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도 자세히 보면 앞뒤가 안맞는거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마 5ㅣ15-16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일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을 비취게 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사람 발 아래 두지 말고
등경위에 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도록…
뭔가 발견하셨는지..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건 무슨 말입니까? 사람 앞에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말인데요..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될까요?
퀴즈입니다.
저도 이건 정확한 답을 못내렸습니다.
99.3.27
이거 몇일 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상을 못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
중요한 것은 동기이죠.
드러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상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빛이 마음놓고 비춰질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
6장 17절 말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 말씀이 더 어려웠어요.. 그렇다면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도
일부러 감추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련회같은 곳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목이 쉬잖아요?
그렇게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를 드러낸다면
기도할 때에 목을 아껴가며(?) 기도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6장 17절 말씀은 문맥을 자세히 살펴볼 때에 강조의 의미가 짙었구요
그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이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목이 쉬어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 가지고 상이 없고 그러진 않구요
목이 쉬어서 째려고 기도를 목아 찢어져라고 한다면…
–;
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목이 쉰거 가지고 우리 빛이 사람앞에 비춰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는 않죠…–; 쩝
선악을 안다?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요 죄가 들어와서 그런것이 아니라 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입니다.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은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숨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이거 어려운 문제입니다. 7절의 눈이 밝아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치마를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까지는 그들이 벗은것을 몰랐다는 말이 되죠. 더 보기 “선악을 안다?”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하나
약 3장
요즘 사복음서를 읽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다가 이전부터 궁금해 오던 문제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저도 중등부 교사로 있는데 여기서 말사는 선생이 그저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면 나도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3장을 읽다가 비슷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으니…..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타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랍비는 선생과 같은 말입니다. 이 당시의 선생, 즉 랍비의 모습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모습 그대로 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의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1절에서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고
2절 에서는 우리가 다 말의 실수가 많다고 하고
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10절에서는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우리는 다 말을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 쉬우니 만일 선생이 그렇게 말의 실수가 많으면 선생이 아닌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흔히 말을 잘 다스리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이 내용에서 말로 인한 상당한 폐해를 말하고 또한 그것을 능히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우리 입으로 저주가 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해야하는 선생이 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1절에서 선생된 우리가.. 라고 했는데 이미 선생이 된 사람들에게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선생 일을 때려 치우라는 것일까요? 2절의 실수는 무엇일까요.. 특이한 것은 3절 이후에 야고보가 혀의 폐해를 이야기 하면서 혀가 어떤 말하는 대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죄로 물들인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놀라웠습니다. 대충 말씀을 읽을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야고보는 분명히 혀가 자기 자신을 더럽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능히 제어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더럽힐까요..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
함으로서(9절) 자기 온 몸을 죄로 더럽히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분명히 ..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 28:20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딤후 4:2에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선생은 어떤 선생입니까? 그것은
1. 말이 많아 남을 저주.. 하는 선생
– 선생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남을 저주하기 쉬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2.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선생은 외식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1절에서 선생된 우리가.. 라고 했는데 이미 선생이 된 사람들에게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선생 일을 때려 치우라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라는 말이 야고보와 수신자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야고보와 같이 선생된 사람들만 포함에서 우리가..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선생된 자가.. 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 편이 오히려 오해를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 가르치는 우리가.. 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KJV에는 아예 그 부분이 없이 우리가..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고 보면 아마도 앞의 저의 결론은 잘못 된 듯 싶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나 아마도 그 길들인 정도의 차이에 따라 야고보는 선생이 되려면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 조건을 제시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된 우리가.. 라는 말에서 야고보 자신도 선생이라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히 길들일 사람은 없지만 선생이 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얼마나 길들였느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혀를 길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시 정확하게 결론을 내려서 다시 번역해 본다면 야고보서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 야고보서 1장 – 眞 역 (^^) >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나를 비롯한 선생된 사람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말에 실수가 많아서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것은 참 어려워서 능히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의 입에 재갈을 먹여서 말 전체를 조종하며 작은 키 하나로 배를 사공 맘대로 조종하는 것과 같이 혀도 작지만 작은 불씨가 수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대단히 영향이 큽니다. 혀는 그렇게 우리의 온 몸을 죄로 더럽히기 때문에 우리 온 인생을 망쳐 놓습니다. 여러 동물은 능히 길들일 수 있다고 해도 대단히 악한 이 혀는 아무도 길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선생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는데 이 혀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므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내 뿜게 되어 엄청난 심판을 감수하여야 합니다. 마치 한 샘에서 더러운 물과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 무화가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 남을 험담하고 저주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 선생이 되려해서는 안됩니다.)
아삽의 믿음(시 77편)
시 77편은 참 읽을 때 마다 이상한 감동이 있다.
아삽이 스스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생각에 마음이 상했을때 그 옛적 기사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간단한 내용인데..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극한 고통 가운데서
심령이 궁구하여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 고민할때에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해 낸다.
12절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
주는 기사를 행한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
고
구름이 물을 쏟고…
….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
나이다.
이틀전.. 이 말씀을 QT본문으로 읽으면서
아삽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삽은 분명 다윗시대때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삽이 기억해 낸것은 그의 지금의 기사도 아니고
그가 체험했던 기사도 아니고
오직 그가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온 것을 기억해 내었음이 아닌가?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는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나 하신 주님
나는 무언가 내 삶이 지쳐올때 무언가 새로운 기적들을 원했었다.
그러나 아삽은 달랐다.
그의 심령이 하나님으로 인해 상하였을때에
그는 이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기사를 보았고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체험한 것처럼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얼마나 대조되는 믿음인가
그들은 홍해의 갈라짐을 보고서도 마라에서.. 신 광야에서..르비딤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삽은 그의 말씀만 가지고도 그것을 마음으로 사실로 믿었으니
참으로 그것을 가지고 그토록 고심했던 문제의 해결을 볼 정도로 깊은 하나님
을 체험했으니.. 참으로 놀랍다
성찬과 유월절
마 26:17-29
유월절은 대대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절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왜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것인지 대단 궁금했고,
지금 행하고 있는 성찬이 바로 그 대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찬이 왜 유월절 대신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눅 22:16)
유월절과 성찬을 연관시키면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많은 문제들이 매듭 풀리듯
풀어졌다.
첫째 문제는 왜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살과 피를 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살과 피로 여기면서 그를 기념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건 당신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친히 되셨음이고 유월절에 그 양을 먹듯이 우리가
상징적으로 그 분의 몸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처음 성찬을 행하신 날이
유월절이 아닌가.
둘째 문제는 그 뼈가 꺾이우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메시야
를 예언한 부분에서 인용한 성구겠거니 했으나 관련 구절을 찾아 보지 않았었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유월절 양이 되시기 위하여는 그 뼈가 꺾이우면
안되는 것이었다. 흠이 없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째 문제는 고전 11:26의 해석문제였다. 이것은 유월절과 연관지어서 해석된 것
은 아니었으나 성찬장면을 읽고 주석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바로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의 함께 하게 될 식사를 바라며 이 성찬을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마 26:29) 그런데 현대인의 성경은 이 구절을 그저 전도하라고 번?
?
해서 의아하다. 현대어 성경은 비슷하게 번역된 것 같다.
이것은 작년에 상당히 고민했었던 문제였다. 고전 11:26은 아무리 해도 해석이 안
되는 것이었다. 과연 성찬때마다 전도를 해야한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며
엄청나게 고민했었다. 그러나 ‘덮어놓고 기다림’이 최선이라는 것은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다. 모르는 문제는 재껴놓으면 언젠가 해석이 된다. 자주 있는 경우지만
이런 일이 생길때 마다 즐겁다.
또하나, 그렇다면 우리도 성찬을 급히 먹어야 하는가? 라는 아리송한 문제가 생겼
다. 그것은 출애굽기 12장에서 처음 유월절 규례를 규정할때 주신 명령인데 주석을
참고한 결과 허리에 띄 띠우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급히 먹는 것은
유월절 처음 행해졌던 그 때에만 해당하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
굽에서의 탈출을 예비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도
처음에만 적용되는 규례였다.
아직까지 이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니..
아무도, 나에게 이것을 설명해 준 사람이 없었다.
다들 아는 사실을 나만 이제 깨달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15년 넘게 다녔
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