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한 고민

성경통독을 하다가 민수기 14장을 읽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을 갔다온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굼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옵소서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 14:20)

그 다음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하셨는데 그들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면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요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98.11.29
민수기 14장을 읽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불신하자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14:19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
14: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래놓고는

14:21-23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하시니 그렇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형벌을 주지 않는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용서라는 개념이 형벌을 내리지 않는 개념이라면 도대체 죄 사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오늘 이야기를 나눴던 교회 형은 그것은 기억지 아니하심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실 그렇다면 기억지 아니하심이라는 것은 또 뭔가. 죄를 벌하고 기억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죄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번지은 죄를 가지고 영원히 벌하시고 생각날때마다 벌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오늘 출애굽기를 다시 묵상하다가 이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습게도 내가 성경을 헤프게 읽은 탓이었던 것이다. 성경통독을 한답시고 필요한 부분만 주의깊게 읽고 잘 아는 부분이라고 대충 읽은 탓이었다.
민수기 14장 12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으하하..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완전히 죽여 없애고 모세를 세워서 다른 코고 강대한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 뜻을 돌이키셔서 전염병을 내리지 않으심. 그러나 그들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하심.. 그것은 그들의 죄가 심히 많은 까닭이다.
그래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다. (그 때는 왜 보지 못하였을까)

14:15-16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그러니 용서해 달라)

이로서 다른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죄악중에도 형벌받지 않을 죄악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고 다른 말로 어떤 죄악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내릴 수 있는 대답은 죄악의 크기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 사함이라는 것이고 그러나 반드시 그 값은 적게라도 치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받을 자에 대한 대처라는 것이다.
아합왕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서 죄용서를 받았으나 그 값이 치러졌고 다윗왕은 하나님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칭송받는 왕으로 아직도 기억되지만은 밧세바와의 그 죄의 값은 가정의 파괴로 벌을 받게 되었다.

왕상21: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그러나 예수님 오신 이후의 우리의 죄 용서는 완전하다. 아직은 그렇게 믿지만 성경적 근거는 모르겠다.

99.6.10
하나님은 다른사람을 용서하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이 뉘우치지 않아도 용서하라는 뜻은 갖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에는 분명히 용서해야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뉘우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러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도 별 다르지 않지 않겠습니까?

99.6.21
재문이가 짚어주었지만 사실 오늘 교회에서 집에 오면서 까지도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용서를 원하실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글은 그저 문제제기에 그칠 뿐이지요. 확실한 정답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제가 지금까지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을 나눌까 합니다.
재문이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박은 자들의 죄를 돌리지 말라고 중보하
시는 내용을 가지고 그래도 용서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기도만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중보의 장면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사례이지요.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위해 중보했고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보한 행위 자체만으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했다거나 모세가 이스라엘을 용서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중보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해주시기를 위해 기도한 것이므로 그것만으로는 용서하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뉘우치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믿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죄사함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뉘우치고 돌아올 때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한 심각한 죄에 빠진 사람일지라도 완전히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라고 봅니다. 용서 받을 길을 닫지 아니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4)

분명히 조건을 다셨습니다. 회개하노라 하거든 용서하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셨으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4-6)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가 용서하여 줄 터이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들에게는 한없는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4-5,10)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분명 회개를 전제로한 용서하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온전하시고 우리도 그와 같이 온전해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나님의 용서가 불완전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끊이 없고 자비는 무궁하십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아니하시고 회개지 않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를 구할 때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죄로 인해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참음으로 기다리고 마음으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참된 용서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상대방이 용서를 구할때만 용서하면 된다고 해서 용서라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상대방의 잘못과 나의 잘못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입니다.자기가 용서를 구해야 할 텐데 다른 사람의 용서를 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어리석음을 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사람이 용서를 청할 때 용서해 줄 수 있는 관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99.6.21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죄 지는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는 누가복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되어있네요. 기도하는 순간에 용서하는 것일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역시 원문을 보아야 해결될 듯.

99.6.23
1. 사람이 일일히 깨닫고 회개하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지 않으
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재문이 말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는 것이지. 그냥 가만 있어도 죄사함을 받나? 이건 별로 문제가 안될 거 같다. 죄사함이라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인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용서라기 보다는 죄의 보응을 주님께 뒤집어 씌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 아무튼 내가 처음 회개하지 않는자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표현을 바꾸어야하겠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는자… 라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지 우리는 우리 죄를 다 깨닫고 회개할 수 없으니깐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별로 문제는 안되는 것 같은데? 잘 이해되는지 모르겠다.

2.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저리르고 난 이후에 멀리 떨어지게 되어서 그가 뉘우쳤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라면 용서해야하지 않을까?
글쎄…. 용서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정리가 안돼서 모르겟지만 우선 확실한건 그도 사랑해야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거든. 하지만 사랑과 용서는 개별적인 거라고 봐. 즉 사랑하면서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지.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용서라는 것이 어떤 내적 상태, 즉,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라던가.. 이런 걸 의미한다고 보지 않아. 그건 사랑의 개념이겠지. 내가 아직가지 생각하기엔 용서는 어떤 치러야하는 잘못의 댓가를 탕감하여 주는 것이라고 봐. 사랑은 언제나 요구하신 계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거나 어떤 복수심을 품거나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맞지만 용서라는 것은 어떤 겉으로 보여지는 행위.. 이고 그건 무조건적인 계명은 아니라고봐. 그러니깐 만약 나에게 과거에 죄를 짓고 지금은 없는 사람은 용서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물어본 것은…. 아마 용서가 아니라 사랑해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잘못 표현한 것이겠지. 왜냐하면 그가 떠나있다면 용서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거든. 그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용서라는 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용서의 개념이라면) 그에 대한 답은 사랑해야한다.. 이고

(결론)
내가 말하고 싶은건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응하는 벌을 주는 것이 때론 맞을 때도 있다는 것만 성경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가 뉘우티지 않으면 앙심을 품고 있어도 좋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서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옥을 없다고 주장해서 여러가지 이단사상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 기억하길.. (무섭지? 으흐흐)

99.6.23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예수믿는 사람들이 하는 회개라는 것은 회개하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 받은 것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글을 보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지요. 예수님을 믿는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위 말이 맞다면 답은 그래도 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모든 죄에 대한 용서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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