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판단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한번 생각해보았음 한다.
* ‘판단하라’
1. 시대를 분별함,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함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 12:56.57)
이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른일을 판단할 줄 아는 것은 언제나 합당하다.
2.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을 따라 판단함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3-16)
바리새인들이 에수님의 증거를 참되지 않다고 판단한것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증거를 참되다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도 예수님께서 말리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느냐, 성령을 따라 판단하느냐에 따라 판단의 옳고 그름이 결정됩니다. 판단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조금더 넓힌다면 하나님의 말씀까지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3. 교회 안의 분명한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 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11-1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6:2-3)
* 판단치 말라
1. 그리스도인 사이의 서로 다른 성경적 가치관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 14:3)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고전 10:29-30)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영역으로 주어진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 상대방의 가치관에 대해 비판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 가운데 상대방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비판할 수 없다.
2. 외모, 재산, 성격, 학벌, 인종, 성별, 건강상의 이유 등의 모든 이유로 사람을 차별 대우 하는 것은 안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3-4)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저 사람은 부자다, 가난하다, 예쁘다, 못생겼다, 흑인이다, 백인이다 라는 것 까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 그 판단으로 인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도 심히 아리따운 여자였다고 판단하는 부분이 나온다.
3. 서로 욕하고 비방하며 싸우는 일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 4:11)
이 말씀의 배경은 4장 1절에 나오듯이 서로 욕을 하며 싸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4. 서로 비판하는 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자기도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비판받게 한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죄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비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교회 안에서의 징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교회 안에서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허락한다. 그리하여 그가 회개하면 용서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우리가 징계하고 판단하고 쫓아내어야 할 대상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도 자신의 죄를 판단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 장
마태복음 8장
10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11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12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신기하게까지 여기신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으면서도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회 중 8장을 묵상하며 나누는데 12절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어지면서 머리속에 들어왔다.
자기도 군대를 다스리는 사람이라서 자기 졸병들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고 이래라 저래라 말만하면 듣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내가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제 하인이 앓고 있는 이 질병은 예수님이 쫄다구 부리듯이 부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저도 제 아래 있는 쫄병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그들이 알아서 듣는데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할 때 가만 있었더도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가만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하인을 찾아가서 고쳐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을만큼 황송했다는 것이다.
나라면….. ‘어서와서 고쳐주옵소서’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이방인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엉뚱한 믿음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더욱 놀라운 것으로 비추어진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비스런 일이다. 그는 유대인들과 달리 순수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꼭 믿음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아는대로 믿느냐? 하는 것이다.
갈 4:3-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3-4)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명분을 얻게 된 것일까요?
말씀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 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아들이셨는데 율법아래 스스로 처하심으로서
우리는 반대로 율법아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 율법의 종
반대로 우리는
율법의 종->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바꿔치기 당함으로서 우리의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방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속량하신 방법이 너무나도 놀랍고도 오묘했습니다
아말렉 전투
본문은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왜 지팡이를 드는 포즈를 취했을까?
좀더 편한 포즈를 하나님께서 취하도록 하셨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지팡이를 두손으로 붙들고 앉아있는 포즈같은..
중보자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만일 더 편한 포즈를 취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강조되었겠지만
중보자의 노력은 더 대수롭지 않아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중보자의 땀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편에서 중보자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아말렉 전투의 독특한 싸움방식은 왜 하필 그런 작전을 하나님께서 구상하도록 하셨을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재밌어진다.
1.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혼자만의 믿음으로 싸우지 않게 하셨나?
2. 왜 여호수아가 보이지 않는 산꼭대기에 모세를 두셨나?
-> 이건 여호수아가 죽도록 싸우게 하시려고 그랬을 것이다. 아마 지팡이란게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 같다. 그저 자기 힘 다해서 싸웠을 것이다. 만일 모세가 보였다면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겠지. 시험 잘보도록 기도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안들어주시리라 예상하고 죽도록 공부하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잘보면 기도의 덕분일테고.. 어려운 확대해석인지도 모르겠다.
3. 왜 모세도 부족해서 그를 돕는 자들까지 필요로 했을까?
이건 중보자된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해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비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가 싶다.
4. 모세가 싸우고 여호수아가 지팡이를 드는 전투구조였다면 어떨까?
5. 지팡이를 올리면 지고 내리면 이기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질 거 같은데 올릴 필요가 없었겠지. 그럼 게임은 일방적으로 끝났을 것이고 나중에 결과를 돌아보면서 이게 정말 지팡이를 내리고 있어서 된 것일까? 한번쯤 의심해볼만 할 것이다.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시험해봐야 좀더 결론이 확실할테니깐. 싸움의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여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중보자 자신의 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6. 왜 모세가 미리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직접 쳐부수지 않았을까?(일반적 싸움방식)
이건 아마 여호수아 교육목적에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끝난뒤에 외우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 아말렉 전투가 유일할 것이다.
별 잡생각이 다 나지만 할튼 아주 특이한 전투방식이다.
결론은 특이한 방식은 교육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여호수아가 치러야할 수많은 전투를 예상하시고 미리부터 훈련시키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육에 열의있으신 분이라 생각된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 이라는 말은 모호해서 언제나 궁금거리다.
재인학사님이 소개한 다른 번역은 조금 무리인거 같기도 하다.
그 시대 전쟁에서 깃발이 의미하던 것이 무언지 알면 조금 이해가 쉬우리라 예상되 되는데 마땅한 주석이 없다.
반석에서 강물이 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냥 강물.. 이라고 하면 잘 와닿지 않지만 한강을 떠올려본다면..
그 물이라는게 그런 강이었다면.. 그것도 물하나 없는 광야 한가운데서 말이다. 실제로 한강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강이란 말은… 놀랍다.
맛사 다음 목적지가 엘림이라는 사실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특히 하나님의 테스트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들은 맛사에서 하나님의 test를 받은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내했더라면 엘림에 이르렀을 텐데.
아브라함이 아들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포기하고 안잡았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수양은 발견했겠지. 그걸로 수양을 잡아 하나님에게 제사로 드리면서 어차피 아들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었어.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아들을 잡으려고 했기에 그는 열국의 아비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엘림에 준비해놓은 물이 있었음에도 맛사에서 좀더 참지 못해서 TEST에 불합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에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는 유혹을 당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는 말씀으로 이겨내셨다. 이스라엘과 똑같은 시험에 합격한 것과 불합격한것의 차이.
시험당할 때에 피할길을 내신다는 것도 기억해봄직하다. (고전 10:13)
관련이 되는 구절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후 12장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나의 못난 점 죄에 빠지기 쉬운 나의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말씀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나 어제 죄지었다. 나 약하지?” 하며 자랑한다는 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습지만요. 도대체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더 보기 “고후 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