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

나는

내 죄 때문에

혼자 바닥 외로운 곳에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올리워 졌다.

하늘 위로 위로..

새 같이 날으는 기쁨이었다.

한 쪽에서는

주님께서

대신 낮아지고 계셨다.

일흔 번 씩 일곱 번

또 똑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힘들때
나는 일흔번씩 일곱번…
이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러셨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하라고
그렇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도
나를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이 것을 붙잡곤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히 솟아난다.
그리고 완벽하다.

내가 아무리 힘을 써서 죄를 짓는다 한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그 죄를 다 씻는다.
죄가 더하면 더할수록
주님의 은혜가 그것과 비할바 없이 넘쳐난다.

적게 사함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절실히 절실히 내가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느낀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다.
원수가 날 정죄할 때에도
나는 의롭게 설 수 있다.

나에게는 더이상의 정죄함이 없다.
왜냐면 나는 주 보혈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가슴을 때리고
가슴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흘러납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은 완벽하십니다.
그분의 은혜가 저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주님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무엇에 비유할까요?
저는 마땅한 비유를 찾고자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뒤져봅니다.
주님 저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만큼이나 문장력을 주신다한들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포기해야 겠습니다.

주님께 또한번 다짐합니다.
위엣것을 찾으며 살겠다고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잘못의 시인에 대하여

“저는 옛날에 제가 이정도면 부모님 생각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저는 아주 유치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옛날에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해서 잘못했다는 걸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걸 그 당시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지금 자신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그저 옛날에 자신이 잘못생각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금의 내 모습은 완전한 모습으로 여기는 착각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은 지금의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너무나 잘못된 생각들에 파묻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한다.

그 또한 일종의 겸손인듯 싶다.

마태복음 8 장

마태복음 8장

10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11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12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신기하게까지 여기신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으면서도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회 중 8장을 묵상하며 나누는데 12절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어지면서 머리속에 들어왔다.
자기도 군대를 다스리는 사람이라서 자기 졸병들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고 이래라 저래라 말만하면 듣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내가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제 하인이 앓고 있는 이 질병은 예수님이 쫄다구 부리듯이 부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저도 제 아래 있는 쫄병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그들이 알아서 듣는데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할 때 가만 있었더도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가만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하인을 찾아가서 고쳐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을만큼 황송했다는 것이다.
나라면….. ‘어서와서 고쳐주옵소서’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이방인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엉뚱한 믿음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더욱 놀라운 것으로 비추어진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비스런 일이다. 그는 유대인들과 달리 순수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꼭 믿음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아는대로 믿느냐? 하는 것이다.

판단의 한계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판단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한번 생각해보았음 한다.

* ‘판단하라’

1. 시대를 분별함,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함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 12:56.57)

이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른일을 판단할 줄 아는 것은 언제나 합당하다.

2.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을 따라 판단함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3-16)

바리새인들이 에수님의 증거를 참되지 않다고 판단한것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증거를 참되다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도 예수님께서 말리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느냐, 성령을 따라 판단하느냐에 따라 판단의 옳고 그름이 결정됩니다. 판단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조금더 넓힌다면 하나님의 말씀까지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3. 교회 안의 분명한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 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11-1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6:2-3)


* 판단치 말라

1. 그리스도인 사이의 서로 다른 성경적 가치관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 14:3)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고전 10:29-30)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영역으로 주어진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 상대방의 가치관에 대해 비판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 가운데 상대방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비판할 수 없다.

2. 외모, 재산, 성격, 학벌, 인종, 성별, 건강상의 이유 등의 모든 이유로 사람을 차별 대우 하는 것은 안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3-4)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저 사람은 부자다, 가난하다, 예쁘다, 못생겼다, 흑인이다, 백인이다 라는 것 까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 그 판단으로 인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도 심히 아리따운 여자였다고 판단하는 부분이 나온다.

3. 서로 욕하고 비방하며 싸우는 일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 4:11)
이 말씀의 배경은 4장 1절에 나오듯이 서로 욕을 하며 싸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4. 서로 비판하는 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자기도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비판받게 한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죄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비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교회 안에서의 징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교회 안에서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허락한다. 그리하여 그가 회개하면 용서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우리가 징계하고 판단하고 쫓아내어야 할 대상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도 자신의 죄를 판단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