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있게 말하였다. 보라. 나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어떤 왕보다도 위대하다. 그 누가 나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열심히 지혜를 쌓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바람을 잡듯 허망한 일이었다.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도 많으며,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곧 근심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전 1:16~18)
전도서에 유명한 구절이 있다. 바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구절이다. 나는 전도서의 저자가 했던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보면서 그 말에 대해 실감한다. 수천년전에 한 이스라엘 왕이 했던 고민이나 내가 하는 고민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누구나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개인은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이스라엘 한 왕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볼까. 그것이 지금 시대에 큰 의미가 있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한 역사일 뿐이다. 지나가면 무의미하다. 어차피 누군가 이길 전쟁이었다. 위대한 운동선수가 되어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의미있는 일일까? 아니, 그런 사람은 해마다 존재해왔다.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냥 주인공만 바뀌었을 뿐.
역사는 그저 반복될 뿐이다. 진실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슨 일이든지 누가 이미 해보았거나 말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과연무엇인가? (전 1:9-10)
나는 갑자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한 구절을 떠올린다. 언제였더라… 죽음을 임박하실 때, 한 여인이 찾아왔을 때였을 것이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었던 여인에게 한 제자가 나무랐었다. ‘차라리 저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한테 주는게 나을텐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 아니냐. 이것은 내 죽음을 위한 것이니 더 가치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의미있는 일일까? 몇명의 사람에게 돈을 조금 쥐어주어도 그 사람들이 다 죽고나면 어차피 세상은 그대로이다.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일까.. 전도서의 저자는 1장에서 우선 세상만사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점에서 크게 회의감을 느낀다. 어차피 세상은 매번 그게 그것, 돌고도는 것이다. 그 이후에 저자는 지혜를 탐구한다. 그러나 지혜가 그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실컷 지혜를 쌓아봐야 세상의 부조리함만 드러날 뿐이다. 세상 섭리를 다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며,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고민만 늘어난다. 단순하고 바보같은 삶이 차라리 낫다. 많은 것을 알려고 했더니 머리만 복잡해지고, 삶은 더욱 무의미해보였다. 그 후에 저자는 쾌락을 탐구한다. 또 재물을 탐한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내가 애써 구했던 그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다 헛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 2:11)
왜?! 이유는 단순하다. 지혜가 있어봐야 죽으면 말짱 꽝이다. 인생에 앞에는 언제나 최종 목적지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똑똑한놈 무식한놈 부자, 가난뱅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의미없다. 죽으면 모두 잊혀지고, 모두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나는 사는 게 싫어졌다.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다 괴로울 따름이니 모든 것이 너무나 속절없고, 바람을 잡듯 허무해보일 뿐이다.’ (전 2:17)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애쓸 명분도 의욕도 다 잃어버렸다.
완전한 허무감이 저자를 뒤엎었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토록 삶이 고민스러운 것이었나! 나는 왜 인생을 단순하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조로증에 걸린 환자처럼, 내일 죽을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세상을 본다.
이후에 저자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나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엥?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다. 방금 저자는 쾌락을 추구하다가 모두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즐기며 사는 삶이 최선이라니!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저자는 무슨 뜻으로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
07.11.22
2.
전도서 3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3:11)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세군데 밑줄을 그어보자. ‘때를 따라’, ‘영원을’, ‘시종을’ 나는 이 절의 핵심은 위 세 구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구절은 ‘시기’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알맞은 시기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사람은 그러한 시기가 언제 펼쳐질지 매우 궁금해하는 속성이 있으나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것은 공동번역이다. 사람들은 시기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놓으신 시기가 있고, 그것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깨달음이다.
3장의 처음부분으로 돌아가보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크게 두 가지 ‘시기’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이다.
태어날 때, 죽을 때
뽑을 때, 심을 때
치료시킬 때, 죽일 때
세울 때, 헐 때
웃을 때, 울 때
춤출 때, 슬퍼할 때
돌을 거둘 때, 던져버릴 때 (이것은 농사를 위한 돌제거를 말한다.)
안을 때, 멀리할 때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찾을 때, 잃을 때
지킬 때, 버릴 때
꿰맬 때, 찢을 때
말할 때, 잠잠할 때
사랑할 때, 미워할 때
평화할 때, 전쟁할 때
이 모든 때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자연이 돌아가는 섭리라기보다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모든 일들을 포괄하고 있다.
잠언 7장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 하나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무얼 생각하라는 것일까?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분이 정하신 때과 시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긍정적인 일, 부정적인 일 모두 하나님의 뜻 아래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전도자는 왜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전도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매우 깊은 뜻이 있다. 전도서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나는 매우 난해한 번역에 대한 정확한 번역 그 이외의 어떤 주석도 참고하지 않고 다만 전도서 본문을 수십번 읽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참고하고 싶지 않았다. 순수한 내 관점에서 아니 전도서 자체가 말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사실 1번 글을 쓸 때만 해도 전도서는 의문투성이의 책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저자의 핵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08.1.19
3.
지난 번 글에서 전도서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시기가 있고, 그 시기는 사람이 깨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가 그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7:13~14)
전도서 7장에서 형통한날, 곤고한 날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 두가지 시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나는 전도서와 욥기의 흡사성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욥기는 참으로 심오하기 짝이 없는 책으로서 그 깊이에 매료되어서 대학부 시절 욥기를 너무나 즐겁게 공부하였던 기억이 난다. 욥기의 심오함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점에 있으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매우 깊이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주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나는 욥기와 관련하여 ‘David Atkinson’의 강해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단이 하나님께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David Atkinson 의 강해에 이렇게 해설한다.
사욕이 없는 선함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욥은 선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인가? 그 질문은 종종 이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직 종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 때문에 종교적인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오직 그 믿음이 당신에게 가져다 줄 유익에 의존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목적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차이를 표현할 수 있다.
참으로 신앙의 심오한 면이다. 신명기 말씀만 철썩같이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경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어디서나 만사 형통할 것 같다. 그러나 의인은 때로 고통중에 거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것인가?
욥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욥기의 핵심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원하시는대로 행하시며 그 자체로 온전하시다. 욥기 38장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는데 내가 이해하는 그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네가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세상의 이치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나의 생각을 알겠느냐
율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거래관계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내가 잘되고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순서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여도 잘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모순같은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제의 대상이지 거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단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자체의 기쁨으로 인한 행위여야한다. 다시 Atkinson 의 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논쟁이나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신적인 합리성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기 대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논리에 제한될 수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계신다.
나는 이러한 욥기의 결론에 압도당하였다.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논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잘 안되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시 하나님께 뭔가 잘하면 하는일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많은 교회에서의 가르침도 이러한 부분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해서 회개하고 어찌어찌 했더니 성공하더라… 세상에 이렇게 잘못된 진리를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결코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께 잘한다고 잘되게 해주시고, 못한다고 벌주시고 이러시는 분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대하여 진실한 믿음으로 행하여도 무언가 하는 일이 잘 안될 수 있으며, 사람의 계획은 언제나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히 깨달을 수 없는 계획아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상기해야한다. 그분에 대한 신앙은 신앙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고 교제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전도서는 이러한 욥기의 사상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7장)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난해구절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세상에 의인이면 의인이지 지나친 의인이라는 것도 있을까? 의로울수록 좋은 것 아닌가?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 우선 전도서 8장에 관련된 구절을 조금 인용해야겠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8:12~14)
이것은 저자의 기존 생각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잘되고 악인을 잘되지 못하는게 당연한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을 보니 의인이 벌을 받기도 하고 악인이 상을 받기도 하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자는 깊은 허탈감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어디서나 이러한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남한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북한보다 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말이다. 성경 어디서 그런 사실을 가르치는가? 경제적인 부와 신앙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어느 성경이 그런 부분을 가르치는가? 이것은 말도 안되는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이런 가르침을 어서 포기해야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
이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어떤 순수하지 않은 의도로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악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말을 중용의 의미에서 해석하여도 크게 나쁜 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인이 되는 것을 통해 무언가 얻을 것처럼 의인이 되는 경우, 악인이 되어 무엇가 악하게 득을 보고자 하는 경우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여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 된다.
잘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헛되다(전 8:14)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능히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분의 시기에 대해서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시기와 때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그분의 때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잘되는 때가 있고, 못되는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원하시는대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예기치 못하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저자에게 깊은 허무감을 주었다.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저자는 죽음의 의미와 인생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을까…
08.1.30
4.
이제 정말 핵심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두번째 글에서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다.. 인생은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인생…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다 깨닫지 못한다..
왜 저자는 그러한 사실을 언급했는가.. 그것은 다음의 현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의인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못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더 많이 접하고 있다..
저자는 원래 의인이 잘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예기치 않게 흘러가고, 의인이 못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허무한 것임을 알았다. 의롭게 행하는 것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잘될 것을 바라고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무시하는 행위이다..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의 잣대로 하나님을 평가하는 매우 무서운 행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였는가.. 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는가… 모든 것이 현실 앞에서 이면을 보지 못했던 그들의 불신앙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때만 필요한 존재로 생각했다. 신앙은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나는 제발 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을 어서 속히 포기하기를 바란다. 정말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신앙을 왜 수단으로 만드려고 하는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은혜를 받기 위한 행위가 되어서도 안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행위가 될 때 그 의미가 있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몇배로 돈을 불려주실 것을 기대하고 헌금하는 것은 헌금의 의미를 매우 심각하게 퇴색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투자대상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이미 받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드려야하는 것을 더 큰것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인가…
나는 이런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 주일날 사업을 하지 않는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주일날 사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매우 무시하는 행위이다.
나는 군대에 가기 전에 어떤 분으로 부터 좀 더 편한 곳으로 아는 분을 통해서 가게 해 줄테니 신상명세를 좀 달라고 하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군생활을 하고 싶었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차라리 나를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달라고, 그것이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이다. 정말 힘들게 군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그것을 바랬다.. 내가 만일 주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지는 것을 충분히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일에 돈을 더 못 번 만큼 더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질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그로인한 기쁨이 더 샘솟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을 포기하면서 사업이 더 안된다고 하나님께 불평한다면 차라리 주일날 일을 하는 것이 낫다.
아무튼 전도서는 의로운 행위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와야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말을 그러한 맥락에서 강조하고 있다. 전도서의 저자의 허무감은 크게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
– 살아서 하는 수고가 허무한 일임
– 지혜(혹은 장래일)를 알고자 해도 허무함
– 재물을 사랑하는 일도 허무함
– 잘되기를 바라고 의를 행하는 것은 허무함.
그러나 저자가 ‘허무한 일’ 이 아니라 ‘좋은 일’ 이라 언급한 일도 있다. 그것은,
–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분복(3:22, 2:10)
– 수고하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2:24), 근심을 떠나게(11:10)
수고하며 낙을 누리는 것=하나님의 선물임(3:13)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분복(5:19)
기쁨과 즐거움으로 먹고 마심(9:7), 아내와 즐겁게(9:9)
–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3:12), 악을 물러가게(12:10)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킴(12:13)
이러한 것은 몇개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로, 인생을 단순하게 여기고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 좋다. 어차피 인생은 고달픈 상황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서 즐거움과 행복감을 누리는 것 좋은 일이다. 인생을 심각하게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로 알고 누릴 줄 아는 것이 좋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전도서의 가장 큰 핵심이다. 전도서에서 나오는 단어중에 가장 눈여겨 보아야하는 표현은 ‘헛되다’가 아니라, 바로 ‘분복’, 그리고 ‘낙을 누린다’ 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분복’이라는 단어의 특징은 ‘수고’라는 단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등장한다.
전 3:22, 5:18, 9:9, 2:10 등등이 그 예인데 ‘수고하며 낙을 누리는 것’이 ‘분복’ 이라고 매우 많은 곳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낙을 누린다’ 는 말도 매우 많이 등장하는 말이며 ‘즐거움을 누린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보면, 그 등장횟수는 거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은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헛되다’라는 단어만큼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낙을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핵심적인 의미는 전도서 5:10~6:12 에서 가장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보통 이 본문은 자주 설교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도서 5:10~6:12 부분이 전도서 저자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6:1~2)
돈과 존귀까지 많이 받았지만,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왜일까? 사실 이 내용은 5장과 연결되어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5:16)
이유는 돈으로 만족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에 대하여 언제나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와 언제나 비교한다. 그래서 더 가지지 못한 것에 언제나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매우 원초적인 심리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낙을 누리지’못하고 만족하지 못한다. 가진자는 지키기 위해서 더 안간힘을 쓰고, 또한 죽음 앞에서 자신의 부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부의 헛된 면이다. 성경에도 공수래 공수거의 표현이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가가 더 중요하다. 또한, 그것을 누릴 줄 아느냐가 중요하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른다면 어느 때든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6:6~7)
그래서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릴 줄 아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은 수고롭고 헛된 것이고,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삶을 즐거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거나 삶은 유한하며 언젠가는 끝난다. 인생은 수고롭고 헛되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삶 속에서 느끼는 사소한 소중함,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 맛난 음식을 먹을 때의 쾌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감정..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인생의 다른 한 측면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누릴 줄 모른다면 인생은 매우 무가치하고 어두울 것이다.
너무 꿈을 크게 가질 필요는 없다. 인생은 어찌보면 다 고만고만하다… 전혜린은 ‘평범한 삶’을 거부하다가 31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평범하게 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결혼한 여인으로써 아이들을 키우면서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매우 큰 허무감, 권태를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꿈을 너무 크게 가졌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다른사람보다 유명해지거나 더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중요한 것은 만족할 줄 아는가?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가? 삶의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가? 삶을 너무나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인생을 너무나 대단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꼭 대단한 위인이 될 필요도 없다. 유명인사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반대로 경쟁을 포기해 버리는 자세로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일을 즐거워하는 것’ 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리고 언제나 ‘수고하고 애쓰는 것’과 ‘낙을 누리는 것’이 병행되어 나온다. 무엇이냐하면 성실성에 대한 것이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이 둘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즐거움만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은 수고로운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주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함으로서 놀라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 어떤 극단으로도 치닫지 않는다.. 단순히 소박하고 순수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순한 삶의 진리에 대하여 매우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삶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한 불확실성과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 그러나 노력하고 수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 좋은 일이다.
내 전도서 성경책에 오래전에 내가 어디선가 옮겨 적어놓은 구절이 있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다. (9:1) 이 신비를 알아내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되고 무익한 일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한 누리라고 충고한다.
전도서는 유대인들의 가장 즐거운 절기인 장막절에 낭독된 책이라고 한다. 나는 전도서를 깊이 묵상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의아했다. 이것은 그리 즐거운 내용이 아니고, 삶의 허무함을 극도로 부각시킨 책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서의 핵심단어는 ‘허무함’ 이 아니라 ‘낙을 누리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왜 이 책이 장막절에 낭독되었는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인생의 즐거운 절기에 전도서는 그야말로 적합한 책이며 전도서야 말로 인생의 즐거움을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08.2.26
좋은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