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해진 하나님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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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에 갈 때마다 몹시 기분이 상해서 돌아오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흡사 다른 종교의 모임에 참석한 것처럼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헌금봉투에 적힌 기도내용들을 읽고 목사는 기도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헌금봉투에 적어서 낸 기도제목들을 보면 전부 교회 잘 되게, 하는 일 잘 되게, 자식들 잘 되게, 돈 잘 벌게, 취직 잘 되게, 건강하게… 그래 그럴 수 있다. 감사헌금 봉투에 기도내용을 적는 것을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하게 생각한다. 그냥 감사하면 안되나.
뭔가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스러운 것 같다. 물론 여러가지로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다. 나도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냈고, 직장을 잃었으며,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생활에 만족한다. 그래 본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좋다. 힘드니까. 사람들은 항상 힘들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렵다. 항상 행복해도 부족한 삶인데 말이다.
왜 헌금봉투에 기도제목을 적어서 낼까. 그리고 그걸 목사는 왜 읽어줄까. 나는 이건 결코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나는 단언컨대,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출석스티커를 붙여서 무슨 상품이라도 준다나보다. 아침마다 식당에서 밥도 해준다. 고등부 아이들은 찬양을 준비해서 새벽 5시 이전부터 교회에 나와 찬양을 인도한다. 본당에 수백명이 들어서서 교회가 꽉 찼다. 이건 무슨 현상일까. 교회의 새벽기도자들을 위한 서비스 정신은 굉장히 투철하다. 그건 무조건 잘못이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설교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어제의 설교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 지혜를 주신다는 내용이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지혜란 것이 참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다. 본문은 솔로몬의 이야기였지만, 솔로몬이 기도를 열심히 했다는 내용은 없다. 일천 번제를 드렸을 뿐이다. 게다가 솔로몬이 첨부터 지혜를 구할라고 일천번제를 드렸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타나셔서 물어보았을 뿐이고 그는 하나님 마음에 쏙드는 대답을 하였을 뿐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그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책임감의 막중함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에 마음에 합당하였다. 그가 지혜를 이용하여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려고 지혜를 구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백성의 송사를 공의롭게 처리하기 원해서 지혜를 구했다.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기회비용차원에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구하라고 했을 때 부나 명예를 구하기를 포기해야만 그는 지혜를 구할 수 있었다. 지혜를 구할 때 그에게는 그런 것을 포기하겠다는 자세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솔로몬이 예상했던 일과 전혀 반대의 일이다. 그는 지혜를 구했을 따름이다. 그는 이미 포기할 자세가 되어있었다. 다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금도끼은도끼 이야기와 비슷하게 다른 것을 다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이상하게 지혜를 구하면 다 주신다는 것처럼 설교하면 전혀 성경의 교훈과 반대의 설교가 되고 만다. 성경은 부와 명예를 포기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그렇게 본다. 성경은 그러한 것들을 포기할만큼 공의를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자신의 맡은 자리의 일을 성실, 정확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모든 것을 다 주실 것이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판기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야고보서에도 기도하면 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일컫는 ‘지혜’라는 단어의 깊은 의미는 야고보서 전체를 읽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 야고보서에서 지혜란 매우 유순하고 겸손하며, 폭력적으로 체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자세를 말한다. 야고보서 3장에 매우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설교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면 지혜를 주신다고 설교한다. 그말의 뜻은 무엇이냐 ‘공부도 잘하게 되고, 사업상의 결정도, 투자도 잘하게 되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주신다’는 식의 설교가,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듣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게 하늘에서 난 지혜라고 야고보가 설명했는가. 그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뜻을 설교하려는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그리고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것에 합치되도록 설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의 기쁨을 좇는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이러한 설교는 심히 모독적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뒤틀리게 만든다. 야고보서에서 지혜를 구한다면 그 지혜는 다툼과 시기를 없애고, 서로 존경하게 만드는 지혜를 가지게 된다.
야고보서에서 ‘세상일이 잘될지 안될지 누구도 알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러이러될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데도, 마치 ‘지혜롭게 사업을 잘 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면 이것이 과연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성경이 성경답게 되어야 설교이지 설교자가 성경을 자기 뜻에 맞게 설명하니 기독교가 매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제발 성경을 일부만 떼어내서 적당히 설교하려는 자세를 모든 설교자들이 버렸으면 한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기록된 이 감동적인 고백은 선교헌신자들 사이에서 많이 설교되고, 인용되어져 왔다. 그러나 제대로 바르게 설교되는 것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다. 특히 오늘 설교는 나는 정말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감동적이지만 무서운 고백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이 고백은 엄청난 포기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6장의 설교제목은 ‘기도하는 자에게 소명을 주신다’는 설교였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6장과 기도하는 자에게 소명을 주시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성경에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소명받은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바울? 바울은 다메섹에 신자들을 죽이러 가다가 소명을 받았다. 다윗? 그는 양을 열심히 치다가 소명을 받았다. 사무엘? 그는 잠자고 있다가 소명을 받았다. 모세? 그는 소명을 받기를 거부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베드로? 그는 물고기를 잡다가 소명을 받았다. 이들 중 나에게 소명을 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없다. 그런데 기도 외에는 소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설교를 들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6장으로 설교를 한다면 이 나라의 영적인 상황이 과연 이사야 시대와 비교해서 어떤지부터 철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사하다고 판단이 된다면 이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선포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국가적으로도 적용할 수 있지만, 교회나 가정,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반어법이다.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반어법이면서 동시에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예언적 선포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사야의 헌신을 다룬다면 그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소명에 임했다는 점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어야 할 것이다. 그는 악플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는 실제로 므낫세 왕의 시대에 순교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데는 때로 극심한 자기 포기가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정직하게 사업하려면 매우 힘들 것이다. 때론 심한 적자에 허덕여서 빚만 남을지 모른다. 정직하게 경영하다가 대부분은 실패할 것이다. 정직하게 경쟁하다가 많이 손해를 볼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너 포기할래? 이사야에 헌신은 그런 관점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세대에 악인이 번성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해야 할 것이다. 바르지 못한 행위는 당분간은 잘되고 돈도 잘벌고 사회적인 성공도 빠르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헛되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망할 때 거룩한 씨가 남아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망하더라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킬 것이다.
이사야서에 대한 이야기는 접고 다시 새벽기도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할 것 같다. 제발 하나님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줄 것이라는 설교는 그만했으면 한다. 기도의 목적은 세속적인 풍요를 위한 것이 결코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부정과 탐욕으로 인한 죄악을 벗어나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 나라면 첫째, 회개를 선포할 것이다. 올바른 회개는 항상 필요하나 지금은 더욱 그렇다고 본다. 특히 정직에 대해서, 그리고 욕심에 대해서, 비교하고 서로 험담하는 것들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썩어져가는 교회와 진리에 대해서 눈물흘리고 참회하고 도고를 드려야 한다고 본다. 이 나라에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악플이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가 바르게 되게 해달라고 정말 눈물을 쏟아가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장서서 더럽히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그리고 독선과 자기 신앙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이다. 김세윤 교수님도 지적했지만, 교회가 지성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교인들을 생각이 없는 바보로 만들고 있다. ‘시대정신’이라는 허접 비디오를 보고도 제대로 반박하기는 커녕, 보면 안된다고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왜 세상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말고 도망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믿고 있는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참으로 그런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숨이 나온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기독교인 중에는 무식하게 믿기만 하는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나 만연해 있다고 본다 나는. 무식하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건 말건 외치기만 하면 전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미지를 아주 나쁘게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열정을 지혜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데 더 쏟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나의 시각이 편협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는 온통 기복신앙으로만 물들어져 있다. 새벽마다 모여서 나 잘되고 교회 잘되기만 기도하는 게 거의 대부분인 기도다. 경제가 어려우니 경제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기도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맞는 것일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그분은 왜 수단이 되어버린 것일까. 왜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들 사이에서 초라해보이는지 슬프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실직도 했고, 가정형편이 썩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충분히 행복하고, 건강을 잃더라도, 부채에 허덕이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와 그의 영광만 구한다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겠다고 했다. 그것이 세속적으로 보기에 망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괜찮다.

“초라해진 하나님”에 대한 3개의 댓글

  1. 오늘은 교회 끝나고 저녁 때 승훈이네 가서 떡볶이 얻어먹고 왔지..
    점심 때 먹은 비빔밥이 너무 매워서 하루 종일 속이 부글거렸는데 이제야 정신을 차리겠다.
    ^^ 어제 승훈이와 너와 만난다기에 기대하고 나갔는데 뜻밖에 ‘아이’형님을 만나 정작 너와는 이야기를
    많이 못한거 같아… 물론 유익한 만남이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한 기회였지만 막상 너는 형님 온 뒤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구만~~

    이 덧글을 바로 볼지 나중에 볼지는 모르겠지만~
    네 글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때의 너보다 지금의 내 영적 상태는 더 안좋지 않을까!
    나도 한 때는 정말 순전한 열정으로 내 모든걸 던져보려 했지만 기복 신앙에 물들어 가는 교회의 모습.. 그리고 침묵하는 하나님의 모습에 낙담하여 내가 믿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그 순간 패닉이 왔지… ^^;;
    지금은 뭐 그냥 멍하니 있다. 네 글처럼 ‘소명’은 달라고 매달린다고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말 그대로 ‘부르심’이니 부르는 분 마음인게지… 하지만 정말 그 ‘부르심’이 온다면… 그 때는 아마도 얍복강가의 야곱처럼 씨름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승훈이도 나와 성장을 같이한 즐거운 벗이고 정말 배울게 많은 친구야… 5년 전만 해도 이런 대화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승훈이가 그저 믿고 그러려니 하고 있다. ^^
    사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인데~ 툭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구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좋겠네~ ^^
    깊은 밤 두서 없이 끄적여봤어. 홈페이지가 네이버 블로그면 더 쉽게 올텐데… ㅋㅋㅋ 좀더 자주 들르마~ 즐거운 한 주 보네~ ^^

  2. 나는 실직도 했고, 가정형편이 썩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충분히 행복하고, 건강을 잃더라도, 부채에 허덕이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와 그의 영광만 구한다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겠다고 했다. 그것이 세속적으로 보기에 망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괜찮다.

    놀라운 신앙고백이세요.. 아멘..

  3. 기업분석을 보다가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20년 정도 다닌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된 이유가 글쓴분의 생각과 같아서 입니다. 벌써 7년은 넘은 것 같군요. 매일 기도하고 성경 말씀은 보지만, 기독교인이 교회를 안다니니 교인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은 것을 반성하고 가네요. 님과 같은 목회자 분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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