영업을 다루는 기사가 많았다. 1개의 허가증에 여러 명이 공동명의로 등록해 실제로는 각자의 상호를 내걸고 개별영업을 함으로써 업계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95년 6월에는 태창가스 당진공장이 부도로 한국산업가스와 대한비오씨가스에 공동 인수됐다.
한편 7월에는 일반고압가스용기 도색불량 등 허술한 관리로 인한 사고도 있었다. 질소용기에 산소를 충전해 질소로 알고 작업을 한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화성산업 직원이 사망, 가스공급자가 구속되기도 했다. 또 그 당시 신문에서는 흰색의 의료용 산소용기에 각인은 질소로 돼 있는 것이 게재되기도 했으며 퍼지용 질소용기에 산소를 충전, 사용하다 사고가 나는 등 고압용기관리가 부실했음을 알수 있다.
쌍용정공·한국비료는 LGC제조
96년 초에는 유니온가스가 프렉스에어코리아로 사명을 변경했고, 쌍용정공과 한국비료가 LGC를 국산화했고 그동안 스틸제품으로 생산했으나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수입대체에 성공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이때 고압가스 운반 중 용기의 전도 및 전락을 방지하기 위해 고압가스운반차량의 적재함 각재(角材) 설치가 의무화됐다. 리프트가 있는 각재용접보강형은 280만원, 리프트를 제외한 것은 70만~100만원으로 게재돼 있었다.
97년에는 고압가스단체 설립추진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경인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발기총회에 이어 대전·충청지역도 조합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잇따라 모임을 가졌다. 또 97년 여름에는 초저온용기 재검기간이 5년으로 연장됐으며 9월에는 서울냉열 전선파손사고로 산업용가스 생산 전면중단으로 한때 산업용가스 수급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공동명의 판매업소 적발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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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6년 동방산업으로 설립한 대구의 산업용가스충전소 팩슨은 아직도 아세틸렌 및 아산화질소 제조설비가 남아 있는 등 전통있는 충전소로 불린다. |
이즈음 서울 강서구에서는 공동명의로 운영하고 있는 고압가스판매업소의 편법운영을 적발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영등포구, 양천구는 물론 전국 곳곳에서는 여전히 편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8월 충북 충주의 한 충전소에서 산소충전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으며 이는 산소와 유지류와의 반응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9월 인천의 이화산소가 새로운 사업장으로 이전했고 신규 산업용충전소인 제일가스(대표 박삼원)가 10월에 문을 열었으며 11월에는 삼성가스공업(대표 박종정)이 영업을 개시했다.
한편 프렉스에어코리아는 가스대금이 밀린 동서종합가스(대표 강석광)에 가스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 한국산업가스가 미국 에어프로덕츠에 완전 매각됐으며 비오씨가스코리아가 삼성종합화학 및 현대석유화학의 자가플랜트를 인수하는 등으로 인해 국내 산업용가스제조분야의 90%는 외국계기업이 점유하게 됐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2000년 이후엔 특수가스 각광
이처럼 산업용가스업계에는 지난 20년 이상 산업용가스메이커 4대 메이커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코리아에어텍, SKC에어가스, 에어리퀴드코리아 등 신생 메이커들이 등장하는 등 오랜만에 체제변화가 온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들 대기업을 대상으로 온-사이트플랜트, 파이프라인을 통해 대량으로 가스를 공급해 온 산업용가스 4대 메이커들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다.
특히 2000년 이후 칸토덴카코리아, 원익머트리얼즈, 한국메티슨특수가스, 소디프신소재, 후성, 코아텍 등 특수가스메이커들이 등장하면서 급성장, 산업용가스업계가 더욱 빛나게 됐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산업용가스 충전 및 판매업소는 유통구조의 변화, 신규업소 등장, 과당경쟁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초저온저장탱크 설치 등 유통구조의 변화를 잘 활용한 충전소는 꾸준히 성장해 대형충전소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산업용가스판매업소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한때 차량 서너 대와 함께 몇 명의 기사를 두고 운영하던 판매사업자들이 공급물량이 줄어들자 현재는 대표자가 직접 가스를 공급하는 사례가 많아졌으며 아예 폐업한 곳도 적지 않다. 이와 반대로 판매물량이 많은 곳은 충전사업에 진출함으로써 그동안 충전소는 늘고 판매업소는 줄어드는 등 양극화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 속에 산업용가스 및 특수가스메이커를 중심으로 한국산업특수가스협회가 탄생하고 충전단체인 서울·경인, 부산·경남, 대전·충청, 대구·경북 등 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설립 20년째를 맞는 전국일반고압가스협회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으며 다행히 최근 재건의 움직이 일고 있다.
2000년부터의 산업용가스업계 소식은 본보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디지털가스신문·www.gasnews.com)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한 후 ‘산업용가스’ 등의 용어로 검색을 하면 다양한 정보를 찾아 볼 수 있다.
■ 인터뷰 – 한국수소 강진우 전무이사
“과당경쟁하면 손해라는 인식 확산”
운송비·인건비 크게 올랐어도 가스값 제자리
“1989년 산업용가스업계는 주로 고압용기를 통해 가스를 공급했지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산업용가스공급은 실린더에서 초저온용기나 초저온저장탱크를 통한 가스공급으로 진화하는 등 유통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타고 산업용가스충전시장에서의 실린더물량은 20년이 지난 요즘 50% 이상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수도권 산업용가스충전업계에서 30년간 영업을 담당해온 한국수소 강진우 전무이사는 최근의 산업용가스시장은 가스신문이 창간했던 시절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 회고한다.
“우리나라는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그동안 대기업 품목의 성장과 함께 파이프라인, 온 사이트 등을 통해 대량으로 가스를 공급하면서 산업용가스메이커의 영역이 한층 확대된 반면, 충전 및 판매업계는 20년 전에 비해 운송비, 원자재, 인건비 등이 크게 상승해 고정비가 크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마진은 오히려 줄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용가스 충전·판매업계에는 신규업소가 많이 늘어 개별 충전소들의 파이가 많이 줄었다고 설명하는 강 전무는 한때 횡행했던 과당경쟁의 결과가 이처럼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89년 이전에는 서울 영등포의 ‘신성’과 경북 포항의 ‘해동산업’ 등이 대표적인 충전소였고 그 시절 수도권에는 신양산소공업, 한국수소, 국제액체산소, 대덕가스, 한미특수가스, 인천산소(현 대성산업가스 인천), 현대특수가스(현 MS가스 군포) 등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90년대부터는 신규충전소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충전소도 많지만 매각을 통해 주인이 바뀐 곳도 많다는 강 전무는 무엇보다 투자를 많이 했던 충전소들이 오늘날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동안 산업용가스충전업계도 경영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일부 충전소는 용기임대, 미수금 등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판매업소로부터 담보를 잡기도 했지요. 하지만 신규충전소들이 생기면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일부 판매업소들이 기존충전소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신규충전소로 옮겨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이처럼 산업용가스충전업계는 경쟁의 둘레에서 악순환을 거듭해 왔다고 설명하는 강 전무는 가스공급형태가 실린더에서 초저온용기로, 초저온용기에서 저장탱크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항상 치열한 경쟁의 양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강 전무는 또 초저온용기 및 저장탱크로 바뀌는 과정에서 투자가 많이 이뤄졌지만 가스공급의 편리성 및 안전성 제고가 경영환경 개선에 큰 효과를 가져 오게 됐다고 주장한다.
“최근 서울·경인지역 산업용가스충전업계는 어느 정도 시장안정화를 이루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과당경쟁을 하면 결국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시장안정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형충전소들이 먼저 배려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출혈경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억제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등의 성숙된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강 전무는 모든 영업은 순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하며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 우리도 창사 20주년삼정가스공업
6개 사업장 가동 지난해 매출 228억
저장탱크 125기, 탱크로리 8대 등 수도권 선두주자
산업용가스충전업소 중 최근 수도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천의 삼정가스공업(대표 심승일)도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현재 인천 본사의 공장을 비롯해 포천, 화성 등 3개 공장과 화성, 영흥 등 2개 지점, 그리고 김포영업소를 운영하는 이 회사는 지난해 228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최근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다.
1989년 3월 10일 산업용가스판매시설을 마련, (주)삼정가스로 출발한 이 회사는 이듬해 9월 산소, 질소, 아르곤, 탄산 등의 산업용가스충전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인 충전사업에 뛰어들었고 10월 1일 현재의 상호로 변경했다.
92년 자본금 5억원을 증자한 삼정은 95년 인천 서구 오류동에 김포지점을 개설했다. 이후 97년 공동대표이사체제(심수일 사장 · 심승일 부사장)로 운영된 이 회사는 98년 10월 삼정가스기기(주)를 설립하는 등 사세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 회사는 또 창립 10주년을 맞는 99년 3월에 자본금 10억원을 증자했으며 그해 6월 수소제조시설을 완공하는 등 품목을 추가했다.
2001년에 들어서는 인천 옹진군 영흥면에 영흥지점을 완공, 가동에 나섰으며 2002년 포천의 가산산소를 인수해 현재의 삼정산업가스(포천 제2공장)로 운영하고 있다. 또 그해 영흥지점에 NH3, HCl, H2S 등 독성가스 취급설비를 완공했으며 미국 럭스포社와 의료용 홈 케어 시스템에 대한 국내 판매계약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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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본사 및 산업용가스 충전장. 향후 LPG충전소 등도 증설할 계획이다. |
2004년에는 충남 당진에 공장부지 3만3000㎡를 매입하고 2005년 6월 경기도 화성의 산업용가스 판매업소인 덕성산업가스를 인수했다.
올 3월 1일에는 화성 제3공장인 삼정특수가스(주)를 완공하고 산업용가스 충전·판매사업은 물론 다양한 특수가스까지 허가를 받아 놓았다. 또 연내에는 충남 당진에 제4공장을 착공할 계획을 밝히는 등 앞으로도 거침없는 성장엔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는 현재 고압용기 2만9000개(40ℓ, 47ℓ 등), 초저온용기 4500개(175ℓ), 저장탱크 125기(3~25톤), LPG 6500개(20kg 및 50kg)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탱크로리 15대, 수소카트리지 8대, 가스운반차량 37대 등을 운용하고 있다.
한편 심승일 사장은 지난해 6월 가스안전촉진대회에서 대한민국 산업포장을 수상했고 10월 경찰의 날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아 눈길을 끌었다. 특히 심 사장은 서울·경인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 이사장 및 가스안전공사 가스기술기준위원회 분과위원 등을 맡는 등 산업용가스업계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삼정가스공업은 그동안 축적된 기술을 토대로 품질에 대한 사전관리, 가스의 안정적 공급, 원료가스 구입선 다변화 등을 통해 고객의 요구에 적극 부응함은 물론 철저한 안전관리를 바탕으로 전국 1200여 고객으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얻고 있다. |
[가스신문 창간 1989년…그때, 그리고…] 천연가스분야 |
눈부신 양적·질적 성장…세계적 위상 ‘우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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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화두 ‘가스산업구조개편’
러시아 PNG프로젝트 도입 등 현안과제도 적지 않아
천연가스산업의 태동과 도약
천연가스산업은 지난 1973년과 1979년의 두차례 석유파동 이후 의존도가 높은 석유비중을 줄임과 동시에 에너지원의 다원화가 요구되면서 에너지산업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에너지원의 장기안정적 확보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천연가스는 매장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고루 산재되어 있으며 장기 공급계약에 의한 안정공급이 보장되어 매우 적합한 에너지원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1980년 제24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가스도입에 관한 기본방침이 확정되었고 1981년 4월 제11차 경제장관회의에서 LNG사업 기본계획이 의결됐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LNG도입규모는 1985년부터 150만톤/연, 1987년부터 300만톤/연으로 결정됐다. 생산기지는 평택에 약 5년동안 건설키로 하고 LNG도입교섭은 인도네시아를 도입선으로 하여 추진했다.
최초의 LNG기지인 가스공사 평택기지는 1981년 시작되어 1986년 준공됐다. 그리고 1986년 10월 31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로 LNG를 도입하는 곳이 됐다.
또한 천연가스산업의 모태인 한국가스공사가 1983년 발족됐다. 당시 동력자원부 서상철 장관과 가스공사 최연식 초대사장이 공사 현판식을 제막했으며 기구는 2국3실7부1건설본부 31과로 임원 4명 직원 193명 등 총 247명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연가스 공급은 1986년 10월 최초 LNG선의 평택기지 입항이후 1986년 11월 평택화력발전소, 12월 인천화력발전소에 공급을 개시하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987년 2월에는 도시가스회사에도 공급을 시작했다. 한국가스공사의 천연가스 판매량은 1988년 207만2천톤에서 2000년에는 1421만6천톤으로 2008년에는 2634만5천톤으로 늘어나 실로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끊이지 않는 이슈 ‘가스산업구조개편’
천연가스 산업에서 가장 큰 이슈는 가스산업구조개편이다. 지난 1999년 공청회 및 정부방안 발표 이후 내내 가스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매년 국회를 비롯 정부, 가스공사, 가스공사 노조, 도시가스사, 민간사, 해외메이저 등이 각각의 이해관계 속에 잠시도 조용하지 못했던 과제다.
2002년에는 수년 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가스산업구조개편 3개 법률안의 통과가 무산된데 이어 2003년 새로이 들어선 참여정부는 기존에 정부가 추진해온 공기업 구조개편 및 민영화를 서두르지 않고 신중을 기한다는 방침을 정해 결국 가스산업구조개편 추진방안을 보완, 추진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구체적으로 가스산업구조개편과 관련, 설비부분은 공기업 형태로 존속시키고 LNG 도입부분을 위주로 경쟁체제를 마련한다는 방침이었다.
이같은 구조개편이 지지부진해져 경쟁도입정책이 제자리를 맴돌자 LNG 직도입정책이 적극 검토, 실행됐다. 지난 2004년 7월 1일 포스코가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LNG 직도입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포스코에 이어 LG칼텍스정유 등이 추가로 직도입 사업자로 등장해 향후 사업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천연가스산업의 이미지를 고양한 성과도 눈에 띈다. 지난 2001년에는 세계 LNG업계의 큰 잔치인 ‘LNG 13’국제회의 및 전시회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됐다. 행사에는 등록인원만 2400여명, 전시회 참가업체 125개社라는 외형적인 성과 이외에도 다양한 LNG관련 비즈니스와 홍보, 한국가스산업의 위상 제고라는 보이지 않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이다.
2002년 3월에는 울산온산공단 건설현장에서 김대중 前 대통령을 비롯한 내외빈 7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해-1 가스생산시설 기공식이 열렸다. 이어 2004년 11월 5일 울산 석유공사 육상기지에서 동해-1 가스전 준공식이 개최돼 우리나라가 산유국에 진입하였음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울산 앞바다 남동쪽 58㎞에 위치하고 있는 동해-1 가스전은 12억불에 달하는 가스 수입대체효과와 함께 유전개발 및 생산, 운영 기술과 경험의 축적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4만3000명의 고용과 약 2조원의 부가가치 창출, 엔지니어링 및 중공업 등 관련산업 육성 및 기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시화권 들어선 ‘러시아 PNG 프로젝트’
천연가스의 도입선 다변화를 위해 러시아 PNG프로젝트는 약 십여년에 걸친 길고도 긴 검토와 협의 등을 지속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기 프로젝트이다. 초기 국책사업이었던 당시 이르쿠츠크 PNG사업은 국가적 차원에서 도입선을 다변화하고 안정적인 에너지공급원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추진돼 2000년 11월부터 한중러 3개국 공동 타당성 조사를 추진한 바 있다. 이어 2003년 8월까지 본타당성 조사를 위한 한중러 공동조정위원회를 수차례 개최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러시아 통합 가스정책에 따라 이르쿠츠크 PNG사업은 사실상 가능성이 희박해졌으며 사할린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톡으로 오는 배관노선이 더욱 현실성 있는 사업으로 판단됐다.
이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정상은 지난해 9월 북한을 경유하는 러시안産 천연가스의 PNG프로젝트에 합의했다. 양국간 체결된 양해각서에 따르면 2015년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연간 750만톤의 천연가스를 30년에 걸쳐 도입하게 된다.
러시아는 2012년 블라디보스톡 APEC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2012년까지 사할린·하바로스크·블라디보스톡간 가스배관을 건설하며, 2015년에는 야쿠츠크 센터·하바롭스크간 가스배관을 완공할 계획이다. 이후 러시아 측의 제안대로 블라디보스톡-북한-한국을 연결하는 가스배관을 건설하여 러시아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LNG탱크 누출사고 계기로 안전강화
가스공사 연구개발원이 1만500kcal 수준의 표준열량 LNG와 각기 다른 열량을 나타내는 호주산, 탕구산, 예멘산 LNG 등을 6가지 경우로 나눠 비교검토한 결과 소비자 연소기기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5년부터 2006년에 걸쳐 가스공사 인천기지 14~17호 지중식 LNG탱크 내부에서 가스가 누출된 것으로 밝혀져 국회차원에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천연가스업계가 들썩거렸다. 이는 관련법규에도 영향을 미쳐 가스사고시 즉시보고 등 안전부분을 한층 강화한 가스 3법 개정 등이 이뤄졌다.
2009년 현재 해당 탱크 4기는 지난해 12월 보수를 마치고 정상운전 중에 있으며 향후 삼척기지 등에 건설되는 저장탱크는 지상식으로 건설될 전망이다.
또한 과거 1만500kcal/N㎥이던 천연가스 표준열량이 천연가스공급규정 개정을 거쳐 지난 2007년 12월부터 1만400kcal/N㎥로 하향 조정됐다. 이는 도입국에서 들여오는 천연가스 열량의 하향추세에 대한 대응책과 아울러 고열량 LNG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부가적으로 소요되는 고가의 LPG 물량을 줄이기 위해서 이뤄졌다.
■ 국적 LNG선 운항의 역사 ‘현대상선’
국적 1호선부터 최첨단선박까지 最古와 最高
한-말레이시아 270회 왕복, 총 LNG 1500만톤 수송
운항 LNG선 8척…선복량 최대, 선형 및 항로 다양
우리나라는 1986년에 처음으로 LNG를 들여옴으로써 세계 7번째 LNG도입국이 됐다. 이 때 수송은 외국적 선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후 정부는 LNG국적선 도입정책을 추진해 도입되는 LNG 수송 및 LNG선 건조를 국적선사와 국내 조선소에 맡긴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현대상선은 국내 LNG 도입사업에 대한 수행 준비가 완벽한 국내 유일의 선사라는 자신감으로 1990년 4월 한국가스공사에 단독운항 안을 제시했고, 반면 다른 선사들은 여러 선사가 공동 참여하는 컨소시엄 안을 제출했다. 선사 간 수주전이 과열되자 한국가스공사는 경쟁방식의 문제점 해소와 위험 분산을 내세워 컨소시엄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히며 현대상선이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를 유도했다. 결국 현대상선은 LNG 수송사업이 국책사업임을 감안, 국가경제적 견지에서 컨소시엄 참여를 결정했다.
LNG 수송 참여를 희망하는 9개 선사들이 모여 추후 발주할 LNG선 선형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논의 끝에 결국 모스형으로 결정됨에 따라 이를 강력히 추천했던 현대상선은 컨소시엄 내에서 한층 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됐다. 현대상선은 제1호선의 운항권 및 89%의 지분을 보유하는 국내 최초의 LNG선 운항선사로 결정됐다. 한국가스공사는 1990년 10월, 1994년부터 20년간 연간 약 100만 톤의 수송량을 보장하는 적하보증서를 현대상선에 발급했다.
선박건조와 취항이 모두 국내에서 이루어진 국적 LNG 1호선은 착공 후 2년 2개월 만에 완공되어 이상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의 현대유토피아(Hyundai Utopia)호로 명명됐다. 1994년 첫 출항에서 인도네시아 본탕의 LNG를 선적하고 평택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당시 우리나라 조선기술과 선박 운항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말레이시아 간 270번의 운항을 통해 총 1500만 톤의 LNG를 들여온 현대유토피아호는 우리나라 LNG 수송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1994년은 대한민국 최초 국적 LNG선인 현대 유토피아호가 취항한 해이다. 그전까지 해외 유수 선사만이 운영 중이던 LNG 수송사업에 현대상선이 그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것도 선박의 건조와 운항 모두 국내 기술로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현재 현대상선이 운영하고 있는 LNG선은 총 8척으로 이는 국내 최대의 선복량이다. 현대상선 LNG선단은 그 규모에 걸맞게 15만 CBM급, 13만5천 CBM급, 12만5천 CBM급 등으로 다양하며, 선형은 모스형과 멤브레인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운항 중인 항로는 카타르, 항로 면에서도 오만, 예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할린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작년에 건조된 현대에코피아호는 빙하 탐지 레이더 및 열선장치가 장착된 Ice Class 선박으로 빙하가 얼어붙는 사할린부터 뜨거운 사막의 중동지역까지 전 세계 어디로든 LNG를 수송할 수 있는 최첨단 선박이다. 이렇듯 현대상선의 LNG 선단은 최고(最古)와 최고(最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채 순항 중이다.
■ 문희성 한국가스공사 前 2대 사장 – “초창기 인프라 구축에 혼신 다했죠”
해외기관과 협력협정, 가스연맹 설립
천연가스산업 성장 일조 “가슴 뿌듯”
“현재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라, 무리하지 말고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 모르면 배워라”
지난 1985년부터 1991년까지 6년간 한국가스공사號를 이끈 문희성(文熙晟·76세) 2대 사장은 위의 3가지 모토를 중심으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문희성 前 가스공사 사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지난 1957년 졸업했다. 이후 한전에 근무하면서 발전, 송전, 변전과 판매, 영업에 관한 부분을 두루두루 섭렵했다.
미국에서 원자력분야를 공부하고 1966년경 한전에서 처음 생긴 원자력부서의 과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최초로 고리1호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려니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이후 두차례의 오일쇼크가 발생했고 우리 정부가 인도네시아에 기름을 구하러 갔다.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마땅한 기름이 없으니 가스를 가져가라고 했고 이 부분에서 천연가스 도입에 대한 인프라 필요성이 대두됐습니다”
이에 한전은 가스를 도입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나섰고, 3년여에 걸친 기초작업에 따라 한국가스공사가 발족하게 됐다. 문희성 전 사장은 한전 부사장으로 재직중 1985년 가스공사 2대 사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당시 가스공사 임직원은 700여명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강조한 부분은 ‘모르면 배워라’ 였습니다. 임직원들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원과 프로젝트에 대한 노하우가 없으니 당연히 외국 등 선진사례를 충실히 익혀야 한다는 취지에서 강조한 것이지요”
때문에 프랑스, 일본 등 천연가스 도입과 운영에 관한 부분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지리 않고 직원을 파견해 선진기업 도입과 훈련에 힘을 쏟았다. 또 기지건설 및 주배관 건설 부분에 대한 실수를 줄여나가기 위해 품질관리와 안전관리에 전력질주했다.
“당시 가스보급확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현재 연구개발원의 필요성에 공감해 설립에 착수했고, 이어 GIIGNL 가입 등 국제협력체에 대한 가입을 늘렸습니다. 또한 일본의 도쿄가스, 오사카가스, 프랑스 GDF, 미국 IGT 등과 협력협정을 맺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사업에 대한 비즈니스의 토대를 닦은 셈이죠”.
문 전 사장은 해외사례를 검토한 결과 분명 천연가스시대가 빠르게 도래할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해외 벤치마킹을 통해서 국내에 가스연맹을 설립해 해외 가스연맹과의 네트워크 구성에도 일조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세월이 흘러 현재 2600만톤을 넘나들 정도로 크게 성장한 국내 보급현황과 안정된 공급인프라를 보면서 국내 에너지업계, 특히 천연가스산업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문 전 사장은 에너지 업계, 천연가스업계의 원로인 동시에 산악인이다. 국내는 물론 킬리만자로와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 해외 유명산까지 두루 섭렵했으며 지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산악회 회장도 역임했다.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며 배워야 한다”는 에너지 업계 원로의 흰머리에서 결코 쉽지 않았던 천연가스산업의 성장 발자취가 물씬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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