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 전투

본문은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왜 지팡이를 드는 포즈를 취했을까?
좀더 편한 포즈를 하나님께서 취하도록 하셨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지팡이를 두손으로 붙들고 앉아있는 포즈같은..

중보자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만일 더 편한 포즈를 취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강조되었겠지만
중보자의 노력은 더 대수롭지 않아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중보자의 땀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편에서 중보자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아말렉 전투의 독특한 싸움방식은 왜 하필 그런 작전을 하나님께서 구상하도록 하셨을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재밌어진다.

1.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혼자만의 믿음으로 싸우지 않게 하셨나?
2. 왜 여호수아가 보이지 않는 산꼭대기에 모세를 두셨나?
-> 이건 여호수아가 죽도록 싸우게 하시려고 그랬을 것이다. 아마 지팡이란게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 같다. 그저 자기 힘 다해서 싸웠을 것이다. 만일 모세가 보였다면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겠지. 시험 잘보도록 기도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안들어주시리라 예상하고 죽도록 공부하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잘보면 기도의 덕분일테고.. 어려운 확대해석인지도 모르겠다.

3. 왜 모세도 부족해서 그를 돕는 자들까지 필요로 했을까?
이건 중보자된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해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비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가 싶다.

4. 모세가 싸우고 여호수아가 지팡이를 드는 전투구조였다면 어떨까?

5. 지팡이를 올리면 지고 내리면 이기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질 거 같은데 올릴 필요가 없었겠지. 그럼 게임은 일방적으로 끝났을 것이고 나중에 결과를 돌아보면서 이게 정말 지팡이를 내리고 있어서 된 것일까? 한번쯤 의심해볼만 할 것이다.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시험해봐야 좀더 결론이 확실할테니깐. 싸움의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여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중보자 자신의 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6. 왜 모세가 미리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직접 쳐부수지 않았을까?(일반적 싸움방식)
이건 아마 여호수아 교육목적에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끝난뒤에 외우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 아말렉 전투가 유일할 것이다.

별 잡생각이 다 나지만 할튼 아주 특이한 전투방식이다.
결론은 특이한 방식은 교육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여호수아가 치러야할 수많은 전투를 예상하시고 미리부터 훈련시키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육에 열의있으신 분이라 생각된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 이라는 말은 모호해서 언제나 궁금거리다.
재인학사님이 소개한 다른 번역은 조금 무리인거 같기도 하다.
그 시대 전쟁에서 깃발이 의미하던 것이 무언지 알면 조금 이해가 쉬우리라 예상되 되는데 마땅한 주석이 없다.

반석에서 강물이 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냥 강물.. 이라고 하면 잘 와닿지 않지만 한강을 떠올려본다면..
그 물이라는게 그런 강이었다면.. 그것도 물하나 없는 광야 한가운데서 말이다. 실제로 한강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강이란 말은… 놀랍다.

맛사 다음 목적지가 엘림이라는 사실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특히 하나님의 테스트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들은 맛사에서 하나님의 test를 받은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내했더라면 엘림에 이르렀을 텐데.

아브라함이 아들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포기하고 안잡았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수양은 발견했겠지. 그걸로 수양을 잡아 하나님에게 제사로 드리면서 어차피 아들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었어.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아들을 잡으려고 했기에 그는 열국의 아비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엘림에 준비해놓은 물이 있었음에도 맛사에서 좀더 참지 못해서 TEST에 불합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에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는 유혹을 당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는 말씀으로 이겨내셨다. 이스라엘과 똑같은 시험에 합격한 것과 불합격한것의 차이.

시험당할 때에 피할길을 내신다는 것도 기억해봄직하다. (고전 10:13)
관련이 되는 구절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로몬의 영광과 한 송이 백합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8-29)



솔로몬은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최고로 지혜있고 명성있고, 부유했다.
그러나 그가 입었던 옷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들의 핀 한 송이 백합.

그는 수고도 하지 앟았고 옷을 지어 입은 것도 없지만
한나님께 내어 맡긴 영혼은
그 분 께서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것으로 존귀한 것으로 입히 주신다.

십자가의 고통

사형수는 십자가 형에 앞서서, 즉 형장으로 떠나기 전이나 가는 길목에서 먼저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기둥에 묶인 죄수를 때리는 채찍은 가죽끈의 끝 부분에 금속 조각이 달린 것으로서,
이 채찍에 맞으면 죄수의 등은 피로 얼룩지고 맞은 자국마다 찢겨진 살이 너덜거리
는 참혹한 모습이 되게 마련이었다.

이 형벌은 죄수의 신체를 허약하게 함으로써 십자가에서 당할 고통의 기간을 단축시
키고 죽음의 순간을 재촉한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호의인 셈이었다.

사형수들은 보통 자신의 십자가(수직막대기가 아니라 가로대인 ‘파티불룸’)
를 처형장까지 운반해야했다. 희생자는 처형장까지
행진하고 나서 처형을 당했다. 팔레스틴에서 일부 유대인은 이렇게 완전히
벌거벗은 것에 분명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십자가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사형법이었다.
온몸이 발가벗쳐진 채 군중의 시선 앞에 노출되는 것은 팔레스틴 유대인에게는
특별히 수치스런 일이었는데다가,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냉대와 더불어 사형수는
군중이 보는 앞에서 배설을 해야만 했고,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렸다.

희생자를 십자가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밧줄로 묶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못으로 박는 경우도 있었다.
손이 묶인 죄수는 피가 흐르는 상처에 몰려드는 벌레를 쫓을 수 없었다.

죄수의 체중으로 인해 몸이 늘어지면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발 밑에 있는 받침대가 지탱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침내 기력이
쇠진하게 마련이었고, 결국(보통 며칠이 지나면)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사하는
것이 죄수의 운명이었다. (IVP 성경배경주석의 글)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 3:17)
 
오늘 학교 오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도와줄까 말까 고민이 되었는데 가지고 있는 세금 외에는 돈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그 때 마음에서 이 말씀이 메아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새롭게 가슴을 쳤습니다.
도와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와줄 마음이 생기는 데도 다른 이유로
그것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동정심이 생기고 암만 불쌍히 여기고 가슴아파 한다 할찌라도
누군가를 도와주겠다고 아무리 다짐을 한다한들 그것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위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이라는 구절이 도와줄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이 아니라 도와주고
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도 그것을 막고 도와주

지 않으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은 동사..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말씀도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그 말씀을 찾았더니 그 말씀 다음에 이 말씀이 적혀있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는 만큼 실천하도록 하자.

고후 12장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나의 못난 점 죄에 빠지기 쉬운 나의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말씀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나 어제 죄지었다. 나 약하지?” 하며 자랑한다는 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습지만요. 도대체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더 보기 “고후 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